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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태를 살려보낸 조수현

조수현은 권총을 꺼내 박광태에게 겨누고 그를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먼발치서 박미애가 따라 나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는 개천가에 하얀 새 몇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백로였다. 조수현은 백로가 다시 나타난 것이 기뻤다.

정릉천 다리에 이르러 조수현이 입을 열었다.

"미애씨, 이리 와서 아버지를 모시고 가세요."

박미애는 아버지와 함께 다리를 건너갔다. 조수현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허공에 대고 권총을 발사했다. 백로 세 마리가 어둠이 내리고 있는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총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박미애가 조수현 쪽을 보고 있었다. 조수현은 권총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어둠 때문에 확실치는 않았지만 박미애는 고개를 숙여 목례를 보내는 것 같았다.그것이 박미애를 본 마지막이었다.

박미애를 보내고 집무실에 돌아오자 당원이 다시 사과하며 물었다.

"동무 미안하오. 그 고약한 놈은 제대로 처리되었겠지요?"
"나에게 처리 권한을 주었으니 더 이상 묻지는 마시오. 게다가 그 자를 기소한 것이 납니다. 그 자의 처리는 당원 동무의 양해가 없더라도 나의 권한입니다."
"알겠소. 아주 깐깐한 여성 동무로군."
"그래요. 나는 아주 깐깐합니다."

조수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원도 웃으며 말했다.

"여군 장교 동무의 행운을 빌겠소."

당원과 요원이 떠나자 조수현은 곧장 부하들을 지휘해 퇴각을 서둘렀다.

전쟁을 끝내고 싶은 외세들

조수현이 평양에 돌아온 후에도 전쟁은 38선을 사이에 두고 지지부진하며 계속되었다. 개성에서 시작한 정전협정이 판문점이라는 곳으로 옮겨 진행된다고 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치열하게 땅 빼먹기 전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전선은 이미 38선 근방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미군과 중국군의 암묵적 합의 같은 것이었다. 양쪽 모두 커다란 실패를 경험한 터라 어느 쪽도 전선을 치고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하지 못한 것이다. 중국군은 미군의 화력과 공군력을 두려워했다. 미군은 중국군의 겨울 공세에 세 차례나 당한 패배를 기억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이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손해를 보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명분을 찾는 일도 실익 못지않게 중요했다. 미군은 동부지역에서 전선을 최대한 북상시키는 대신 개성이 있는 서부전선을 방기했다. 중국군도 금강 전선 이하로 밀고 내려가지 않을 때부터 이미 현상 유지의 방어 전략으로 바뀌어 있었다. 북한 지도부는 남하하자고 주장했지만 중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중국은 밀고 내려갈 의사도 없었을 뿐더러 보급에도 문제가 있었다.

휴전을 정식으로 제안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전쟁 발발 1년에서 이틀이 모자라는 1951년 6월 23일,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안했으며 중국과 북한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휴전을 반대한 것은 이승만 정권과 선동적인 국내 신문들뿐이었다.

그들의 뜻과는 달리 7월 8일 협상 절차 문제가 합의되고, 이틀 뒤부터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갔다. 사실 전쟁은 1951년 7월에 종료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양측은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되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미군의 폭격기들은 부단히 북한 상공에 출몰했다.

북한은 협상 장소로 개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협상의 주도권을 북이 쥐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협상 장소를 조금 아래로 내려 널문리에 있는 한식 음식점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 한식집을 '널문리 가게'라고 불렀다. 그리고 널문리 가게를 한문으로 바꿔 표기한 것이 판문점(板門店)이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모적인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백마고지 전투였다. 12번이나 주인이 교체된 이 고지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양쪽 합쳐 수천 명에 달했다. 민둥산 하나를 얻으려고 치른 대가치고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이 산에는 25만 발 이상의 폭탄이 터졌다. 미군 항공기의 출격 횟수만도 750차례를 넘었다.

백마는 원래 산이나 고지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대 이름과도 무관했다. 전투가 끝나고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게 된 그 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산 전체가 하얗게 변색되어 버려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백마고지 말고도 산봉우리들에 붙여진 이름들은 다양했다. 김일성고지, 마오쩌뚱고지. 독수리고지, 아이스크림고지...이런 산봉우리 하나 당 평균 700명 정도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아마도 고지에 붙여진 다양한 이름들에는 무모한 땅 따먹기 싸움에 대한 허탈과 냉소의 의미도 들어 있었다. 

그 해 여름이 다 가기 전 조수현은 몸을 풀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이씨 성을 부여했다. 그녀는 귀와 눈매가 아버지와 비슷한 아들을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그녀는 민족에게는 불행한 전쟁이었지만, 그 불행한 전쟁이 자신에게는 행운을 안겨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두오가 들려준 양자역학의 세계관이 맞을 법도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한, 이두오가 말해 준 확률로 따져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한시바삐 전쟁이 종료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끊임없이 불거지는 문제점들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포로 송환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물리적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심리적으로나마 승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포로 송환 문제를 포로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맡기자는 방식이었다. 만약 인민군이나 중국군 포로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일 뿐더러 전쟁에 개입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제안을 가장 난감하게 여긴 측은 중국이었다. 자국으로의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가 인민군은 7900명이었는데 중국군은 훨씬 더 많은 14700명에 달했다. 이것은 한국전에 파견된 중국군 중 많은 수가 중국 공산주의 혁명 전 장개석의 국민당군 소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 본토보다는 대만으로 가기를 원했다.

한국전쟁의 특수성

김성식이 살아 있었더라면 여기에 한국전쟁의 특수성이 있다고 분석했을 터였다. 세계 어느 전쟁도 몇 개월 간격으로 상대 영토의 90% 이상을 번갈아서 점령하고 통치한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외세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유력한 방증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고 보니 전쟁을 치르며 양측은 현지의 사람을 대상으로 모병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가족과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양산되었으며 전쟁이 끝나고도 부대 소속국이 아닌 고향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미국은 북한 전력의 핵심 요충원인 수풍발전소를 맹폭했다, 이것은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욱 가혹한 일을 당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의 권력 내부에 동요가 나타났다. 결국 북한은 온건파가 힘을 갖게 되어 미군의 협상안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중국이었다. 스탈린은 중국을 설득했다. 사실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할 이유는 중국에 가장 많았다. 중국은 혁명에 성공한 지 불과 1년 만에 한국전에 참전하느라 후속 혁명작업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중단된 사회개혁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중국에는 대만 문제까지 걸려 있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소련의 권력층에서는 냉전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아이젠하워는 군인 출신이지만 한국전의 조속한 종전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었다.

결국 대한민국의 이승만만 유일하게 휴전에 반대하는 꼴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설득했고, 이승만은 휴전의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우여곡절의 2년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 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은 서로 인사 한 마디 교환하지 않은 채 협정 조인석에 앉았다. 그로부터 불과 12분 후 서명을 마친 해리슨은 헬기를 타고 문산리로 향했으며, 남일은 지프를 타고 개성 방향으로 갔다. 이로써 3년 1개월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참전국 서명에서 이승만만 끝내 정전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이 소설은 앞으로 3~4회 더 연재되면 끝나게 됩니다. 이 소설에 이어 6·15 통일추리소설 을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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