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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는 온통 벽보의 바다였다. 김성식은 자기는 바다에 표류하고 있는 무동력선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빼고는 모든 사람이 열심히 항해하고 있었다. 김아무개는 문련(文聯)에서 이아무개는 교협(敎協)에서 박아무개는 과맹(科盟)에서 오아무개는 전평(全評)에서 배아무개는 민청(民靑)에서 그리고 서아무개는 여맹(女盟)에서 일하고 있다더니, 결국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나같이 벽보를 만들고 가두시위를 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벽보들은 각 단체별로 경쟁이나 벌이는 듯 범람하고 있었다.

 

여러 벽보 중,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뗀다"는 것이 있었다. 미국이 중국을 포기한 것을 보면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지만 김성식은 그것이 믿기지 않았다. 인민군 입성 전 날인 6월 27일 자 신문에 UN이 이북군의 철퇴권고결의안을 통과시켰다는 보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의안까지 채택한 UN이 그리 쉽게 물러날 리는 없었다. 하기야 과거의 국제연맹도 구호만 요란했을 뿐, 에티오피아를 방치했고, 일본이 만주를 삼키고 중국까지 넘볼 때에도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기 판단이 옳다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했다.

 

김성식은 생각해 보았다. 그가 알기로 38선이란 2차대전의 결과로 그어진 미·소의 세력 절충점이었다. 그러므로 이 선에서 물러나는 것은 2차대전의 전과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론적으로 미국은 그리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튿날 그는 다시 학교에 가야 했다. 신분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본 서기장이 그에게 빈 용지 몇 장을 내밀었다.

 

"이력서와 자서전을 쓰십시오. 전면적으로 교원 임용 심사를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교수 몇이서 서류에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쑥스럽게 무슨 자서전이오?"

 

서기장은 대답 대신 서류 작성 요령이 인쇄된 안내서를 내밀었다. 안내서에는 여덟 살 이후의 경력부터 죄다 적으라고 되어 있었다. 투쟁 경력, 사상 경력, 정당 관계, 숭배하는 인물, 영향을 준 인물 등을 모두 쓰라고 되어 있었다.

 

모두들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빽빽이 종이를 채워 놓고 있었다. 심지어 철학과의 한 조교는 자기 자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오기도 했다고 했다. 김성식은 15세 대구고보 시절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 간 미결수로 복역했던 사실을 생각했다. 물론 그런 경력은 적지 않게 이로울 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키지 않아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아래처럼 간단히 적었다.

 

이력 : 별지 이력서와 같음

투쟁경력 : 없음

정당·사회단체 : 관계한 일 없음

숭배하거나 영향 받은 인물 : 없음

사상 경향 : ?

 

마지막 항목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사상마저 쓰지 않는다면 5개 항 모두 '없음'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사상 경향 난에, '역사적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부지지 못하여 온건한 학구로 지냈음'이라고 썼다가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평범한 학자로 지냈음'이라고 써서 빈 칸을 채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자신이 재임용에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배밭골에 밭뙈기나마 장만해 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학교에서 떨리면 반동으로 지목받지 않을까?'

 

별의별 누추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러다가 그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될 대로 되라. 말 그대로 쾌세라세라다. 이 마당에 갑자기 쿠오바디스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8월 15일까지 하루도 걸르지 않은 데모 

 

혜화동 길에 데모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행인에게 들으니 데모는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말 8월 15일까지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데모대는 걸음도 힘차고 자세도 씩씩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눈동자들에도 빛이 담겨 있었다. 식량이 부족하여 배를 채우기도 바쁜데 어디서 저런 힘이 솟을까 싶었다.

 

선두에는 중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원쑤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주검에 영광 있으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김성식은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인생에는 사랑도 있고 평화도 있다. 하필 왜 원쑤와 싸움과 죽음만을 저토록 강조해야 하나? 혁명 투사라면 또 몰라도 저들은 아직 소년· 소녀들이 아닌가? 인민공화국의 교육은 투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란 말인가?

 

다음으로는 여학생들이 따르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당참은 남학생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아 보였다. 시위는 주로 좌익이라서 퇴학 맞았던 학생들이 복귀하여 진두지휘를 하는 거라고 했다.

 

여학생들 뒤로는 대학생들이 있었다. 김성식은 자기 학교 학생들의 낯익은 얼굴을 몇 발견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떼메고 행진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부도 할 만큼 한 사람들이 저러는 것을 보니 불쑥 교육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그에게 정숙은 앞뒷집이 모두 굶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대한민국 시절에 쌀값이 2천 원을 넘었다고 해서 아우성들을 쳤는데 이제 쌀값은 5천원을 훌쩍 넘어 만 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드러내 놓고 불평하지는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서다리를 건너는 여인네들의 얼굴이 부석부석했다.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현저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얼굴이 누렇게 뜬 아이까지 있었다.

 

다행히 여름철이라 푸성귀가 흔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풀이라도 뜯어 먹을 수 있어서 그런지 아직 굶어 죽었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겨울 같았더라면 아사자가 더러 나왔을 것이었다. 풀은 기름에 부쳐 먹으면 중독이 없다는 소문이 돌자 기름 값이 급등했다. 옷값은 싸지고 식량 값은 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옷을 꺼내 식량과 바꾸려 하기 때문이었다.

 

김성식은 땅에 묻었던 양식을 꺼냈다. 더 이상 밥을 먹을 때 이웃의 눈치를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는 양식을 여러 봉지에 나누어 담아 이웃에게 보냈다. 그러고는 이제 아침은 밥, 저녁은 죽으로 하루 두 끼니를 먹으며 살아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식량 다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의용군 차출 문제였다. 김성식은 이두오가 걱정되었다. 소속도 없이 혼자 지내는 이두오는 자칫 하면 의용군으로 차출되기가 십상이었다.  신문마다 '어느 학교에서 몇 명', '어느 학교는 전원' 식으로 이승만 도당에 대한 적개심에 불탄 학생들이 자원하고 있다고 했다. 지원하면 그 날로 출진한다는 것이었다. 학교에 나간 자식이 집에 오지 않아서 부모가 학교에 문의하면 의용군으로 나갔다는 답변을 듣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글쎄, 그 몹쓸 것이 부모 얼굴이나 한 번 보고 갔어야지. 옷도 갈아입지 않고 떨어진 신발을 신고....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아야 면회라도 한 번 가지."

 

이렇게 넋두리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었다.

 

대학생들에게는 협박과 회유가 병행되고 있었다. 이른바 공산당 세포위원들은 집요하게 대학생들을 설득했다.

 

"적어도 대학생 된 사람은 지금 한 번은 의용군을 치르고 와야만 인민공화국에서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소. 이미 대한민국의 성인으로서 백성질은 했겠다, 무엇으로 속죄를 받겠소? 반동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오. 더욱이 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려면 의용군 지원은 필수적이오. 그리고 일찍 지원하는 사람일수록 충성심이 더 인정된다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재구성한 부분입니다.


태그:#의용군,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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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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