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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의 힘은 어디서 나올까. 주권자인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 맞는 말이지만 한편으론 순진한 소리다. 국민의 지지라는 게 웬만해선 눈에 확 띄게 드러날 리도 없고 평소엔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그걸 얻기란 얼마나 어렵고 번거로운가.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그보다 손쉽고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힘이 있으니 '칼', 다시 말해 막강한 공권력이다. 한국 현대사를 보라.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군인 출신 대통령이 집권하던 한국에서 대통령의 힘은 군대나 정보·수사기관을 통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일 새벽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일 새벽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검찰조사를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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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주의 인물을 번호까지 매겨가며 민간인 사찰에 나섰던 보안사(현 국군기무사령부)는 민중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정권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경찰과 검찰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통해 '합법적'으로 양지에서 정권을 떠받드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휘두를 수 있는 칼을 거부한, 참으로 순진한 대통령이 있었으니 바로 노무현이다. 그는 칼이 권력자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군사정권이 마감되면서 어둠 속에서 활동하던 국정원, 기무사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여전히 절실한 과제였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한 정권 아래서 동고동락해 온 검찰에겐 다소 무리한 요구였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도 당·정·청·검·경은 당연히 하나 아니었던가.

검찰 개혁 필요성 느끼게 해 준 노무현식 '검사와의 대화'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검찰개혁을 추진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유행어까지 탄생시킨 '평검사와의 대화' 이후 임기 1년 6개월을 남긴 현 시점까지 노 대통령은 힘있는 검찰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장관이 '평검사와의 대화'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검찰개혁을 추진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는 유행어까지 탄생시킨 '평검사와의 대화' 이후 임기 1년 6개월을 남긴 현 시점까지 노 대통령은 힘있는 검찰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장관이 '평검사와의 대화'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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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물정 잘 아는 현명한(?) 대통령이라면 검찰 권력을 인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방안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집권 후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없애더니 파격인사를 시작으로 검찰 개혁에 열정을 쏟았다. 당시 법무부장관에 임명된 강금실을 향해 '점령군'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검찰 내부의 반발은 컸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2003년 3월 9일 '검사와의 대화'는 상징적인 의식이었다. 온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검찰 상층부를 신뢰할 수 없다"며 개혁의지를 내보였다. 검찰의 자체 개혁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문민통제를 받으라는 말이었다.

이날 검사들도 법무부장관으로부터 인사권 독립을 요구하는 등 작심한 듯 대통령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어느 젊은 검사는 "(대학) 학번으로 따지자면 대통령은 나와 동기"라는 황당한 말을 했고, 심지어 한 검사는 "예전에 검찰에 청탁전화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하기까지 했다.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한 검사의 기개! 얼마나 멋진 모습인가. 하지만 상명하복에 철저한 검사들이 자신들의 수장(검찰총장)을 임명하는 대통령에게 보였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명문 학교와 엘리트 코스를 거쳐 당당하게 검찰청에 입성한 검사들로서는 별 배경도 없는 상고출신의 노무현을 법조계 선배로서도, 더 나아가 대통령으로서도 인정할 수 없었던 건 아닐까.

검사와의 대화는 평검사가 만만한 대통령에게 맞설 정도로 검찰의 권력이 얼마나 강고한 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검사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국민들에게 오히려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검찰과 정권의 밀월관계 단절한 최초의 대통령

노무현 정부 시절이 탈권위주의 시대였다는 데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권위주의의 상징인 수사기관을 제자리로 돌리려는 시도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강금실, 천정배 등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법무부장관에 임명한 것도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집권 기간 노무현은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도입, 검사동일체원칙의 완화를 이뤄냈고 임기말엔 검찰의 기소권에 제동을 거는 재정신청을 모든 형사사건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검찰의 권력 견제 수단으로 나왔던 대검 중수부 폐지,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의 검찰 개혁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노무현도 스스로 2007년 "대통령에 가깝다고 하는 사람들이 5년 내내 수사를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검찰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는 심경을 토로한 적이 있다.

검찰의 정치적 독립, 중립 보장은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다. 이와 함께 검찰을 견제할 민주적인 장치가 뒤따라야 검찰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노무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십년간 별다른 견제장치 없이 몸집을 불려온 검찰조직에 손을 댄 노무현에게 주어진 5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칼을 잡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검찰과 밀월 관계를 과감하게 단절한 대통령은 노무현밖에 없었다. 정치적 독립을 무기 삼아 검찰의 칼날이 자기를 향할 지라도, 설사 자기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것을 몸소 실천하겠다고 나선 대통령은 노무현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때 사법개혁 가시적 성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과 태극기.
▲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과 태극기.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사앞 검찰 깃발과 태극기.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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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어두울수록 수사기관이 활개를 친다. 수사기관의 득세는 반대로 사법부의 역할이 축소됨을 뜻한다. 법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검찰 등 수사기관의 독립보다 사법부의 독립과 개혁이 더 절실할지 모른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사법부를 좌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법원장과 대법관 임명권을 갖고 있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사법부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역대 정권 치고 사법개혁을 말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한결같이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반면 노무현 정부는 몇 가지 가시적인 개혁의 결과를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의 탈권위주의 바람은 법원에도 불었다. 2003년 구태의연한 대법관 선발 관행에 제동이 걸렸다. 법원 안팎에서 서열 중심, 남성 중심의 대법관 구성에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또한 법관 인사제도의 개혁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한 차례의 파동 끝에 사법 사상 최초로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 여성 대법관(김영란)이 탄생하였다. 사법 파동으로 법원을 떠났던 박시환 변호사 등 개혁 성향의 대법관이 임명되는 등 대법원의 구성도 점차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법원과 정부, 법조계, 시민단체, 학계 인사들과 함께 말만 무성하던 사법개혁의 방향을 잡아나갔다. 그 성과가 사법개혁위원회(사개위)의 활동이다. 사개위는 2003년 10월부터 1년 넘게 토론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최종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사개위 최종 건의문에는 대법원의 기능과 구성, 법조일원화와 법관임용방식 개선, 법조인  선발방식, 국민의 사법참여, 사법서비스 개선 등 폭넓은 의견이 반영되었다.   

공판중심주의·로스쿨·국민참여재판, 노무현 시대의 산물

이러한 안건들은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한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형사사건에서 공판중심주의가 도입된 것이다. 공판중심주의는 검찰의 수사기록과 조서가 판단의 중심이 되던 재판 관행을 버리고 열린 법정에서 얻은 증거를 중심으로 판결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제도이다. 피고인이 검사와 대등한 관계에서 유무죄를 다툴 수 있도록 불구속수사 원칙, 국선변호 확대 등 피고인의 방어권 방화를 위한 방안도 나왔다.    

또한 판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재판에 국민 참여가 시작됐다. 2008년부터 시행 중인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재판에 직접 참여하여 피고인에 대해 평결을 내리고 판사가 이를 참작하여 판결을 내리는 방식이다. 지금은 시범실시하는 형태이지만 앞으로는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도입되는 등 법조인 선발 방식이 바뀌었다. 이밖에도 대법관 제청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어 누구나 직접 대법관을 추천할 수 있게 되었고, 법원의 양형기준을 마련하는 양형위원회 설치, 판사 선발에서 법조계 경력자 비율을 높이는 법조일원화도 추진 중이다.

사실 이러한 개혁 성과들이 국민들에게 피부로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에서 느끼는 변화는 엄청나다. 재판 당사자나 들러리쯤으로 여겨졌던 국민들을 중심에 놓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법개혁의 토대를 쌓기 위해 멍석을 깔아준 노무현 시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최근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맞아 법관 독립을 요구하는 판사들의 목소리가 드셌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외침도 결국엔 노무현 시대를 경험했던 판사들의 자각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무현의 개혁은 미완의 개혁이었다. 특히 검찰은 아직도 오만하고 굳건하다. 어설픈 개혁 따위로는 끄떡도 않을 듯하다. 사법개혁을 위한 조치들도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민주적인 제도는 만들어졌으되, 이것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일이 남아있다는 말이다. 

미네르바 구속·국정원 재판 사찰... 노무현의 빈 자리

그런데, 최근 노무현 시대의 노력이 이명박 정부에서 단절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드는 건 왜일까. 두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먼저, 멀리 갈 것 없이 미네르바 사건을 보자. 예리한 경제분석으로 누리꾼에게 인기를 끌던 논객 미네르바를 검찰이 구속 기소했다. "허위 사실로 국가 신인도를 하락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처벌에 열을 올리던 검찰과 달리 법원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미네르바가 쓴 글의 수위 정도는 표현의 자유 안에 있다는 판단이다.

그런데도, 검찰은 무리한 수사를 돌아보기는커녕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더 불행한 건 미네르바의 무죄에도 누리꾼들은 이미 자기검열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국정원의 재판 사찰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정원 직원이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 개인 재판 진행 상황을 물었다. 법정에 불쑥 들어와서는 재판 내용을 염탐하다가 들켰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별 일 아니라는 반응이다. 군사정부 시절에나 있을 법한 재판 사찰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 시절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노무현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법원과 검찰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세상이 언제쯤 올 수 있을까. 그 해답은 노무현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의 행동이 살아 있을 때라야 민주주의가 계속 살아있고 또 앞으로 발전하고 성숙하는 것이지, 시민의 정신과 행동이 이후 흐지부지 없어지면, 우리 민주주의도 흐지부지된다."

권력의 상징인 칼을 놓아버린 대통령! 역사에는 발전이었으나 노무현 개인에게는 크나큰 불행이었다. 그는 그토록 개혁하려 했던 검찰의 '저인망식' 표적 수사에 걸리고 말았다. 칼을 놓아버린 대가치고는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었다.  

이 글을 맺기 전에 꼭 한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있다.

노무현 시대, 정치적 독립을 구가하며 대통령과 '맞짱' 뜨던 검사들이여,
당신들은, 2009년 이명박 대통령 앞에서도 그런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나.
살아있는 권력을 향해서도 꼭 노무현에게 했던 것만큼 칼을 들이댈 수 있나. 


태그:#노무현, #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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