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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뻔한 수로 공작을 벌였다. 세포위원들은 전교생을 강당에 몰아넣고 열변을 뿜었다.

"악독한 미 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인 이승만도당을 물리쳐야 한다. 이것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는 길이다. 우리끼리 통일하겠다고 하는데 왜 미국 놈들이 끼어드는 거냐? 조국 해방의 성스러운 대열에서 일탈하는 자는 적어도 우리 학교라면 한 놈도 없을 것이다. 그런 놈은 민족의 이름으로 엄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옳소! 먼저 우리는 그런 반동분자들과 투쟁을 해야 합니다."

세포위원들과 열혈 학생들은 주먹을 쳐들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면 장내는 이상한 흥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럼 우리는 전원 의용군으로 지원하기로 결의합시다."
"찬성이오, 찬성!"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면 사회자가 나섰다.

"전원 찬성인 것 같지만 그래도 만약 반대하는 동무가 있으면 일어나시오."

그러면 우락부락하게 생긴 간부들이 곳곳에서 시부렁거린다.

"반대라고? 어디 반대 있으면 나서 봐."

사회자가 선언한다.

"성스러운 의용군 지원에 우리는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소."

개별 서명 날인이 있은 후 학생 전원은 시가지로 나선다. "00중학교 전원 의용군 지원!"이라는 플래카드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어떤 여학교에서는 이런 식으로 의용군에 전원 지원한 후, 학생들이 서로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가기 싫은 것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여학생들은 감격의 통곡을 한 것이었다.

저녁때가 되자 또 난감한 일이 생겼다. 김상호군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김성식 외사촌 누이의 아들이었다. 머리가 우수하여 일찍 사범학교를 마치더니 시골 중학교의 교사로 근무했던 청년이었다. 김상호는 작년 여름에 갑자기 상경하여 김성식의 집을 찾아왔었다. 그때 그는 좌익 혐의로 학교에서 면직되었다고 했다. 그 뒤로 아무 소식도 없던 그가 1년만에 어깨를 펴고 나타난 것이었다.

정숙은 없는 양식을 퍼내 조카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다.

"아저씨 댁에 오니 따뜻한 밥을 먹을 수도 있고 별천지입니다."

그는 유난히 거들먹거리며 밥을 먹었다.

"저는 노는 동안에도 당과 선이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시 당 문화부 일을 보고 있습니다. 정인보, 최현배 선생 등을 만나보았습니다. 생각보다 대학교수 숫자가 많아서 아주 바쁩니다. 그러니 삼촌께서 협조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성식은 횡액이 겹치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김상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당 관계 일로 필요하니 우선 8만 원 정도만 빌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성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한테 그런 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래도 아저씨가 힘을 쓰시면 그만한 돈이야."

김성식은 사뭇 불쾌했다.

"이 사람아, 난리 통에 누가 돈을 빌려주겠나?"
"난리 통이라니요? 그런 표현을 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성스러운 조국해방전쟁의 시간입니다."
"그런가?"
"지금은 당과 세포가 모두 나서 과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는 툭하면 당과 선이 이어지느니 끊어지느니, 세포가 살았느니 죽었느니 등의 말을 했다. 그것은 일다운 일을 안 해 본 사람들에게는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와 저의 세포들은 교수, 학자들의 동태를 보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삼촌은 왜 학교에 날마다 안 나가시는 겁니까? 나가셔서 유세대로도 활동하시고 복구대에도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의용군에도 지원하십시오. 어차피 뽑히지 않을 거니까. 그래도 그게 현저히 유리합니다."

"이 사람 듣고 있으려니 말이 과하군."

"과하다니요? 아저씨보다 점잖았던 분들도 얼마나 열성이라고요. 그 왜 홍익대학 정 선생 말입니다. 참 열심이십니다. 부인은 폐병을 앓으시고 아이들 여섯은 굶고 지내는데, 그 분은 이 여름 날 유세대에서 맹렬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매일 당에 오셔서 무슨 할 일이 없느냐고 물어 당에서도 감격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후보 당원으로라도 올릴 예정입니다."

"아니 그렇다면 그 사람이 당원도 아니면서 그랬다는 말인가?"
"지금 새로 당원 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김상호를 돌려보낸 김성식은 기분이 걷잡을 수 없이 불쾌했다. 마음이 켕기고 개운치 않은 것이 더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이두오를 찾아보기로 했다. 잡념을 지워 버리고 그에게 별 이야기라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두오의 사과벌레 이야기

북한산 중에서도 정릉 일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봉우리를 북악이라고 따로 불렀다. 여름 밤 산은 호흡이라도 하는 양 들고 내쉬는 소리가 짚이는 듯했다. 그만큼 북악의 녹음이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달빛도 깊은 나무 속과 빽빽한 수풀 사이로는 배어들지 못할 것 같았다. 가늘고 은은한 별빛만이 그것들 사이를 소리 없이 들락거릴 수 있을 듯했다. 그리고 날이 더웠던 최근 며칠 사이에 더 무거워진 배 향기는 별빛을 싣고 너럭바위 주변에 머무르고 있었다.

"배가 아니라 사과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두오에게 별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은 자그마치 네 명이었다. 조수현과 박미애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김성식과 유정숙 부부가 뒤늦게 합세했다.

"과수원에 사과나무가 있습니다. 나무마다 사과가 열려 있겠지요. 한 나무 당 사과가 얼마나 열려 있는지 세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무 하나에 사과가 몇 개나 열리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것은 아주 많은 숫자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중 어느 한 사과에 미세하다 할 정도로 작은 벌레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과벌레는 너무 작아서 돋보기로도 보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현미경이라면 크게 보이겠지요. 그런데 사과벌레는 사과가 평평한 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사과벌레 중 아주 모험심이 있거나 욕심이 많은 벌레가 있어서 사과 끝까지 한 번 가보겠다는 야망을 품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더 아름다운 땅이 있거나 보다 향기로운 꿀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과벌레의 이름은 콜럼버스거나 마젤란이라고 해 봅니다."

김성식은 빙긋이 웃었다. 이두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번잡했던 상념들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별빛은 여인들의 속눈썹까지 은은히 물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사과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말합니다. 사과는 둥글다고. 2차원의 사과가 3차원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입니다. 사과나무에는 아주 많은 사과가 있습니다. 또한 과수원에 따라 수십에서 수천 그루의 사과나무가 있겠지요. 우리나라의 과수원 아니 이 세상의 과수원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사과 개수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많은 사과 중에서 벌레가 사는 하나의 사과는 바로 지구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과나무를 합한 세계가 우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무수한 사과들은 곧 저 하늘의 별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주 2~3회 게재됩니다.



태그:#의용군, #사과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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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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