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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홍콩 인종차별금지법을 두고 논란이 분분하다.

홍콩 공식 인구수는 700만 명. 하지만 사업이나 관광을 위한 유동인구를 포함하면 실 거주자는 1천만여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홍콩은 한마디로 다국적 외국인들의 도시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금융, 교육, 문화산업 분야에는 유럽인들이 상대적으로 많고, 자영업이나 건설 분야에는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가정부 일을 하는 여성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의 숫자만 35만 명에 이른다.

문제는 홍콩 내 외국인들,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나 저임금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묵인돼 왔다는 점이다.

홍콩정부는 1965년 영국령 하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국제협약을 비준한 이후 수십 년이 지난 1991년에야 정부와 공공영역에서 차별금지법을 만들었다. 이후 국제사회는 여러 차례 사적인 영역으로까지 인종차별 금지법을 확장할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콩정부가 인종차별에 관한 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것은 2003년에 이르러서였다. 법안이 통과된 것은 또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8년 7월. 그런데 이 법 또한 시행을 앞두고 '오히려 차별을 조장하는 법안'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해 5월에 열린 홍콩국제아트페어전.
 지난해 5월에 열린 홍콩국제아트페어전.
ⓒ 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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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오케이", "중국인? 글쎄", "인도인? 오 노~"

'백인 무료, 중국인 소액 입장료, 인도인 좀 더 많은 입장료'

1998년, 홍콩 완차이 지역에 있는 술집들의 입장료 기준이다. 이 술집들은 피부색에 따라 입장료를 달리 받은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홍콩 영문일간지인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의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홍콩정부의 태도는 "상업적 결정이기 때문에 인종차별과는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홍콩사회에서 백인과 중국인 고객들에게는 더 나은 부동산이 다양하게 소개되는 반면, 파키스탄 출신의 고객들에게는 한정되고 질 낮은 부동산이 소개된다는 보도도 나왔다. 심지어 국제적 명성이 있는 회사의 상급 직원에게 임대를 해주기로 했다가 세입자가 남아시아지역 출신이라는 점을 알게 된 후 이를 철회한 사례도 드러났다. 중개인들은 임대차 중개 시 세입자의 국적, 가족 수, 직업 등을 필수 확인 요소로 삼을 정도였다.

2001년에는 네팔인들이 홍콩 교육부로부터 자녀들의 학교교육을 거부당해 결국 문 닫은 쇼핑센터를 임대해 교육시켰어야 했다는 신문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홍콩사회에 일반적으로 자리 잡은 가정부에 대한 피부색 차별은 가장 흔한 차별 중 하나다. 필리핀 출신의 한 여성은 홍콩인이었던 집주인으로부터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원숭이 같다"고 거부당했다.

수십 년간 지속돼온 이런 차별은 현재까지도 여전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홍콩 정부는 사회 다수가 법률 제정을 지지하지 않으면 서로 다른 인종간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법률보다는 공교육을 통한 인종차별 해소가 가장 좋은 방법임을 강조해 왔다.

세계적인 금융과 비지니스로 유명한 홍콩의 센트럴지역에 휴일마다 모여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필리핀 가정부들.
 세계적인 금융과 비지니스로 유명한 홍콩의 센트럴지역에 휴일마다 모여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필리핀 가정부들.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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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투쟁 끝에 인종차별금지법 제정,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홍콩에서 인종차별 금지법이 통과될 수 있게 된 것은 홍콩사회단체들의 노력과 국제여론의 영향이 컸다. 홍콩 인종차별금지법은 성차별 금지, 장애인차별금지, 가족형태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이어 네 번째다.

2008년 제정된 홍콩 인종차별금지법은 아시아 내에서 인종차별에 관해 따로 국내법제화하고 있는 국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안 내용을 알게 된 시민사회단체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률이 통과된 뒤 기회균등위원회(Equal Opportunities Commission, EOC)는 인종차별법 중 고용 관련 부분에 대한 대중간담회 자료를 배포했다. 이에 따르면 이 법안은 법적 강제력을 부과하거나 법적 효력을 직접적으로 갖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때문에 법률을 준수하지 않더라도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는다는 것.(조항1.2.2) 사실 이러한 조항은 이 법률이 법적 구속력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없다.

또 기자간담회 및 토론회를 주도해 온 퍼미 옹은 법률 조항 자체의 부적절한 용어 사용 등 허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많은 고용주들이 해외에서 온 이주민들을 고용하고 싶어 하지만 법률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고의 없이 법을 위반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요. 예를 들어 어떤 말을 했을 때 인종차별을 하는 것이 되는지 이 법이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요."

홍콩인권모니터 의장인 변호사 총이유퀑도 핵심 개념이 이 법률에서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존의 차별 관련 법률과 비교했을 때 이 인종차별금지법안이 가장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

이밖에 토론참여자들은 전문성이 결여된 번역 및 용어사용, 인종차별법령임에도 중국어와 영어로만 제출돼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 출신들에겐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러한 지속적인 비판을 받은 기회균등위원회는 나중에야 다른 다양한 언어로 자료를 공급했다.

토론자들. 퍼미 옹과 총이유퀑 등이 발언자석에 앉아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홍콩에서 일하는 이주민들과 사민사회활동가들이다.
 토론자들. 퍼미 옹과 총이유퀑 등이 발언자석에 앉아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홍콩에서 일하는 이주민들과 사민사회활동가들이다.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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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차별 부르는 '차별의 예외'

그렇다면 '인종차별'에 해당하는 것은 어떤 경우이고, '인종차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법안은 두 번째 장에서 인종차별금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대상을 상세하게 열거하고 있다.

- 뉴테리토리 지역에 거주하는 토착민들
- 1898년 이후 홍콩에 마을을 형성하여 살아온 거주자들의 직계후손들
- 홍콩의 영구거주민
- 홍콩에 주택과 토지 소유권이 있는 사람
- 이민법에 따른 규제와 조건에 종속되어 있는 사람
- 이민법에 따라서 토지소유권이 있거나 거주할 수 있는 사람
- 홍콩 거주 기간
- 국적, 시민권, 자국에서의 거주형태 등

또 국적, 시민권, 또는 다른 나라에서의 거주형태에 대한 항목에서 사람들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인종차별행위가 아니라는 내용도 나온다.(조항 2.2.4).

"미국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경우, 미국 국적인 사람을 선별하여 고용하는 것은 미국 국적이 아닌 사람들에 대해 인종차별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이 조항은 국적에 따라 차별하면 인종차별이 아니니 차별을 하고 싶다면 국적을 이용하라는 지침을 주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신이 인도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용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법을 위반하는 게 아닌 셈이다. '국적'을 거론하는 것은 법률 위반이 아니고, '인종'이나 피부색을 언급할 경우엔 법률적용을 받는다는 것이다.

홍콩에서 유색인종으로 살아간다는 것

다문화와 세계화를 내세우고 있지만 홍콩 사회 내에서 다양한 문화를 배우고 존중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많은 인종과 국적이 섞여 있고, 다양한 종교사회가 공존하고 있지만, 현지인들에게 이들은 상품구매자이거나 자신들이 설 자리를 빼앗은 위험한 존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남아시아인들은 고급고객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매장에서 직접적으로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으며, 동남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내 집에 가정부로 와 달라"는 제안을 듣는 경우가 많다.

무슬림인 사키나씨는 고기가 들어있는 식품을 구매하여 섭취하게 됐던 경험담을 털어놨다.
 무슬림인 사키나씨는 고기가 들어있는 식품을 구매하여 섭취하게 됐던 경험담을 털어놨다.
ⓒ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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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인 사키나씨는 "패스트푸드에 고기가 들어있는지 수차례 확인하면서 점원으로부터 돼지고기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음식을 입에 넣었지만 고기를 먹게 된 경우가 있었다"면서 홍콩인들은 무슬림이 절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인 차별에 대한 홍콩사회의 시각은 관련 기자회견을 추진하던 퍼미 옹이 한 기자로부터 들었다는 답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남아시아인이나 동남아시아인 차별에 대해 기자회견을 한다구요? 유럽인들에 대한 차별이야기라면 흥미로운데, 남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야 흔해서 뭐 재미없는데."

어떤 이는 이런 홍콩문화가 현지인들의 정치, 경제적 위치에 대한 불안함과 삶에 대한 안전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오랜 영국 식민지 생활이 아시아인으로서 혹은 중국인으로서 홍콩인들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기본적인 영어는 어디서든 조금은 통하는 사회,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사회, 세계 속의 아시아 문화도시를 지향하는 사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의 최저임금조차 부정하는 사회, 국적과 피부색에 따라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사회. 이것이 홍콩의 두 얼굴이다. 또한 이는 한국을 비롯한 다른 여러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이 문제를 법률문제로 공론화한 홍콩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주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태그:#홍콩 인종차별금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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