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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에서 서쪽 43km를 가면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마을에 도착한다. 석양이 아름다운 용수리 마을 포구에는 하늘을 찌르는 십자가 하나가 서 있다. '포구에 무슨 십자가가 서 있나?' 싶지만, 이 포구의 십자가는 특별함이 숨어 있다.

 

한국의 천주교는 김대건 신부로부터 시작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가항 신학교에서 탁덕으로 승품하여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신부가 돼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 용수리 포구는 김대건 신부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용수리 포구는 한국천주교 역사의 한 현장이기도 하다. 한때 박해로 신음했던 우리나라에 복음의 빛을 전하고자 사제 서품 즉시 귀국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 일행을 폭풍우 속에서 구해준 곳이 바로 용수리포구인 셈이다.

 

 

4월의 세 번째 휴일이었다. 4300평이나 되는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들어서자, 봄꽃들이 몸을 떨고 있었다. 포구에서 부는 바람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봄꽃들의 표정이 김대건 신부가 겪어왔던 순교활동의 아픔이었을까.

 

천주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미카엘과 라파엘, 가브리엘 정도. 천주교 신도인 친구들의 세례명 정도를 기억하는 내게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방문은 천주교의 역사를 밟는 계기가 되었다.

 

우뚝 솟은 십자가가 조금은 새롭게 다가왔다. 기념관의 문을 빼꼼이 열었더니 수녀 한 분이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하마터면 수녀님에게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할 뻔 했다. 틈새 시간을 이용하여 가끔 사찰을 방문하다 보니 내겐 합장을 하는 인사가 익숙했나보다. 조금은 어색했지만 목례를 했다.

 

 

기념관에서 가슴 뭉클한 메시지를 만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1846년 9월 16일 26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천상 영광을 안았던 때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저는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이 저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라는 메시지였다. 주님을 위해 죽을 만치, 그리고 그 죽음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된다는 이념을 이해할 만치 종교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죽을 만치 빠져볼 수 있을까? 다만, 그 메시지를 통해 김대건 신부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또 하나의 특별한 만남은 '원죄 없이 잉태되는 성모마리라 상'이었다. 기념관의 너른 잔디 모퉁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성모마리아 상, 원죄 없이 잉태되는 성모마리아 상은 십자가를 마주보고 하얗게 포구를 지켰다.

 

이 성모마리아 상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라파엘이 난파와 침몰의 위기를 맞을 때 마다 성모님의 상본을 들고 일행을 격려하며 성모님께 의지하며 기도하였던 것이라 하니, 어쩌면 마스코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인지 너른 잔디밭에 서 있는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타고 온 라파엘 호, 풍랑과 좌초를 겪었을 라파엘 호 의미 또한 각별했다. 하느님의 대천사 중 하나인 라파엘, 목선의 의미는 신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파하는 천사, 즉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김대건 신부가 목선을 타고 좌초의 시련을 겪으면서 하느님의 충실한 심부름꾼으로써 토비아의 길을 인도한 것이 아닐는지.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제주공항-서쪽 12번 도로-하귀-애월-한림-신창성당-해안도로-용수리포구 옆 성 김대건신부 기념관으로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태그:#김대건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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