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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오년 전 일이다. 경북 구미에서 공고를 다녔던 나는 3학년 2학기 무렵 친구 세 명과 함께 비디오폰을 만드는 성남의 한 중소기업에 실습생으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성남에 연고가 없던 나는 딱히 방을 얻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처음부터 기숙사가 있는 회사를 택해야 했다. 처음 일 년은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다세대 주택 전세)에서 형들과 생활을 했다. 방 두 칸에 열 명이 넘는 식구가 생활해야 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러다가 일 년 정도 지나서 돈을 조금 모으자 마음이 맞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따로 방을 얻어서 생활했다.

주방 겸 거실에다 조그만 방 한 칸, 그곳에서 네 명이 생활을 했다. 전세 천만 원이 조금 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를 갔다.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던 나는 친구들이 군대를 갈 때마다 그들이 방을 얻을 때 투자했던 돈을 돌려주었고 그러다 보니 결국엔 내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내 차지가 되어 버린 방에서 일 년 정도 생활을 하다가 수원으로 취업을 나온 동생을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시켰다. 동생과 같이 생활을 하자 조금 더 넓은 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집 근처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새로 살 전셋집을 구했는데 그때 수중에 천이백만 원이 있었다. 직장 생활 삼년 만에 번 천이백만 원이란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날 밤 아홉시가 넘어서 한 부동산에 들렀는데 급하게 나온 빌라가 있다고 했다.   

시골 취업생, 난생 처음 빌라를 전세로 얻다

부동산 주인은 이 정도면 아주 싸게 나온 값이라며 동생과 살기에는 딱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집주인도 오늘 계약을 안 하면 내일은 다른 사람이 오기로 했다고 은근히 계약을 종용했다. 구조가 옛날식이어서 찜찜하긴 했지만 난생 처음 빌라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계약을 해버렸다. 모자라는 돈 팔백만 원은 중사로 제대한 형에게서 빌렸다. 이사를 하고 처음 며칠간은 뿌듯했다. 형의 도움을 빌긴 했지만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방 두개짜리 빌라를 얻었다는 자신감에 회사 동료들을 불러다놓고 집들이도 거하게 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일은 터지기 시작했다.

"총각이 뭘 모르고 계약을 했구만. 이 집 주인이 워떤 사람인데…."
"그러게 말이야. 집주인 방 안 빠진다고 허구헌날 앓는 소리더니… 저 총각 나중에 고생깨나 하겠군."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고 틈만 나면 화장실과 싱크대의 하수구가 막혔다. 전화를 하면 집주인은 매번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그해 겨울이 닥치자 베란다를 넓히겠다고 뚫어놓은 안방은 외풍 때문에 아무리 보일러를 때도 이불을 꽁꽁 뒤집어 쓰고 자야 했다.

새벽 다섯시에 영어 학원으로 향하다

하지만 이왕 들어온 이상 계약이 끝날 때까지만 잘 버티자고 생각했다. 함께 취업을 나왔던 친구는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더니 실력도 많이 늘었고 언제부턴가는 회사에서 쓰는 장비 일본어 번역도 했다. 나도 고민 끝에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새벽반이어서 새벽 다섯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부지런을 떨었더니 어느 정도 영어로 말문이 트였다. 일 년 정도 지나자 더 이상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다. '다들 그래요. 캐나다로 유학을 가거나 필리핀으로 연수를 가더라구요'라며 학원 원장 선생님도 적극 연수를 권했다.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유학원을 통해서 유학 과정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마침 계약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방을 빼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집주인에게 방을 빼겠다고 했다.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에게 '내용 증명'을 보내다

주인에게 보낸 전세금 반환 내용 증명서
▲ 내용증명 주인에게 보낸 전세금 반환 내용 증명서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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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1998년 IMF가 터지고 난 직후였다. 전세값은 헐값이 되었다. 방을 내놓은 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방은 빠지지 않았다. 처음엔 전화를 받으며 미안해 하던 집주인도 점점 내 전화를 안 받았다.

전세금은 방을 얻고 일 년 뒤 다시 200만원을 올려준 탓에 2200만 원이었다. 그 돈에 들어오려는 세입자는 아무도 없었다. 일본어를 공부하던 친구는 병역특례를 마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가버렸다. 그동안 모은 재산이 방값에 묶여 있던 나는 그저 방이 빠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6개월이 지났을 때쯤 집주인은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사 일이 끝나면 밤 열두시가 될 때까지 아파트 계단에 앉아서 집주인을 기다리기도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의 남편에게만 하소연을 했다. 혹시라도 모르니 회사 선배가 내용증명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

주인집 아파트를 가압류하다

법원에 주인집의 부동산을 압류 신청하다
▲ 부동산 가압류 신청서 법원에 주인집의 부동산을 압류 신청하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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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용 증명을 보내고 나서도 한달이 지났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번엔 회사 선배가 가압류를 걸라고 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압류를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몰랐다. 회사 일이 끝나면 부동산 관련 책을 뒤져가며 가압류 신청하는 방법을 공부했고 토요일이 되면 법원에 들락거리느라 거의 한 달간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 가며 가압류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법원에 갔더니 담당자는 그 많은 서류를 어떻게 혼자서 처리할 거냐며 한심한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경찰서 한 번 드나든 적 없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법의 생리를 잘 몰랐다. 담당자 말이 맞았다. 혼자서는 그 많은 서류를 준비할 수 없었다. 담당자의 충고대로 법원 근처의 법무사에 가서 가압류 신청을 했더니 정확히 이주만에 확정 판결이 났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영어연수의 꿈

법원에서 부동산 가압류 결정 통지를 받다
▲ 가압류 결정문 법원에서 부동산 가압류 결정 통지를 받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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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부동산 가압류 확정 판결을 받고나자 바로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잔다.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 아홉시가 넘어서 집으로 찾아온 주인은 밤인데도 화장이 진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원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6개월이 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던 당신은 잘 한 게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집주인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종이를 주며 각서를 쓰라고 했다. 주인은 말없이 각서를 썼다.

그렇게 일년여를 방을 빼느라 진을 빼버려서 그런지 영어 연수를 가겠다던 내 의지는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영어 학원은 계속 다녔지만 전처럼 새벽 클래스는 엄두도 못냈다. 일본에서 다시 대만으로 유학을 갔다던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동안 스크랩해 놓은 유학 관련 자료들만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전세금 반환 각서를 받다
▲ 각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전세금 반환 각서를 받다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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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은 각서를 쓰고서 작년에 올려준 전세금 일부만을 돌려주었을 뿐 몇 달이 더 지났지만 방을 빼주지는 않았다. 마음 독하게 먹고 가압류를 풀지 않아야 했지만 따지고 보면 집주인도 불쌍했다. 낡은 아파트에 설정된 근저당이 거의 아파트 시세에 육박했컸다.

그렇게 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다행이 전세금은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이었던가? 처음 방을 얻게 해준 부동산 주인이 방을 구한다는 여자 한명을 데리고 왔다. 방을 본 여자는 대뜸 나를 보더니 "이 집 살기 괜찮아요?"하고 물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동산 주인은 처음 내게 했던 말을 여자에게 그대로 했다.

마침내 이사짐을 옮기던 날, 이사를 올 여자의 가족들이 짐을 옮기다 말고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 이것 봐! 배수구에 물도 안 빠지잖아. 집 구조가 이게 뭐야?"
"베란다는 또 왜 뻥 뚫려 있어. 겨울에 어떻게 살라고?"

부동산에 들러 잔금을 치르는데 처음 그 집을 소개해주던 사장이 미안한 표정으로 건넨 한마디를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총각, 그동안 맘 고생 많이 했죠? 나도 총각한테 그 집 소개해놓고 계속 맘이 좋지 않았다오? 하지만 이제라도 해결 됐으니 다행 아니겠소."

덧붙이는 글 | '세입자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각서, #가압류, #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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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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