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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 있던 김성식은 서울 탈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중부 전선의 답보 상태가 장기화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서울 탈환이 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전사를 쓰는 그는 전쟁의 진행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전쟁에 소련은 군사 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했지만, 중국은 전쟁 초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중국은 정규군을 지원하지는 않았지만 팔로군 중에서 조선인을 뽑아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 발발 직후 명륜동 길바닥에서 주운 팔로군 신분증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미군이 서울을 고립시켜 중국군 스스로 후퇴하도록 만든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인민군이 전쟁 초입에 서울을 점령하려고 구사한 전략과 비슷한 것이었다. 다만 미군은 철저한 항공 촬영으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면서 작전을 진행시킨 점이 달랐다. 미군 정찰기는 3월 12일부터 중국군 대규모 부대가 북으로 이동하는 것을 관측했다. 이날 한강을 건넌 미군 정찰대는 서울에 중국군 군대가 없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점령군이 네 번 교차한 서울

중국군이 서울에서 빠져 나갔음을 확인한 미8군 사령관은 수륙양용차를 이용하여 한강도하작전을 벌였다. 중국군의 반격도 없었고 시가전도 벌어지지 않았다. 인천상륙 후 서울 탈환 때에 벌어진 치열한 시가전 양상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9· 28수복 때와 같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열지 않았다. 수도의 기능은 여전히 부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3월 17일 방한한 맥아더도 서울에 들르지 않고 춘천 1해병사단을 순시한 후 동경으로 되돌아갔다.

점령군이 네 번씩이나 교차된 서울은 폐허였고 주민들의 정신은 공황 상태였다. 교통, 통신 등의 기간 시설은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주민들의 식량도 턱없이 모자라 모두들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는 불과 20만의 인구가 남아 있었다. 전체 인구의 85% 이상이 서울을 버린 셈이었다. 이것은 인민공화국의 시절이 얼마나 괴로웠으며, 그 후 귀환한 대한민국의 서슬이 얼마나 퍼랬는지를 알려 주는 수치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식량 문제를 비롯한 많은 어려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시민들의 서울 복귀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김성식이 어려운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피난 생활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강의 외 대부분의 시간을 전사편찬위원회 연구실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극동의 작은 나라에 국운을 걸고 싶지 않았다

1951년 4월 11일 정오, 일본 라디오 방송은 워싱턴 발 기사로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고 보도했다. 사실 맥아더의 해임은 중국군의 개입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특히 1951년 3월 미군이 다시 38선을 압박하게 되자, 맥아더는 호전적인 전쟁 계획을 다시 세상에 알렸고 이를 접한 백악관은 그의 행동을 월권과 전횡이라고 간주했다.

맥아더는 유엔군사령관, 주일연합군사령관, 극동미군사령관 등의 일체 보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38선을 넘어 진격하겠다는 의사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공화당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맥아더는 전쟁의 완승을 원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이상 38선은 무의미하며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역시 유엔군이 38선에서 정지해서는 안 되며 한만국경선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다시 38선을 넘을 것인지의 문제는 세계적인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중국과 교역을 희망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38선 돌파에 반대하는 입장을 일단 취했다. 당시 워싱턴 수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그들은 중국이 본격 개입한 이상 압록강까지 진출한다고 해도 전쟁은 종료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압록강과 두만강을 합쳐 1200km에 달하는 국경선에서 중국과 소련의 대군과 대치하게 되는 일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현저히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극동의 작은 나라에 국운을 걸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변고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앉아 <라이프>지를 뒤적이던 김성식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마침 대구 아래 경산까지 가는 지프 편이 있어 그는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집에는 사람을 시켜 대구 아버지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지프가 양산쯤에 이르자 운전사는, 이곳은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며칠 전 이곳에서 차가 고장 나 멎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다행히 자동차는 고장 없이 양산 골짜기를 통과했다.

경산에서 내린 그는 대구까지 간다는 생선 실은 화물 자동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화물 자동차가 대구 바로 아래에서 고장이 나 멈춰 서 버렸다.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대구 시내 쪽을 향하여 걷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몇 분 안 남기고 겨우 만촌리 지서를 찾아 들어갔다. 그는 사정을 말한 후 낯선 순경의 배려로 숙직실에서 밤을 지냈다.

날이 밝자 마음이 급한 그는 허겁지겁 파출소를 나섰다. 그는 30리 길을 걸어 아버지가 사는 마을 입구에 이르렀다. 그는 갓을 쓴 한 노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혹시 마을에 초상이 났다는 말을 들으셨는지요?"
"최근 수삼일 동안 그런 소식은 듣지 못했소."

김성식은 다소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이웃에 홀로 사는 형수가 그를 맞이해 주었다. 형수는 전쟁과 시아버지 병구완으로 지쳐 있었다. 아버지는 해소를 앓으신 끝에 심장에 무리가 생겨 중태에 빠져 있었다. 노인은 매일 매일을 주사기에 의존해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늙고 지친 아버지가 가여웠지만 어떻게 해 드릴 방도가 없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다행히 의사는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면 해소 발작이 생기므로 못 피우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병고와 전쟁에 지친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 삶을 도모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따금씩 담배를 찾고는 했다. 담배 연기를 두세 모금 빨기도 전에 환자는 격심한 해소 발작을 일으켰다.

할 수 없이 김성식은 담배와 성냥과 재떨이를 모두 치워 버렸다. 아버지에게서 담배를 빼앗은 그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기가 죄스러워 차제에 담배를 끊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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