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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 채제공 타계, 조정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다

망설임(與)이여,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경계함(猶)이여,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한다

'여與'와 '유猶'는 원숭이의 한 종류로 의심과 겁이 많아 소리만 나면 나무 위에 올라가 숨는 짐승이라고 합니다. 겨울에 시내를 건널 때 혹시나 물에 빠지면 차갑지 않을까 두렵고, 사방에서 엿보고 있을지도 몰라 조심 또 조심하려는 짐승. <노자>에 나오는 이 구절에 따라 두려움과 조심하려는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날 정약용은 당호를 '여유당'으로 한 뒤, 혼자 남겨진 자의 슬픔에 목이 멥니다.

남인을 이끌던 영수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뒤 조정에선 확연하게 힘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노론 벽파에겐 눈엣가시와 같았던 사람은 이가환. 정조시대 최고의 천재였으나 마음이 약한 그는 처신에 서툴렀고, 채제공의 빈자리를 메워내기엔 정치력이 모자랐습니다. 그것은 점차 비극을 잉태해 갔습니다.

조선후기 한때 정조임금의 비호 아래 한양에는 북학파와 성호학파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들어오는 서양문물에 대한 동경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과학, 수학, 천문학을 잘 알면 목에 힘깨나 줄 수 있었던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정약용은 서양학문의 세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이 시절, 정조임금은 이 새로운 문명이 조선을 바꿀 것이란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수원화성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철저하게 새로운 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설되었습니다. 북학파인 박지원과 그 제자들인 이희경, 박제가는 우리나라 최초로 규격식 벽돌을 제작하여 수원화성에 보급하였습니다. 무거운 돌을 깎아야만 했던 성의 건축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입니다. 남인 수학자들인 이가환과 정약용은 건축설계부터 기술적 자문까지 맡았습니다.

전근대적인 성리학자들의 계산과 방식으로 걸릴 시간과 경비를 70퍼센트가량 절약한 이 새로운 문명의 힘을 보여주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 여긴 것은 정조임금의 순진한 생각이었을까요?

성의 축조와 동시에 시작될 자신들의 운명을 예감한 고지식한 주자성리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문명의 맛을 본 사람들, 분노하는 노론 성리학자들

북학파에게 가해진 공격은 '당벽'이었습니다. 송나라 문학과 송나라 유학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조선 주자학의 절대정신이었습니다. 이런 송학의 특징은 정신적 고고함으로 표현되는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벽'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새로운 풍조는 '인간내면에 있는 욕망의 재발견'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수광과 같은 조선중기 신세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양에서 태어났고, 공립학교인 학당출신인 경우가 많으며, 중인, 서얼들과 어울리며 신분의 제약을 느끼지 못한 채 자랐고, 중국으로 사행을 다녀오며 새로운 문명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흐름은 고스란히 북학파까지 이어졌습니다.

박지원,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의 당벽은 결국 문체반정을 낳았습니다. 친구인 이덕무마저도 박제가 보고 조금은 자중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고 꾸짖었던 것으로 보아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 근엄한 노론 성리학자들의 분노를 산 것이지요.

남인시파들에 대한 공격의 빌미는 천주교와 얽히며 더 비극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천주교는 정통과 체제에 대한 도전자가 아니라 이로운 지식을 알려주는 친구였습니다만, 조선에 전해진 천주교의 모습은 극단적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타종교를 통해 코란을 불태울 것을 선교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불온한 것이 되듯 유교국가, 그것도 동양유교의 나라 중에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이었던 조선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행동은 충격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이가환과 정약용의 집안이 깊이 관련되었습니다.

정약용은 끝없이 끝없이 자신이 천주교와 절교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이가환과 그의 추종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해서 채제공급으로 변신할 것을 우려한 반대파들은 잡은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역사가 알려주는 진실은 언제나 가진 자가 가지려는 자보다 더 사악하고 더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채제공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1799년, 어쩌면 희망의 시대이기도 했던 18세기가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고 다가올 19세기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때를 만난 노론 벽파, 두려움에 떠는 남인 시파

채제공이 세상을 떠난 뒤 반대파의 끈질긴 모략에 시달린 나머지 고향에 칩거 중인 정약용을 정조 임금이 불렀습니다.

"머물 곳이 정해지면 들어와서 책을 바로잡는 일을 하는 것이 좋겠구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는가."

임금의 뜻을 따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날, 규장각 서리가 황금색 보자기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보따리를 풀자 <사기선> 열 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섯 질은 간직하여 집안에 전하도록 하고 다섯 질은 제목을 써서 들여보내거라.' 임금은 늘 그런 식으로 정약용의 안부를 물었고, 글씨로라도 만나보고 싶어 했습니다.

진사시절, 성균관에 부러 어려운 문제를 내려보낸 것은 정약용의 글을 뽑아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쌀을 내리기도 했고, 땔감이나 꿩고기, 젓갈, 귤, 감 등 향기로운 과일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보내줄 책이 없구나, 그러면 술이라도 마시거라."

임금은 더 이상 보낼 선물이 없다며 웃으며 말하기도 했습니다.

규장각에서 일할 때나 고향으로 내려오면 책의 표지를 써서 보내거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편지나 책의 표지에 쓴 글씨체가 변하면 그것 또한 기쁘다고 선물을 내렸습니다.

"필체가 매우 훌륭하게 변했구나."

하지만, 임금은 정약용이 쓴 <사기선>의 제목을 보지 못했습니다. 책을 내린 이튿날부터 종기를 앓더니 불과 보름만인 1800년 6월 28일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이가환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

때를 만난 노론 벽파들은 남인의 새로운 지도자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고, 남인 시파들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껴야 했습니다.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때 자신의 집 당호를 '여유당'으로 짓고 두려움에 떠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폐족의 수모를 당한 정약용, 곤장에 맞아 죽은 이가환

1801년 신유년의 새해가 밝았습니다. 아버지 정조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아직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순조 임금. 결국 임금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했습니다.

정순대비는 그동안 정조임금 시절 억눌려왔던 노론벽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반대파를 없애버리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썼습니다. 남인들을 조정에서 몰아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천주교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른바 신유박해. 이에 따라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와 의금부의 감옥에 갇혔고 지독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형인 정약종의 잘못을 고백하라는 모진 고문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자기 때문에 잡혀와 고문을 당하는 고통 속에서 정약용은 폐족의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한때 8대에 걸쳐 선비들의 꽃인 옥당을 배출했던 명문가에서 태어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마음에 맞는 스승과 군주를 만나 뜻을 펼치려고 했던 정약용의 꿈은 하나씩 부서져내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가환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이승훈과 정약종은 처형당했으며,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음은 피했으나 머나먼 곳으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경상도 장기에서 보낸 유배생활은 7개월만에 끝났습니다. 무시무시한 내용을 담은 황사영백서가 발견되었고,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습니다.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황사영 등 집안 사람이거나 스승. 수족이 잘려 나가는 고통 속에서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심환지, 이서구를 비롯한 노론들 중에서도 합리주의자는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유교국가의 체제에 대한 도전은 용납하지 않았으나 반대파에 대한 멸족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이가환의 죽음으로 남인은 절멸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만.

정약용을 피하는 백성들, 마마 호환과 같은 전염병 취급을 하다

다시 유배 길에 오른 정약용이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강진. 4살부터 글을 읽은 후 오로지 모든 것은 백성뿐이었고, 백성의 행복만을 추구했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울어주었던 정약용이 도착했을 때 백성들은 그를 피했습니다.

천주교와 관련되어 내려온 유배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정약용을 마마 호환과 같은 전염병 취급을 했습니다. 누군가 그를 위해 마루를 빌려주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의 담장을 허물고 대문을 부쉈습니다.

정약용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강진의 길 위에 버려졌습니다.

마을 밖, 천하디 천한 늙은 주모가 다가와 문간방을 내주기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요? 주모가 들여보낸 술 한잔을 마신 뒤 얼어버린 볼을 구들에 대고 정약용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제, 멋진 글을 지어도 알아줄 이 없고, 백성들의 고통을 담은 글을 올려보내도 읽어줄 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덧씌워진 가시관을 걷으려다 그 가시에 찔릴까 두려워 입을 다물거나 돌을 던졌습니다.

삼미자, 여유당, 다산, 사암... 정약용을 거친 호들

19년의 세월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간 정약용은 자신의 호를 바꿨습니다.

어릴 적 호는 삼미자였습니다. 그 무서운 천연두를 고쳐준 이헌길이라는 의사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그로부터 배운 휴머니즘에 대한 보답의 의지를 담아 자신을 삼미자라고 불렀습니다. 천연두의 흔적으로 눈썹이 세 갈래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자신을 여유당으로 부른 것은 얼음날 같은 세상을 건널 때였습니다.

다산으로 불리던 시절은 강진에서 철저하게 버려진 뒤, 그를 위로한 것이 주막집 노파의 뒷방과 근처 절의 승려들이 건네준 차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차는 그에게 안식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아마 그에게 그 안식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배가 끝나 귀향한 후 정약용은 자신을 '사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관리로서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게 된 것을 느꼈습니다. 사암은 다음 세상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담은 호입니다.

그래서, 정약용의 공식적인 호는 사암입니다.

그 옛날 강진 사람들도 정약용에게 국밥 한 그릇 대접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죽음에서 부정축재로 궁지에 몰린 독재자의 죽음을 연상한 분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쳐맸으니 포괄적 절도죄라고 우긴다면야 어쩌겠습니까.

1은 자연수입니다. 그리고 정수이고 유리수이며 실수입니다. 그렇듯이 사물의 본질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입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은 서구인이 자신들이 기르는 소를 스케치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왜 우리 소를 훔쳐가는 것이오?"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두개골 골절입니다. 자살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정치적 살인이라고도 불리며 부패한 정치사의 제단에 바쳐진 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더 통곡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기 때문에... 아니,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을 때 혹시라도 잘못하여 나에게 불똥이 튈까 두려워 외면했기 때문에...

그 옛날, 강진 사람들 중에는 정약용에게 국밥 한그릇, 술 한잔, 따뜻한 구들, 그리고 향기로운 차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의 비극은 벼랑 끝 바로 앞에서 멈춰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도대체 뭐가 그리 두려웠던 것일까요?


태그:#노무현, #정약용,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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