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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방울의 비가 오락가락하는 얄궂은 아침이었다. 지하철에 올라 차창 밖으로 펼쳐진 흐릿한 봄날의 바깥풍경을 감상했다. 지축역을 지나 구파발역으로 향하는 도중 동쪽 하늘 아래 봄비에 젖은 북한산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운치 있게 있었다.

나무들은 새순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 온통 산을 연두색과 초록색으로 덮고 있었고, 촉촉하게 젖은 바위는 눈물에 젖은 마스카라처럼 주르륵 물기를 흘리며 스산하게 있었다. 나는 지상의 지축역에서 지하 구파발역으로 들어서는 통로 가느다란 두 가닥 선로 위에서, 불과 2~3분도 되지 않을 짧은 순간 비 오는 봄날의 '지하철 감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몽롱한 정신을 파는 사이 어느새 전동차는 안국역에 도착했다. 지하도를 나와 조금 걸었다. 금 새 왼편에 얌전하고 정숙한 한옥의 담장이 늘어서 있었다. 늘어선 담장의 다소곳한 안내를 따라 운현궁의 매표소 정문 안으로 발걸음을 들여놓았다. 매표소 안쪽 운현궁의 마당은 백색의 마사토(磨沙土)가 깔려있어 흐린 날씨임에도 정갈하고 깔끔해보였다.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이자 대원군의 주요 거처였던 건물
▲ 노안당 운현궁의 사랑채이자 대원군의 주요 거처였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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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마당에 서서 운현궁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의 짜임새를 관찰하고 음미했다. 그리고는 먼저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들의 거처인 오른편의 '수직사'를 지났다. 코앞에 정면으로 나타난 솟을대문을 통과하니 운현궁의 사랑채이자 대원군의 주된 거처였던 '노안당(老安堂)'이 점잖아 보이면서도 매우 강단 있는 품새로 있었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 그는 19세기 말, 외세의 발달된 물질문명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시기 오랑캐들에게 나라의 문을 잠가 그들이 가진 약탈과 침략의 제국주의적 본성에 대항하고자 이른바 '쇄국정책'을 실시했다.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외국과의 통상과 교섭을 금지시켰으며, 서양의 선교사인 신부들과 천주교도들의 무수한 목을 참수하기도 했다.

반면 며느리 명성황후는 외국과의 통상 수교에 앞장서 청나라, 러시아 등을 우리 정치사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였다.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명성황후는 이러한 갈등과 다툼으로 인하여 서로를 제거하려는 정적의 관계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결국 정치적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원군은 이곳 노안당에 사실상 연금 상태로 갇혀 지내는 시절을 겪기도 했고, 또 국모인 명성황후는 일본인 낭인(자객)의 칼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어 시신까지 불태워지는 끔찍하고 불행한 최후(을미사변)를 맞았다.

그들의 잘잘못과 옳고 그름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역사적 관점과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냉정하고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를 떠나 조선 말 파란과 광풍의 역사 앞에서 벌어졌던 오욕과 권력의 암투, 쇄국과 개방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그로 인한 음모, 살육의 다툼은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실마리가 될 듯했다. 수많은 국민들의 살림살이와 안위는 온데간데 없고, 오로지 현 권력의 배후인 소수의 재벌과 부자들의 기득권을 위해 땅을 파고, 건물을 짓고, 강을 파헤치며, 민족과 국가의 자존을 굴욕적으로 팔아먹으려는 자들이 득세하는 오늘의 시국이 걱정스러웠다.

나는 노안당의 마당을 거닐며 그렇게 대원군과 명성황후를 현 정권의 난폭한 폭정과 연결해 생각해 보았다. 운현궁 건물 곳곳에 담긴 역사에 대한 미학적·역사적 감상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을 했다.   

노안당  보첨을 달고 세벌대 기단 위에 올라 선 '노안당'의 모습은 당시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 노안당 보첨을 달고 세벌대 기단 위에 올라 선 '노안당'의 모습은 당시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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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에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조선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편액이 걸려 있었다. 묵직하면서도 안정적이며, 단순해 보이면서도 그야말로 편안해 보이는 추사의 필체는 나 같은 범인의 흐릿한 안목으로도 그 내공과 탁월한 경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훌륭했다. 세벌대 장대석 기단 위에 한 시대를 호령한 정치권력자의 권세와 위세를 짐작하게 하며 올라선 노안당은 노회했지만, 고풍스러웠다.
  
노안당은 전체가 T자형 구조로 오른쪽의 남쪽이 돌출하여 '영화루(迎和褸)'라는 2칸짜리 내루를 이루고 있었다.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고요한 숙고의 공간이자 은밀한 휴식의 장소처럼 보였다. 아마도 대원군은 때때로 저기 영화루의 창가에 서서 사색의 유희와 더불어 '와신상담'을 노리며 허공을 관망했을 지도 모르겠다. 분위기는 겉으로 보기에도 마치 복심이 깔린 비장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노안당 '영화루' 뒤편에서 노안당의 누마루인 오른쪽 '영화루' 아래 기단석 위에 앉은 아이들
▲ 노안당 '영화루' 뒤편에서 노안당의 누마루인 오른쪽 '영화루' 아래 기단석 위에 앉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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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당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네모 각기둥을 세운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아담한 사랑채다. 특이한 것은 보통의 여느 한옥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보첨이었다. 차양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처마 끝에 덧이어 나무판자 표면에 구리판을 덮은 보첨을 달아놓았는데, 햇빛과 비의 들이침을 줄이는 세심함이 돋보였다. 정면 마루로 올라서니 사분합, 이분합으로 만들어진 벽체의 문들이 가지런히 닫히기도 열려있기도 했다. 규칙적인 면의 분할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문양과 빈틈없이 엄숙해 뵈는 미감은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시원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소홀함 없이 배려한 기능까지 알 수 있으니 건물의 격조는 주인의 권세를 짐작게 하는 가늠자가 되는 모양이다.

노안당 왼쪽으로 돌아나가 일각문으로 들어서니 바로 노락당(老樂堂)과 연결되었다. 노락당은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태어나 12세까지 살다가 15세 되던 해 16세의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른 건물이다.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심 건물로서 그러니까 본채다. 정면 10칸 측면 3칸의 몸체에 동서 양쪽 끝 칸이 남쪽으로 2칸씩 내밀어진 'ㄷ' 자형 구조로 몸체에서 남쪽으로 꺾어진 양쪽의 부엌과 창고는 행랑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는 'ㅁ' 자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노락당의 뒤편 일각문 노락당의 뒤꼍에서 서쪽으로 난 문
▲ 노락당의 뒤편 일각문 노락당의 뒤꼍에서 서쪽으로 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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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중심 건물 '노락당' 고종이 12세 때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른 공간이다.
▲ 운현궁의 중심 건물 '노락당' 고종이 12세 때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른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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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창고 안에는 가마솥과 항아리, 절구, 광주리와 소쿠리, 찬장 등 세간들이 비교적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아궁이와 부뚜막도 보이고, 기둥에 걸어놓은 마늘 꾸러미도 보이는 것이 무심코 소탈한 웃음을 짓게 할 정도로 새삼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노락당 뒷면으로 걸음을 돌렸다. 뒷면에서 둘러보니 부엌문과 살창 창고외벽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주변의 꽃담과도 절묘하게 어우러진 조화는 일품이었다. 나는 한동안 멈추어선 채 우리 한옥의 아름다운 기품과 매력을 조신하게 음미했다.

노락당의 뒤편에는 운현궁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건물인 이로당(二老堂)이 있었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더불어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하던 기능을 담당하는 안채이다. 그래서인지 건물의 구조는 사방이 꽉 막힌 듯 매우 폐쇄적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살림을 담당하는 공간이니 남자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ㅁ'자 구조로 만든 모양이었다. 고종과 혼례를 마친 명성황후도 이 곳에서 한 달간 궁중의 법도를 익혔다고 전해지며,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살림을 맡아서 관장했다고 한다.

이로당 뒤뜰로 향하는 문 노락당에서 이로당으로 연결된 통로인 행랑 아래로 난 문이 저만치 앞에 보인다.
▲ 이로당 뒤뜰로 향하는 문 노락당에서 이로당으로 연결된 통로인 행랑 아래로 난 문이 저만치 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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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히 살펴보니 마치 안채 여인네들의 다소곳한 생활의 운치를 느낄 수 있는 멋과 흔적이 보이기도 했다. 건물의 정면에는 운하연지라고 새겨진 수조가 있었는데, 수조 안에는 물이 하나 가득 고여 있었으나 멋스러운 수련이나 금붕어는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던져 넣은 동전들만이 물풀도 없고, 물고기도 없는 수조 안에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또 수조 오른쪽에는 요거석(횃불 받침석)이 놓여 있었다. 요거석 오른쪽에는 뒤뜰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노락당과 이로당을 연결하는 행랑 아래로 난 문이라 요즘의 키 큰 사람이라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듯싶을 정도로 보였다. 작지만 화려하게 짜여져 있는 문은 여성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아 보였다.

뒤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고, 엉뚱하게도 예상치 못한 자리에 투박한 돌절구도 하나 있었다. 덩그러니 놓여진 돌절구는 주변에 아무 친구랄 것도 없었지만 쓸쓸하거나 심심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한가하게 뒤꼍에서 뛰놀고 있는 맹랑한 아이처럼 친근했다. 나는 동쪽 언덕 장대 위에 놓여진 장독을 감상했고, 북쪽의 담장 아래 놓여진 경백비(敬栢碑)를 살폈다. 경백비는 '고종이 어린 시절 운현궁에 살며 이 곳에 있던 잣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타고 오르며 놀았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왕위에 오른 후 품계를 하사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비석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당의 돌절구에 대한 느낌과는 달리 담장 아래 썰렁하게 혼자 서있는 모습이 보초를 서고 있는 초라한 초병 같기도 하고, 벌을 서는 아이 같기도 한 것처럼 보이니 이랬다저랬다 달리 보이는 시선의 방정맞음인지...

운현궁의 꽃담 꽃담장 앞의 꽆처럼 예쁜 아이들
▲ 운현궁의 꽃담 꽃담장 앞의 꽆처럼 예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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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담장 아름다운 담장 앞에서 물을 마시는 아이들
▲ 운현궁의 담장 아름다운 담장 앞에서 물을 마시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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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당 뒤꼍을 돌아 나오며 꽃담과 굴뚝과 지붕과 처마와 격자창과 교창 등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장인들의 섬세한 손놀림과 땀으로 얼룩진 혼의 묘미를 넉넉히 감상할 수 있었다. 운현궁에는 어쩌면 조선의 5대 궁궐에서도 감히 느껴보지 못한 우리 전통 한옥의 고상한 품격이 남아 있었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크고 근엄한 궁궐의 격조와는 사뭇 다른 아담하고 섬세하며 지조 있어 보이는 한옥의 매력에 대한 색다른 감흥이랄까...아무튼 그런 만족이 있었다. 

유물전시관 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가례)의복이 진열된 곳 앞에서
▲ 유물전시관 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가례)의복이 진열된 곳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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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당 서쪽 담장의 협문을 나와 운현궁의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을 들렀다. 입구에 들어서자 흥선 대원군의 초상이 날카로운 매의 눈초리로 벽에 있었다. 작은 체구지만 눈에 서린 야망과 강골의 기개는 예사롭지 않았다. 좁고 조촐하게 마련된 유물전시관 안에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복장과 명절이나 행사 때에 입었던 복장, 그 밖에도 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자료, 유물 등이 있었다. 나는 그 곳을 둘러보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으로부터 임오군란, 을미사변,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의 시련과 질곡의 파노라마를 떠올리며 가슴 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나는 오늘 그렇게 운현궁에 들렀고, 그 곳 파란의 현장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찾아온 '운현궁의 봄'을 느끼고 감상했다. 유물전시관을 나오며 처음에 발을 들여 놓았던 하얀 백색의 마사토 마당에 서니 아직도 하늘은 여전히 흐린 회색빛 표정을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운현궁은 행정구역 상으로는 종로구 운니동에 해당하나 인사동에 접해 있으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4번 출구를 나와 약 50미터 앞에 있습니다. (지난 4월 25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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