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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는 아랑곳 않고 천정부지로 오르는 학자금은 여대생들의 삭발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학생 본인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가계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반값 등록금' 공약을 내건 바 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최근 '등록금이 가계에 끼치는 영향'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등록금 대책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전국네트워크'와 공동으로 두 달여 동안 기획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이 기간 동안 <오마이뉴스>는 '유명인사들이 말하는 등록금', '나의 등록금 고지서를 보여드립니다' 등 다양한 기획 기사를 내보낼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그때 저도 학비 때문에 대학을 못 갔던 상황이었거든요. 애들까지 그런 절차를 밟게 되니까 이거는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 말 그대로 가난이 대물림되나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게…."

<PD수첩> '부자 대학, 가난한 대학생' 편에 나온 현수 어머니의 말이다. 현수의 동생은 올해 4년제 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을 포기했다. 현수 어머니도 돈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했다. 현수 아버지는 자식들 대학 등록금 벌어보려고 시작한 가게를 불황으로 닫아야 했다. 현수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자식이 신용불량자가 된 것을 자신들 탓이라고 생각하는 착하디 착한 분들. '철없는' 아들이 아무리 체제 탓을 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말해도, 그분들 눈에는 내가 볼 수 없는 눈물이 맺혀 있다. 신용불량자 통보를 받던 2006년 말, 어머니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셨다.

나는 신용불량자다. 이제 막 양산되고 있는 1만 명 남짓한, 학자금 대출 신용불량자 중 하나다.

학자금 대출 8번, 휴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고려대가 지난 2006년 4월 이른바 '교수 감금 사태'로 출교 조치했다가 2년 동안 천막농성을 벌인 뒤 법원 판결로 복학해서 일부는 졸업까지 한 학생 7명(졸업생 3명)에게 최근 징계위원회를 열어 무기정학을 결정했다.
 고려대가 지난 2006년 4월 이른바 '교수 감금 사태'로 출교 조치했다가 2년 동안 천막농성을 벌인 뒤 법원 판결로 복학해서 일부는 졸업까지 한 학생 7명(졸업생 3명)에게 최근 징계위원회를 열어 무기정학을 결정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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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때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은 나는 2006년 1학기까지 총 여덟 번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빚은 실감나지 않게 쌓여갔고, 이자 계산은 어지러웠다. 그래도 졸업하면 갚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휴학을 생각해본 적은 없다. 빨리 졸업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었다.

그게 어긋난 것은 '출교' 때문이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에게 명예박사학위를 갖다바친 고려대의 천박함에 항의했을 뿐이다. 등록금 폭등에 맞서, 그리고 병설 보건대 통폐합 와중에 벌어진 차별에 맞서 항의했을 뿐이다. 분노한 보건대 학생들 곁을 떠나지 않았을 뿐이다. 고려대 당국은 나에게 '출교'라는 멍에를 씌웠다.

출교를 당한 건 2006년 4월이었다. 출교생뿐 아니라 우리를 돕는 학생들까지, 하던 '알바'도 때려치우고 천막에 모여 살던 시절이었다. 출교생인 내가 더 할 말은 없었다. '알바'는커녕, 학자금 대출 이자용으로 넣어두었던 50만원을 꺼내 생활비로 집어넣으며 담담하게 신용불량자를 각오했다. 집에 돈을 보태줘야 할 처지에 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출교 철회 농성은 끝날 것 같지도 않았던 2006년 2학기 어느 날, 어머니의 한숨 섞인 전화는 마음을 흔들었다. 법원에서 신용불량자 통보가 와 있었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한숨은 미처 각오하지 못했다. 짐짓 무관심한 척 말했다.

"아, 괜찮아. 그러지 좀 마."

그때까지 대출금이 대략 2605만원, 상환하고 남은 돈이 약 2276만원이었다. 11만4천원이 꼬박꼬박 빠져나갔다. 한 끼 밥값으로 30만원씩 지출하는 분들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11만4천원은 큰돈이었고, 곧 상환이 시작되면 이 돈이 20만원, 30만원으로 불어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신용불량자를 '각오'했다고 했지만, 실상은 '각오당했다.'

신용불량자가 된 지 1년쯤 지나 다시 은행을 찾았다. 내 빚은 곳곳으로 팔려갔다. 잘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부실 채권을 다른 곳에 팔아서 그 기관이 빚을 상환받도록 하는 모양이다. 농협에 남아 있는 내 빚은 원금 633만원과 연체이자 188만원을 합해 821만원, 나머지는 서울보증보험과 정부신용보증기금에 분산돼 팔려나갔다.

서울보증보험이 '구매'한 내 빚은 어느새 931만원이 돼 있었고, 정부신용보증기금에는 1075만원의 빚이 있었다. 연체한 지 1년 반 만에 이자 551만원이 불어 총 2827만원이 돼 있었다. 실감나는 숫자는 아니었다. 통장 잔고에 100만원도 찍힌 적이 없던 나에게, 천만원 단위의 돈은 잘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많고 많은 이월적립금, 다 쓸 데가 있다?

4년 등록금, 대출만 2500만 원. 학교가 준 것은 출교와 신용불량…. 2008년 3월, 고려대 입학식장 앞에서 등록금 네트워크가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가한 필자.
 4년 등록금, 대출만 2500만 원. 학교가 준 것은 출교와 신용불량…. 2008년 3월, 고려대 입학식장 앞에서 등록금 네트워크가 주최한 기자회견에 참가한 필자.
ⓒ 안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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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에서 주최했던 신용불량자 보고대회에 참가해 사정을 이야기한 후 곳곳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 대학 학보사나 독립다큐를 찍는 분을 만났을 때는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이야기를 했다.

나를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 언론일 때는 모자이크 처리를 신신당부했다. 혹여 부모님이 보실까봐 걱정됐다. 안 그래도 아픈 마음, 대못 하나 더 박을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부모님께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들이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당신들 탓이 아니라는 말. 자라나는 젊은이들 꿈조차 제대로 건사해주지 못하는, 못되먹은 나라를 가진 탓이라고 말이다.

4년제 사립대가 안 쓰고 쌓아둔 이월적립금이 2007년까지만 해도 5조5800억원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하는 일이라고는 잘해야 공문 하나 보내는 것뿐이었다. 이미 2000년에 나온 <한겨레21>에도 이월적립금 문제가 지적돼 있다. '교육부 관계자'라는 등장인물은 그때도 정해진 대사만 반복했다.

"이월적립금은 건축과 연구 등을 위해 학교가 적립해 둔 돈"… "다 용도가 있다고 하니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302호) 2001년, <오마이뉴스>에 다시 등장한 '교육부 관계자'도 똑같이 말했다. "적립금은 사용 목적이 다 있다. 그래서 임의로 사용할 수가 없다."  2006년 내가 들어갔던 고려대 등록금 책정위원회에서 '학교 관계자'도 '교육부 관계자'처럼 말했었다. 적립금은 다 사용 목적이 있다고.

그래, 그럴 것이다. 다만 그 '사용 목적'이 학생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교육부가 '부자 대학' 편에 서서, '가난한 학생' 후리는 걸 방조하는데, 서민인 부모님은 어쩔 수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사립대 등록금, 아무리 적어도 1년에 700만원, 많으면 1년에 1천만원. 누구 말마따나 등록금'만' 그렇다. 내가 1년 동안 쓴 방값, 핸드폰값 등 생활비는 대략 600만원. 고통을 감내하며 산 것이 이 정도다. 비정규직 평균 월급 120만원 남짓. 비정규직 800만 시대에 이걸 다 대줄 수 있는 부모님은 많지 않다.

일찍이 "등록금 1500만 원은 돼야"라고 일갈했던 전 고려대 총장 어윤대는 고려대를, "강남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고 싶어하는 대학으로 만들겠다"(이상신 교수의 폭로)고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말 그대로 가난이 되물림"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던 현수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이놈들이 가난을 되물림시키려 하는 거라고. 이들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들의 정책은 분명히 말한다.

"돈도 없는데 대학은 왜 오니?"

650원짜리 우유 앞에 무너진 내 '존재감'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학교 선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등록금 때문에.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목숨 끊은 것은 아닐 터다.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해한다. 650원짜리 우유를 마시고 싶어서, 주머니 속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편의점 앞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때, 그토록 사무치던 존재의 비참함이란. 대학 당국과 교육부는 우리의 '존재'를 모욕하고 있다.

이 땅의 가난한 대학생들과 그들의 부모님들에게 말하고 싶다. 돈 앞에 우리 '존재'가 비참해지는 것은 우리들 탓이 아니라고. 평생 카드 연체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성실한 우리 아버지가, 제대로 된 직장도 가질 수 없게 된 것은 아버지의 탓이 아니다. 경제 위기에 건설사엔 수조 원을 줘도, 서민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도둑놈 취급하는 이 나라의 정책 책임자들 탓이다.

200ml 우유 하나에 존재의 비참함을 집어삼켜야 했던 나의 고통은 부모님이 만든 게 아니다. 등록금 내고 나면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하고, 생활비 마련하면 등록금을 걱정해야 하는 이 사회 구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공모작이다. 그러니 적어도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는 말라고.

가난하기에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알 수 있다는 낭만적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이명박도 가난했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투쟁할 수 있기에 아름답고, 아름다워지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가난은 이명박 같은 '물신주의자'를 낳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가난은 연대를 낳을 수 있다.

삭발하고 끌려가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대학생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낀다. 이명박에 반대해 거리를 채운 청소년들을 보며 희망을 느낀다. 아직도 거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희망을 느낀다.

한홍구 교수는 한 신문에서 3·1운동과 작년 촛불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했다.

"3·1운동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태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 그야말로 시장 보러 나왔던 장삼이사들이 진하게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 촛불에 나왔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마음의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미친 교육이 청소년을 거리로 이끌어 촛불을 들게 했던 것처럼, 등록금의 고통과 이명박의 만행은 우리를 거리로 부르고 있다. 우리는 마음 속에 촛불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외칠 구호가 있다. 등록금 후불제든, 등록금 상한제든. 등록금 동결이든 등록금 인하든. 나아가 무상교육도 있다. 어디까지 이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는 이런 구조를 만든 데 책임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 구조를 바꿀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한홍구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야 하지 않겠나. 촛불이 보여 준 가능성을 근거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럴 힘이 있다.


태그:#등록금, #신용불량자, #교육부, #등록금 천 만원 시대, #학자금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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