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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일대(1950. 9. 29)
▲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일대(1950. 9. 29)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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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상흔들

나는 어려서 구미 원평동 장터 오거리에서 살았는데, 내 또래 친구들 가운데는 아버지가 없이 자란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행방을 물으면 어른들은 "만주에 돈 벌러 갔다"든지, "일본에서 아직 귀국치 않았다"는 둥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장터 오거리에 공씨네 술도가가 있었는데, 그 집은 막걸리도 팔고, 엿도 팔며, 고물 수집상도 했다. 공씨네 내외는 환갑을 지난 분으로 딸과 젊은 며느리와 살았다. 할아버지가 약주를 좋아하셔서 심부름으로 이따금 주전자를 들고 그 댁에 가면 공씨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질금거리셨다. 나중에야 알았는바, 그 집 아들이 경북중학을 나온 엘리트로 해방공간에서 좌익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였는데, 나와 동갑인 그 집 손자도 전쟁 통에 잃게 되어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앞집 황소영감네도 그랬다. 나와 동갑인 친구의 아버지도 중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친구 형제는 졸지에 아비 없는 자식이 되고, 친구 어머니는 청상, 생이별 과부가 되었다고 어른들은 시절을 한탄했다.

자식이나 남편, 아버지의 좌익 활동이나 월북은 남은 가족들에게 평생 피멍을 남겼다. 그 고난은 당하지 않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연좌제의 고리는 가족의 출세 길도 막았다. 오직하면 그 시절 좌익사범은 문둥병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아버지를 찾아 북으로 가다

아버지를 그리는 소설가 김원일 선생
▲ 김원일 선생 아버지를 그리는 소설가 김원일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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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때는 가능한 상대의 약점이나 상처를 말하거나 건드리지 않는 게 예의다. 하지만 김원일 씨와 대담을 하며 아버지 얘기를 빠트리면 그야말로 팥소 없는 찐빵이 아니겠는가.

나는 화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넌지시 아버지의 함자를 물었더니, 김원일씨는 아예 2002년 방북준비 때 서영훈 대한적십자 총재에게 보낸 신청서류에서 아버지의 인적사항을 적은 서류를 뽑아 나에게 주며 설명도 담담히 덧붙였다.

김종표(金鍾杓 ‧ 94) 일제 때 마산상업고등학교 졸업. 한국전쟁 전 남조선노동당 경상남도 부위원장. 1950년 한국전쟁 직후 인민군 서울 점령 때, 성동구역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서울시당 재정경리부 부부장 역임. 연합군 인천 상륙 때 구로지역 방위선 전투지휘 후방부 부책임자로 있다가 인민군이 서울 철수할 때 단신 월북. 이후 의용군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남하. 195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남북회의에 북한 측 대표 일원으로 참가. 연락부 대남사업 책임지도원. 1968년 무렵 해운총국 간부를 지냄.

김원일 씨가  아버지를 마지막 본 것은 9 ‧ 28 수복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5남매를 맡겨둔 채 단신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그 뒤 남에 남은 여섯 식구의 삶이 수십 권의 소설이 되었다.

"생전에 제 어머니는 아버지를 원수처럼 미워했어요. 만일 아버지가 몰래 월남해온다면 내가 경찰서에 가서 고발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어머니는 낭만주의자이신데 이데올로기에 빠진 아버지를 평생 저주했어요. 한창 자라는 5남매를 남겨둔 채 당신 혼자 훌쩍 떠나버린 남정네가 미울 수밖에 없을 테지요. 거기다가 빨갱이 마누라라고 경찰서에 붙들려가 온갖 모욕도 당했을 테니까 이해가 갑니다. 어머니는 저희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닮지 말라고 숱하게 닦달했어요. 저는 어머니 말을 잘 안 듣는 말썽꾸러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며 밥을 먹고 살아왔지만 제 아우 김원우(소설가, 계명대 교수)는 어머니에게 세뇌를 당했지요.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먹이고 가르친다고 수고가 많으셨지요. 그 이야기들이 <마당 깊은 집 > 등 여러 작품에 나왔습니다. 박복하신지 우리 형제들이 자라 막 밥술이나 먹으려하니까 하늘에서 어머니를 데려 가셨어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를 닮지 말라고 무척이나 닦달했건만 천륜인 부자의 연이야 어찌 끊을 수 있으랴.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 실체를 알고자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와 마산상고 동창인 아동문학가인 이원수 선생에게 물었으나 잘 모른다고 해요. 당시 한국인 학생은 얼마 되지 않는데 5년 동안 같이 다니고서도 잘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그 당시 좌익 이야기는 모른다는 게 상책이었을 겁니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에게도 그 시절 이야기를 물어봤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침묵은 금'인 시대였습니다."

서울 영등포역 플랫폼에서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 먹이는 어머니(1951. 8. 20)
▲ 피란 길의 세 모자. 서울 영등포역 플랫폼에서 아이들에게 참외를 깎아 먹이는 어머니(1951. 8. 20)
ⓒ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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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소식

- 북한에 가서 아버지의 소식은 들었습니까?
"한 마디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마침내 방북케 되었다. 감리교신학대학 부설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에서 2003년 10월 평양에서 열리는 '손정도 목사의 독립운동과 사상'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에 참가하는 일행으로 북한에 가서 관계 당국자에게 아버지의 인적사항을 말하며 수소문했으나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남쪽에서 북에서 내려오다 붙들린 한 인사를 통해 간접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대충 들었다. 아버지는 1976년 7월 강원도 금강산 부근 서광사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별세했으며, 당시 북한에서 결혼한 처와 1남1녀의 이복동생을 두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김원일 씨는 금강산으로 갔으나 역시 소식을 들을 수 없었고,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북한 측)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상봉케 하거나 일체 확인해 주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지침이 내려진 모양 같았다고 했다.

작가 남정현 선생(오른쪽)과 백두산 장군봉에서(2005. 7.)
▲ 백두산 장군봉에서 작가 남정현 선생(오른쪽)과 백두산 장군봉에서(2005. 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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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2005년 남북작가대회에 참가하여 북한 안내원에게 고향 출신 동북항일연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자녀가 평양시내에 살고 있다는데 그 소식을 묻자, 그는 "첫술에 배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답을 했다. 오히려 중국에 있는 조선족 동포로부터 허 장군의 자녀는 평양에 살고 있는데, 자녀들이 어머니의 사진이 보고 싶다고 나에게 사진을 구해 보내줄 수 없느냐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백발의 아흔 살인 시인 이기형 선생은 당신 딸을 평양 모란각 부근에 산다는 얘기를 듣고, 모란각까지 가서 냉면을 먹으면서도 지척 거리에 있는 그 딸을 만나자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섰다.

비록 피 멍을 남긴 아버지일지언정 어찌 생명을 준 아버지를 잊을 수 있겠는가. 김원일 씨에게 '아버지'는 평생 화두요, 창작의 샘물이요, 그리움의 대상일 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어 시간 나누었다. 마무리로 분단 극복 방안을 물었다.

분단 극복 방안

"저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합니다. 그는 '인간은 완벽치 않다'고 했습니다. 철저한 선도 악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을 단세포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사상도 마찬 가지입니다. '지주 계급은 무조건 악(惡)이요, 소작인 계급은 선(善)이다'라는 식의 흑백논리로 봐서는 안 됩니다. 지주 가운데도 선량한 사람도 있고, 소작인 가운데도 고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도 마찬 가지입니다.

부서진 평양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이 건너는 피란민 행렬(1950.12. 3)
▲ 피란 행렬 부서진 평양 대동강 철교를 곡예하듯이 건너는 피란민 행렬(1950.12. 3)
ⓒ 눈빛춮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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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해방 후 토지개혁도 북한에서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 방식이었지만 남한에서는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이었습니다. 이를 이분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북한의 토지 개혁이 나은 것 같지만, 토지는 국가 소유가 된 것으로 농민은 국가에 소작하는 꼴이 된 것이고, 남한에서 유상 분배는 5년 분할 상환으로 그 뒤 물가가 오르는 바람에 상환이 쉬웠고, 어떤 지방에서는 한국전쟁으로 토지분배 대장이 없어져서 상환이 유야무야되기도 하였지요.

어쨌든 농민이 자기 땅을 가지게 됨으로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자식들 교육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제일의 교육열로 이만큼 경제성장을 이루었고요.

조금 전에 끝난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한국과 베네수엘라 대전에서 한국이 낙승해서 결승에 진출한 저력도 그 바탕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교육열 때문입니다.

남북의 분단은 우리 의사와는 달리 외세가 가져다 준 겁니다. 서로 상대를 헐뜯지 말고 상대를 감싸는 포용의 자세가 아쉽습니다. 그게 통일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벌써 분단 60년이 지났다고 하면서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이랄까 골육상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말로 긴 대담을 마무리했다. 안흥으로 내려온 뒤 김 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날 나들이로 만나지 못한 부인(전인숙 ‧ 64)을 바꿔주는데 몇 마디 나누자 곧 구미초등학교 1년 후배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넓은 듯하지만 무척 좁았다. 남북의 동포도 마찬가지다. 남북동포 모두가 김씨요, 이씨요, 박씨 최씨 …등으로 같은 핏줄이다.


태그:#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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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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