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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얼어붙은 듯 자리에 멈칫 섰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좌우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가 철길임을 생각하고는 몸을 움직여 철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가 막 철길을 벗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두 사람의 괴한이 다가오더니 그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그는 이마에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성식은 꿈을 꾸고 있었다. 간밤 비에 촉촉이 젖은 나무들이 포르스름한 윤기를 머금고 있었다. 북악 너머로 양떼구름이 지펴지고 있었고 밭에서는 배 향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작은 문을 열고 집의 뒤란으로 들어섰다. 마당으로 나온 그는 어미 염소가 새끼 염소를 데리고 한가로이 풀을 머금고 있는 장면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툇마루로 올라가 서재에 들어가 보았다. 뜻밖에도 두고 간 책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신기하고 기뻤다.

 

인민군은 거제도 수용소로 보내고...

 

그는 힘겹게 눈을 떠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를 응시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그 역시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그는 군인인 것 같았다. 어둠 속이기는 하지만 김성식은 그가 인민군임을 복장으로 알 수 있었다.

 

김성식은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민군은 김성식과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삶의 의욕이 전혀 없어 보였다. 김성식은 머리를 들어 보려고 하다가 너무도 심한 통증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주 희미한 의식 속에서 김성식은 두런거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주변은 깜깜했고 옆방에서 전깃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움직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결박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려 했으나 웬 일인지 혀가 돌지 않았다.

 

그때 벽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옆방 것들은 뭐야?"

"하나는 인민군 장굡니더."

"민간인은?"

"검문에 부릉카길래 후려팼능기요. 그란데 주머니를 뒤져 보니 대학교수 신분증이 나왔심더."

"뭐라고? 교수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다는 거야?"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닙니더."

 

"모처럼 인민군 장교 하나를 생포했다 했더니.... 그런데 교수란 놈은 검문에 왜 불응한 거야?"

"허떡 가방을 뒤져 보니 책과 팔로군 신분증이 나왔심데이."

"뭐라구?"

"마, 인민군과 함께서 찍은 사진도 있었구마요."

 

잠시 아무 소리도 안 나더니, "인민군 장교의 상태는?"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멀쩡합니더."

"관등성명은 파악했나?"

"인민군 상위 이명준이라카는데요."

 

물론 김성식이 이명준을 알 리 없었다. 이명준은 전쟁 초기 조수현에게 민간인 희롱 혐의로 조사를 받은 정치보위부 장교였다. 그는 일반 병과로 전출된 후 낙동강 전투에서 낙오한 끝에 대한민국 군경에 체포된 것이었다.

 

"민간인은?"

"마, 대학교수는 김승식인지 성식인지 그렇씸더."

"저 자는 이제 대학교수가 아니야."

"........?"

 

"팔로군 빨치산이야."

"알았씸더!"

"잘 들어!"

"네. 잘 듣갔심더!"

 

"인민군은 거제도 수용소로 넘기고."

"넘기고!"

"빨치산은,"

 

잠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알았씸더!"라는 우렁찬 대답이 또 들려왔다.

 

김성식의 허무한 죽음

 

곧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옆방의 불빛이 쏟아져 내리듯이 들어왔다. 대한민국 군경은 인민군 장교를 끌어내는 듯했다. 이어서 김성식은 머리 위에서 절그럭 하는 노리쇠 소리를 들었다. 그가 희미한 의식 중에도 일순 공포에 휘말렸을 때, 엄청난 폭음이 귀 옆에서 불을 뿜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눈을 뜨고 바라보아도 빛은 없었다. 꿈을 꾸며 살아가도 길은 멀었다. 아픈 가슴에 지금 숨이 멎어도 희망의 먼지는 내려앉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라고, 이젠 아니라고, 말해 버리면 그는 더 편했을 터인데, 매일 망설이듯 편안치 않았던 그의 얼굴...

 

웃으며 보내 준다는 말을 어찌 하겠소?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다고 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염원했지만 하늘이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데려가 주오. 하늘이 끝내 모른 척 저버린대도 불꽃처럼 꺼지지 않는 별빛으로 수십억 년 밤하늘에 타오를 테니, 그를 위해서 눈물마저도 지워야 했던 그동안 그는 얼마나 불편했겠소.

 

김성식은 그렇게도 허무히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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