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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훈훈한 주말이었다. 남녘의 꽃바람을 타고 날아온 봄의 향기와 냄새는 친근했다. 바람은 가볍게 내 얼굴을 스치더니 부드러운 터치로 나의 감대를 자극했다. 왠지 서먹하고 어색하지 않은 익숙한 느낌으로 그렇게 봄이 나에게 왔다.

 

나는 아침부터 일찌감치 집 앞으로 난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김포대교를 북에서 남으로 건너 강화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는 저만치 왼편에 '덕양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였다. 한강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놓인 방화대교도 잔잔한 물비늘의 출렁임 위에서 완만하고 편안한 아치형태로 아침을 맞으니 마치 등허리를 휘어 아침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내 자동차는 김포에서 강화방면으로 새로 뚫린 매끈한 신작로를 따라 막힘없는 질주를 했다. 그러고서 신호위반이나 속도위반 없이 불과 50여 분 만에 강화대교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흐릿하게, 시멘트 회색과 시커먼 개펄색이 혼합된 강화물목의 '염하(鹽河)'는 쥐 죽은 듯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흐르고 있었다. 염하의 회색피부 위로는 몇 마리의 갈매기가 날고 있었고, 동쪽에서 밀려오는 반짝이는 햇빛이 야금야금 면적을 넓혀가고 있었다. 육지와 섬을 잇기도 하고 나누기도 하는 매개이자 경계인 염하의 물살 위 강화대교에서 나는 찰나의 몽롱한 정신에 스스로 깜짝 놀라며 바다이자 강을, 섬과 육지 사이의 수협(水峽)을 건넜다. 

 

다리를 건넌 후 얼마를 지나 곧 좌회전하니 강화역사관이 있었다. 역사관 안으로 들어서기 전 주변 마당과 잔디밭, 조경지를 둘러보니 온통 화사한 봄의 생명과 소품들이 앙증맞고 귀엽게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보라색 제비꽃, 노란 민들레와 양지꽃, 개나리, 하얀 벚꽃과 매화, 분홍색 진달래... 그것들이 아직은 자람이 미숙한 연초록 잔디밭 주변에 조화롭게 어우러져 살고 있음이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는 강화역사관으로 들어가서 1층과 2층을 순서대로 꼼꼼히 살피고 감상했다. 나는 오래 전 선사시대부터 지금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었고, 또 태어나 살다가 죽었으며, 현재도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이 곳 강화도의 흙과 공기와 생물과 무생물들의 존재와 유기적 상호연관이 얽힌 시공의 역사를 엿볼 수 있었다.

 

역사관은 천연의 역사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강화도의 유구하고 다양한 참 모습을 핵심적으로 요약해서 배우고 공부하도록 안내하는 매우 유익한 교재이자 가이드였다. 하지만 왁자지껄 떠들며 역사관 안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분별없는 소동과 어쩌면 그보다 더한 몇몇 어른들의 탐욕적인 진열장 앞 떼거리 점거는 나만의 자유롭고 순조로운 소박한 탐행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한 가지 흠이었다.

 

나는 강화역사관을 서둘러 빠져나와 뒤꼍 언덕 '갑곶돈대'로 향해 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랐다. 갑곶돈대 성곽 앞에는 포각이 있고, 포각 안에는 '붉은 얼굴을 한 서양오랑캐가 사용했다'는 대포인 이른바 홍이포(紅夷砲)가 언제라도 포탄을 발사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갑곶돈대가 있는 이 곳이 서해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길목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징표였다.

 

나는 돈대의 성곽에 가까이 다가가 두 손을 짚고서 마치 물결이 교각 사이로 찢기듯 흐르는 거친 염하의 살기(殺氣)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고 서있는 동안 짧은 촌각이 순간적으로 흘렀다. 그리고 웬일인지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혼란스럽게 엉켜지는 것 같은  어지럼이 혼돈으로 느껴졌다.

 

고려의 몽골족이 물목 건너편 김포 끄트머리 '문수산성'쪽에서 내가 서있는 이 곳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민가의 가옥을 부숴 만든 뗏목을 타고 염하를 헤쳐 건너오는 것 같은 환상, 병인양요 때의 프랑스군, 신미양요 때 미군, 강화도조약 때 일본군이 대포와 장총과 대검을 쳐들고 야수처럼 달려드는 것 같은 기분 나쁜 환영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잡념의 환영을 겨우 허공에 털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아픈 우리 역사의 상처와 치욕적인 항복의 추억을 일부러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역사의 암울을 훌훌 털어 잊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이 곳 강화에 발을 딛는 순간, 돈대의 성곽에 손을 짚는 순간, 내 의지의 단단함은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섬의 해안선 외곽을 따라 철조망이 촘촘히 둘러쳐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오랑캐들을 막아내기 위해, 오늘은 같은 한민족이면서도 동시에 적이랄 수 있는 동족의 도발을 막아내기 위해 둘러쳐진 철조망의 가혹한 운명과 의미를 잠시 생각했다.

 

역사관 정문 출입구로 걸어 나오면서 한 무더기의 '강화비석군'을 볼 수 있었다. 수 십 개의 비석은 제각각 당시의 역사와 사연을 몸돌에 새긴 채 마치 수용소에 갖혀 웅성거리고 있는 일단의 포로들처럼 햇볕을 쬐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하마비'를 살펴보고, '선정비'도 살펴보았다. 역대 강화유수들의 공적과 선행과 이런저런 다양한 사연의 이야기를 돌로 만들어 비석에 새긴 몇 권의 고서를 읽는 것 같은 즐거움은 제법 쏠쏠했다. 

 

강화역사관을 나와 강화읍 삼거리를 지나고 강화군청을 조금 지나니 '고려궁지'를 안내하는 간판이 오른쪽에 달려 있었다. 나는 고려궁지의 정문인 '승평문'이 정면으로 가파르게 보이는 계단 앞에 차량을 세웠다. 그리고 큰 경사가 비스듬해 자칫 위태롭게 느껴지는 승평문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승평문의 오른쪽 문을 통과하여 고려궁지의 정면입구에 서서 전체를 조망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시야를 옮겨가며 눈부신 햇살의 반사를 피해 미간을 찡그린 채 오래 전 고려의 흔적과 자취를 찬찬히 살펴보고, 혹여나 아지랑이처럼 증발해 하늘로 타오를지 모를 습하게 남아있는 오래 전 역사의 냄새를 맡아보려 예민하게 들숨을 마셨다.

 

정면에서 보면 오른쪽에 강화유수부 동헌(관아) 건물이 '명위헌'이란 편액 이름표를 달고서 커다란 느티나무 뒤편에 앉아있었다. 그 왼편 서쪽에는 말끔한 자태로 단장한 채 남향을 해서 얌전하면서도 강개하게 아래를 내려보고 있는 '외규장각'이 있었다. 또 외규장각의 남쪽 왼편 아래로는 '강화부종각'이 있고, 그 아래 남쪽으로는 '강화유수부 이방청' 건물이 비교적 호젓하고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고려궁지 안의 모든 건물의 전부였고, 남아있는 것, 볼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단출한 몇 채의 건물과 정돈되지 않은 주변, 잡목으로 어수선해 보이는 나지막한 뒤편의 야산 등은 몽골과의 항쟁 당시 빈약하고 초라했던 고려조정의 처지와 형편을 말해주는 오늘의 솔직한 모습이었다.

 

고려궁지 안에는 고려 때 건물이 없었다. 몽골의 침입 당시 39년간 피난하여 머물렀던 고려 때 행궁인 이 곳에는 시각적, 물리적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해 볼 수 있는 고려는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도 주변의 흙을 파고 땅을 헤집어보면 몇 조각의 기와 파편과 깨진 그릇조각을 수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쉽게도 현재는 조선시대의 관아건물인 동헌과 이방청, 그리고 쓰리고 아픈 상처만을 간직한 근래 복원된 외규장각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외규장각 옆으로 가까이 가서 그 모습을 살폈다. 조선시대의 건물인 외규장각이 고려궁지에 남아있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임금이 난을 피해 이 곳에 행궁을 짓고 머물렀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나라의 중요한 국서(國書)를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럴 듯하게 복원되어 역사의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지만,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모조리 약탈당하고 무참히 불살라졌다 겨우 다시 제 모습을 찾은 갱생의 모습이니 감회가 남달랐다.

 

프랑스는 수 년 전 우리나라에 고속철도를 건설하려 할 때, 우리가 자국의 '테제베'기술을 도입하면 병인양요 당시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우리는 자칭 문화선진국이라는 프랑스의 비겁한 약속불이행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항의 한번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또 수년의 세월을 무심코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런 까닭 때문인지 고려궁지의 건물 중 유독 외규장각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고 깊게 내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와 각인을 하는 느낌이었다. 이마에 땀이 맺히면서 미지근한 핏줄이 두근거리며 관자놀이에 뻣뻣하게 서는 것 같은 순간적인 느낌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나는 강화부종각을 한 바퀴 돌며 제법 뜨거운 한낮 봄볕의 가시광선을 피하고서 이방청 건물을 휘~이 들러 고려궁지 정문인 승평문 밖으로 나섰다. 승평문의 계단을 내려와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약 200미터 쯤 걸으니 왼편 낮은 언덕에 이층으로 된 전통 한옥건물 한 채가 보이고 그 지붕 위로 십자가 하나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바로 성공회 강화성당이었다.

 

성당은 독특한 자태가 멋스럽고 색다르게 보였다. 평범한 사람 누군가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무심코 찾아왔다가는 꼼짝없이 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마치 우리나라의 전통 사찰 같은 풍모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한옥 구조에 서양의 기독교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좀처럼 흔히 볼 수 없는 동서양 퓨전 건축물이었다.

 

광무4년(1900)에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 주교에 의해 세워진 성당은 백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초창기 기독교가 얼마나 한국식으로 토착화하려 노력했는지를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들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한옥 이층집에 팔작지붕을 이루고, 전면 가운데에 '천주성전'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것은 사찰에서 '대웅보전' 편액이 놓이는 바로 그 자리다.

 

이층 지붕 내림마루 네 귀에는 장식기와인 취두(독수리 머리 모양의 장식기와)가 얹혀져 있었으며, 출입구의 정면 4칸 각기둥에는 주련(주문이나 경구절 등을 글씨로 쓰거나 새겨 기둥에 걸어놓는 것)이 걸려 있으니 성당인지, 절인지 영락없이 헛갈리게 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 밖에도 경사진 석축계단과 외삼문, 내삼문 형식, 범종과 종각건물 등 외형은 그야말로 전통 한옥이었으나, 내부는 서양의 바실리카(장방형) 양식으로 지어진 강화성공회 성당은 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간직한 채 성스럽고 거룩한 자태로 침묵하며 거기에 있었다.  

 

성당의 외삼문을 빠져나와서 좁은 길을 따라 한 스무 걸음에서 삼십 걸음쯤을 대중없이 걸었다. 소로에서 좁디좁은 왼쪽 골목으로 접어들어 꼬불꼬불 미로를 헤치듯 걸어가는 골목길의 호젓한 보행은 흥미로웠다. 강화 도령 '철종'(이 원범)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사저인 '용흥궁'으로 향하는 골목에서 나는 고려를 지나 조선말기로 시공을 이동하는 듯한 혼자만의 발칙한 상상을 즐겼다.

 

나는 초라해 보이는 허름한 한옥 '용흥궁'의 그늘진 정문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조선말기의 연표를 살며시 허공에 가늠해 보았다.

 

'조선의 제25대 왕 철종은 영조의 고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증손자로서 정조대왕의 이복동생 은언군이 할아버지, 전계군이 아버지다. 증조할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익히 아는 바이고, 할아버지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 하여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니 이 때 은언군도 목숨을 잃었다. 이후 철종(원범)의 아버지와 형(원경)은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고, 원범은 가족과 함께 14세 때 이 곳 강화로 유배되어 왔다.'  

 

철종은 어린 나이부터 왕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부모와 형제 수많은 친족들이 죽음을 당하는 시련을 겪은 슬픈 운명을 타고난 청년이었다. 부모와 친족의 무참한 죽음 앞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가의 신분을 속이고 잠저에 숨어 농사일로 소일하던 그. 철종의 나이 19세 때(1849), 헌종이 후사 없이 급 서거하자 6촌 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던 관계로 느닷없는 허수아비 왕위에 오른 그. 순원왕후를 비롯한 안동 김씨 세도가의 교묘한 막후정치 속에 가련한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그.

 

 

비운의 그가 은둔하며 살았던 잠저 용흥궁은 지금도 곳곳에 거미줄이 걸려 있을 정도로 허름했고, 단청 없이 소박한 기풍만이 고요한 정적 속에 깔려 있었다.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좁디좁은, 사방이 낡은 여염집과 술집에 둘러싸여 포위된 채 웅크리고 있는 철종의 잠저 용흥궁을 바라보니 왠지 모를 인생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나는 본체와 별체를 두루 돌아보고, '잠저구기비각'에도 들렀다. 천천히 걸어 곳곳을 살피고 그 안에 아스라이 가라앉아 있는 비운의 역사와 반역의 역사, 유배의 역사, 권력 앞에 농락당하는 인간의 죽음과 삶의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용흥궁 정문을 나서기 전 문 앞에 놓인 조그만 돌 대야의 수도꼭지를 틀어 졸졸 흘러나오는 물에 식은땀이 고인 손아귀를 시원하게 씻었다. 그리고 물기로 젖은 두 손을 허공에 대고 탁탁 털어가며 철종 임금 이원범과도, 그의 청년시절 은둔과 잠행의 슬픈 운명과도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11일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강화도 답사(1)편 경유지: 강화역사관-갑곶돈대-고려궁지-강화 성공회성당-용흥궁


태그:#강화도, #강화역사관, #용흥궁, #고려궁지, #강화성공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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