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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공부는 잘 되지? 파이팅이다. 

우리 예쁜 며느리, 일이 힘들지 않니?

네 어머니가 '며늘'하고 부르던데 나도 불러보니 다정한 것 같다. 너는 어떠니?

 

네게 고백할 것이 있다. '며느리가 수의사이니 우리도 강아지 한 마리 길러보자'라는 너희 어머니 말에 대답 못했다. 똥 치울 자신이 없었거든.

 

미국에 신종독감이 많이 퍼지는 모양인데 샌프란시스코는 어떠냐? 조심 또 조심해라.

 

소식 들었겠지만, 바보 노무현이 갔다.

국민장이면 뭐하고 수백만이 조문하면 뭐하겠니? 그는 죽음으로 내몰렸고 우리는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

 

지난 일주일 동안 멍하니 지냈다.

음식 맛도 모르겠고, 잠도 자는 건지 마는 건지, 걸어도 허방을 딛는 느낌이다. 노무현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TV를 보면 자꾸 눈물이 흐른다.

너희 할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우나보다.

 

그이를 좋아하지만 너희가 알다시피 나는 노사모도 아니고 그이가 속한 정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우리 단체를 그이 특유의 직설적 어법으로 비판할 때는 나도 더 심한 비난을 돌려주곤 했었는데 후회된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 말이 맞구나. 노무현 같은 바보를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까?

 

바보 노무현이 3당 합당 반대하며 부산에 가서 연거푸 떨어지고 '농부가 밭을 탓하랴'라고 말하는 그에게 정이 갔었다. 넓은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택하는 그의 무모함은 외면하기 어려운 매력이었다. 

 

서울에 출마했다 한 번 떨어지고 금방 고향에 가서 당선해버리는 어떤 분이나 당선이 뻔한 그 분에게 공천 안 주는 양반들은 뭐냐? 이 분들을 보니 바보 노무현, 그이가 새삼 커 보인다.

 

나는 권위를 벗어버린 그도 좋아했다. 어떤 신문은 대통령인 그이가 값싼 필기구를 사용하는 것까지 비아냥댔지만 나는 그런 서민적인 모습이 좋았다. '밤의 대통령' 조선일보를 향해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떼라'고 할 때, 어떤 힘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가 너무 멋졌다. 나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아 그런지 존경보다는 정이 가는 사람이었다.

    

28일 너희 어머니와 함께 대한문 앞 분향소를 찾았다. 한꺼번에 수십 명씩 분향하는데도 4시간 넘게 줄을 섰다. 오래 못 서있는 너희 어머니는 여러 번 쪼그려 앉았다. 집에 오니 밤11시가 넘었다.

 

29일 서울광장(시청광장을 이제 서울광장이라 부른다) 노제에 참석했다.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서울광장 근처에는 발붙일 틈이 없었다. 시청역 12번 출구지붕 위에 서커스하며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올라가 보니 그곳에 머리 허연 사람은 나 혼자더구나. 화장장으로 떠나는 그이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그이가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또 울컥했다. 그이가 좋아하는 노래는 세대가 같아서인지 정서가 같아서인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같더라.

 

29일 저녁 뉴스는 노 전대통령 영결식을 전하는 화면 밑 자막으로 삼성 에버랜드 사건의 이건희가 무죄선고를 받은 소식이 겹쳤다. 돈(錢)에 돈(狂) 나라 같아 좀 두렵다. '사람 사는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돈이나 권력이 모든 걸 지배한다면 사람이 살만한 나라는 아니잖니?

 

노 전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꿨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가 제대로 작동하는 세상 아니겠니? 요즘은 권력의 주인이 국민 같지 않다. 권력을 자꾸 내려놓으려 애쓰던 바보 노무현이 그립다.

 

용산 참사와 화물노조 지부장의 자살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의 서거 같은 불행이 여기서 멈출 것이라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가 되었으면 좋겠다.

 

바보 노무현은 갔지만 바보 노무현의 패배가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대한문 앞 지하도와 돌담길 옆에 줄 서있던 28일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추모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신부님의 강론 중 일부이다.

 

"20억 크리스천들의 기도문에는 예수를 죽인 로마인 정치가가 나온다,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획수사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을 죽였다는 사실 역시 몇 백 년 동안 기억될 것이다."

 

좀 격한 표현이기는 하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아마데우스 너희들도 봤지? 당시 음악계의 최고 권력자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과 인기를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간다. 모차르트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음악은 살아있다. 

 

이 땅에 바보 노무현의 정신이 부활했으면 좋겠다. 그가 온 몸을 던져 이루려던 지역주의 청산, 권위주의 타파, 상생 같은 가치들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내 눈으로 봤으면 좋겠다. 졸렬한 지역감정, 시대착오적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이 땅 구석구석이 고루 잘사는 걸 봤으면 참 좋겠다. 수많은 추모인파에 희망이 있었다. 

 

고향사람이라면 거짓말쟁이도 정치철새도 성추행범도 술주정뱅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찍어주는 멍청이들이 사라진 우리나라를 희망한다. 지방과 수도권이, 남과 북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상생하는 우리나라를 꿈꾼다. 실력과 리더십보다 직위와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무능한 윗사람이 없는 우리나라를 꿈꾼다. 바보 노무현의 꿈 '사람 사는 세상'을 함께 꾼다.

 

그 세상을 내가 못 보면 너희들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너희가 못 보면 너희 자식 세대에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희망을 갖자. 

 

태어날 아이들에게 내가 진정 좋아하는 바보 노무현이 꿈꾸던 '사람 사는 세상'을 전해줄 거지?

운전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사랑한다.

 

서울에서 아버지가.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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