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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특이한 나라입니다. 공식적으로 적힌 헌법이 없고, 권리에 대한 헌장도 정확하게 명시된 것이 없습니다. 모두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일들에 근간을 두고 운영됩니다. 그런 명시적인 헌법이 없어도 시스템이 비교적 잘 유지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달라졌습니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인종이 특히 런던으로 많이 이주하다보니 서로 다른 문화의 요구와 권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평생 교육시설 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Scott Herberson(Head of Leisure & Lifelong)의 이 한마디가 현재 영국 교육 현장의 고민을 대변해준다. 실제 2005년 7월 7일 발생한 런던버스자살 폭탄 테러는 영국에서의 기존 다문화주의 정책과 새롭게 제기되는 통합정책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영국은 영국 사회와 문화에 초점을 둔 다문화 교육과 시민권교육(Citizenship education)에 주력하고 있었다.

 

영국은 인권교육이 하나의 교과목으로 정해져 있지 않고 시민권 교육 안에 민주주의, 권리와 책임, 복지, 소비자의 권리, 그리고 인권이 포함되어 있다. 시민권교육은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갖는 권리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엑세스 대학의 에나에게 왜 영국에서는 시민성교육을 더 강조하는가를 묻자, 인권은 시민성보다 훨씬 더 큰 개념이기 때문에 배우기, 가르치기, 공부하기가 모두 어렵다고 말했다. 어려워서 덜 강조한다고? 궁금증은 토니블레어의 연설에서 다소 풀린다(토니블레어도 만났냐고? 아니죠~).

 

 "영국은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다. 다문화 영국과 문화적 다양성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차이'가 분리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진정한 '통합(cohesion)'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신뢰하고, 법의 지배, 관용, 동등한 대우, 국가와 역사적 유산 등에 대해 존경하고 영국의 가치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결국 영국 문화에 통합되기 위한 시민권교육이 중요하고, 시민권을 갖추기 위한 여러 요소에 하나로 인권이 포함될 수 있다는 견해다. 권리 못지않게 책임감 있는 행동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 영국에 우리가 갔다. 인권 친화적인 학교 문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교장선생님, 인권교육 교재도 두어 권 냈지만 여전히 인권교육의 맛이 궁금한 사회선생님, 학생 스스로 의제를 만들고 대안을 도출하는 학생 자치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 대안학교 선생님, 이제 막 인권교육에 입문한 언제나 즐거운 도덕 선생님, 인권교육 정책을 고민하는 보건복지가족부 사무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권위 학교교육팀장과 필자까지. 교육과정을 만드는 기관, 인권교육 교재와 교육을 전담하는 NGO, 인권 교육하는 대학교와 연구센터, 그리고 교육현장인 초, 중·고등학교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박 10일의 일정이었다.

 

국가인권위는 이미 2007년 영국대사관과의 공동 주최로 인권 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인권교육 국제워크숍을 개최하면서 이후 영국의 인권교육과 다문화 정책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교사들의 인권교육 역량을 기르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제안을 공유했었다. 이번 연수는 그동안의 영국과의 인권교육 협력사업이 작은 열매를 맺은 것으로 영국대사관의 물심양면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감사드린다.

 

우리가 방문한 기관들을 소개하려면 이 기관들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한국의 교육과정평가원에 해당하는 영국의 Qualification and Curriculum Authority에서는 교과과정을 편성한다. 교과과정에는 성공적인 학생, 자신감 있는 개인, 책임감 있는 시민 만들기에 초점을 두지만 특히 책임감 있는 시민에 대한 부분이 교과 부분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편성된 교과과정으로 초, 중등학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엠네스티나 시티즌십파운데이션이나 국제아동평화단체, School Council 같은 NGO에서는 수업을 풍부하게 해줄 시민권 관련 교재들을 개발한다. 인권과 인권교육 연구기관을 둔 대학에서도 인권교재를 개발하거나 교사 연수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이제 방문기관 중 인상 깊었던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는 '나이 많은 (늙은)여자' 에미와 '피부색이 다르고 출신국가가 다른 남자' 알리의 이야기다. 알리는 모로코 출신 일용직 노동자로 일이 있을 때는 카센터에서 일을 하고 없을 때는 단골 바에서 술을 마신다. 에미는 독일인인데 자식들은 모두 장성해 떠나고 청소부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혼자 살아가는 60대 중반의 노년 여성이다. 이 둘은 사랑에 빠지지만 노년의 여자와 인종차별을 당하는 아랍계 남성의 사랑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며 둘은 추악한 조합으로 그려진다. 사람들의 모진 시선을 극복해가며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안정적인 시점에 접어들면 두 사람의 '진짜 소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2라운드 종이 울린다. 두 사람은 다른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말과 행동으로 잦은 말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알리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는 모로코 전통음식인 '쿠스쿠스'를 에미는 '싫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알리도 에미도 상대방을 받아 안는다는 것은 그의 문화와 배경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걸 몰랐다.    

 

여기 '다문화', '소수자', 혹은 '인종'이라는 말이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 다문화 인식 개선 교재가 있다. 국제 반노예운동단체에서 발간한 "A taste for freedom"이라는 요리책이다. 그가 먹는 것이 그를 말해준다고 괴테는 말했다. 음식은 그가 나고 자라난 문화이며 음식이 그의 정체성을 이루는 한 요소다. 매운 카레나 크림 스파게티 혹은 김치를 먹을 때 그가 자란 나라와 문화의 맛도 함께 음미하는 것이다. 요리책으로 다문화 수업을 진행하면 요리 상식도 생기고, 아이들은 그 음식을 먹는 그 나라를 가보고 싶다는 동경도 싹틀 것이다. 멋진 교재였다.

 

이튿날 우리는 런던대학교에 재직중인 휴 스타키(Hue starkey) 교수가 진행하는 대학원 수업을 참관했다. 스타키 교수는 지난 2007년 국가인권위가 주관한 "인권친화적 학교 문화 조성을 위한 국제워크숍"에 초청되어 영국의 친인권적 교육환경 조성을 위한 노력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타키 교수는 유럽의회와 유네스코 인권교육의 전문자문가로 일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인권관련 워크숍, 연수, 컨설팅 활동을 해온 인권교육 전문가이기도 하다.

 

수업 주제는 Three faiths forum seminar로 3가지 종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이었다. 주로 무슬림 학생들이 많았는데 모둠별로 진행된 토론에서 학교 안, 혹은 밖에서 만나는 종교 문제들이 주를 이뤘다. 모둠 안에서 "무슬림 여성으로서 억압(차별)받아 본 경험과 그때의 느낌은 어떠했는가?", "무슬림 여성들이 머리에 히잡을 두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진 않는가?" "기독교인들은 왜 타종교에 비해 자신들의 종교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가?"등의 질문들이 제기되면 학생들은 그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공유한다. 토론이 깊어질수록 다문화가 지닌 갈등과 충돌을 어떻게 이해하고 조정할 것이냐는 상식적인 결론이 모아졌지만 그저 "다른 문화를 존중해야 된다."는 다소 평이하고 당위적인 사고로 정리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내가 어떻게(왜) 타인에게 '다르게', 혹은 '부정적'으로 보여 질 수 있는가?"를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길 권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만 대화하는 것은 '안정감'은 주지만 '변화'를 일으킬 순 없다는 것이다. 소수자집단이 억압받고 차별받는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집단이 형성되고 이것이 소수자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만 서로 위무하다보면 다소 폐쇄적이 되어 선한 의지로 그들을 도우려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문 앞에 세워두고 벌세울 지도 모른다. 바로 이렇게. "내 입장이 돼보지 못한 당신은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다른 문화와 환경에서도 '보편성'은 획득되어야 한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원칙과 기준에 대한 합의 같은 것, 이를 테면 모든 사안에 '정의'나 '평화', '인권'을 기준에 두는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방문은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첫날 스쿨 카운슬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활동가에게 들었던 학생 위원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명의 초등학생 위원들이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운동장이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 강당에서 사무(?)를 보고 있다. 이 친구들은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안전사고나 친구들 사이의 따돌림 등 일종의 '사건 접수'를 하고 해결해주는 상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의젓한 모습이 예뻐서 내가 "선생님, 하루에 몇 건의 사건을 처리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조금은 멋쩍은 듯 웃으며 "일주일에 한 건 정도...."라 했다.

 

영국은 다문화에 대한 국제 교육이 아주 어려서부터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스쿨 카운슬을 함께 운영하는 선생님께 물었다. 아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어떻게 지도하느냐고. 그는 사안에 대해 합의를 모아가는 의사 결정과정은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대부분 허용적인 범위 안에 있지만, 만일 한 학생이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전체에게 심각한(serious)문제인지를 아이들 전체가 인식할 수 있는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경고를 주는 '회수'와 '강도'에 있다. 한번 할 때 엄격하고 강하게. 이건 꼭 지켜야 하는 원칙에 대한 문제라고 말이다. 게다가 이미 너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친구들이 한 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누굴 딱히 꼬집어 차별할 수도 없는 구조라고 했다. 어떤 경우는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친구에게 다른 친구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교사가 할 일을 대신 한다고도 했다.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그 교육이 나라를 교육시킨다."고 한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어떤 이들은(선생님들도) 인권교육에서 '권리' 부분을 너무 강조해 가르치다보면, 학생들이 자신들 권리만 주장하느라 교사의 권리를 소홀히 하기 쉽고, 자신의 책임과 의무에서는 멀어지기 쉽다는 걱정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알게 되면, 타인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동시에 교사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교사들도 행복해한다는 연구(오슬러, 영국)가 보여주듯이 권리 교육에 대한 걱정은 걱정일 뿐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그물코처럼. 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그 한 칸의 그물코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인권교육의 담론은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유엔 인권교육 10개년 계획에서 보여지듯이 인권교육 강화를 위해 초,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권의식을 심어주고 인권존중태도를 키우기 위한 각종 교재들이 발간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일선 학교의 노력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담론만큼 인권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별개다.

 

인권교육은 즐겁다.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찾아가고 대안을 찾아가는 형식의 활동 수업들이 주를 이루고,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확장되고 변화해간다. 그러나 인권교육이 한 시간의 즐겁고 유쾌한 게임으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인권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 어떻게 현실을 변화시키는가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 인권교육이 인권 실현의 출발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태그:#인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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