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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광부)는 지금껏 해오던 '한국대중음악상' 예산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불과 16일 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한국의 그래미', '한국의 빌보드'를 만들고 '대중음악전용관'을 짓겠다고 발표한 사실과 사뭇 상충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음악산업을 키워내기 위해 1275억원을 투입하겠다는 이 야심 찬 계획과 단 몇 천 만원의 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발표는 이해되기가 어려운 결정이다.

 

이로써 문광부 장관이 말하는 대중음악과 '한국대중음악상'의 대중음악 사이에는 커다란 장벽이 생겼다. 순간 '대중'이라는 단어는 공중을 표류했고, 실로 대중들에게 온전히 존재해야할 그 단어는 그 애매모호한 성격 때문에 누군가에게 포획된 채, 호명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흔히 '대중음악'이라고 말할 때, 그 대중이 갖는 의미는 다양하다. 그것은 대중적이라는 말로써 상업적인 의미를 띨 수도 있고, 흔히들 서민적이라고 말하는 그 대중들의 정서를 대변한다는 의미로 그 문화적 특징을 말할 수도 있다. 이 의미를 만일 계층적 잣대로 바라본다면 대중이라는 말만큼 애매모호한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저 '민중'이라는 단어와 '국민'이라는 단어가 가진 분명한 입장과는 다른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상업적이면서도 서민적이라는 것이다.

 

'있는 자'들의 홍보용 돼버린 방송사 음악시상식

 

올해로 6회를 맞이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은 과감하게도 이 양가적 성격을 띤 대중의 의미를 한 테두리 속으로 봉합하려 했다. 이 상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은 방송사와 대형 기획사 저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국내의 음악 시상식이 갖는 한계를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대중들까지 인식하게 되면서부터다.

 

대중음악이 갖는 상업적 성격은 몇몇 대형 기획사들의 승자독식구조를 지속시켰고,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방송사의 시상식은 그네들의 홍보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그네들에 의해 대중음악이라 호명되는 몇몇 음악들이 대중들의 다양한 기호를 묵살하고 획일화시킨다는데 있었다.

 

'한국대중음악상'의 선정위원이 기자, 잡지 편집장, 음악평론가, 교수 등의 전문가로 구성된 것은 이 상이 마치 전문가 집단의 엘리트주의적 시상식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게 만든다. 하지만 찍어낸 듯한 기성품으로서의 음악들이 범람하는 상황에 실로 대중음악이라는 실제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음악적 감수성과 시도가 드러나는 음악들을 발굴해내 좀 더 다양한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을 구성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선정위원으로서 한 것은 뛰어난 음악성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승자들의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음악들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이 아니었을까.

 

고형된 대중음악의 체질에 일침을 가하는 첨병이면서도 그다지 상업적으로는 대중적이지 못한 인디 음악들은 '한국대중음악상'이 발굴해내야 하는 필연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음악이지만, 오히려 그 상업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음악적 가치가 조명되지 못한 음악 또한 음악 지상주의를 내세운 '한국대중음악상'이 고려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대중에 맞춰 다양성 추구하는 TV 프로그램들

 

'한국대중음악상'이 6회까지 오면서 차츰 전자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선정이 후자로까지 그 영역을 넓힌 것은 이 상이 결정된 틀이 아니라 진화해가는 틀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6회의 후보군에 '빅뱅'은 빠져 있지만 '태양'의 솔로곡 '나만 바라봐'가 들어있다는 것은 이 상이 가진 균형감각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대중음악상'이 대중의 온전한 모든 기호를 잡아내지는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을 하나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진화의 대목은 긍정적이다.

 

작년 한 해, TV 음악 프로그램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인디 밴드들('장기하 밴드'나 '갤럭시 익스프레스' 같은)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한국대중음악상'이 이제 변화해가는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를 제대로 선점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KBS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윤도현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장르 구분을 넘나드는 음악의 소개가 그 전조를 보였다면, 그 바통을 이어받은 작금의 <이하나의 페퍼민트> <음악여행 라라라> <스페이스 공감>같은 프로그램들로 그 다양성을 넓혀가고 있다. 이것은 TV 음악 프로그램들이 과거와 같은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에만 편향된 형식만으로는 대중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대중음악상'은 스스로도 진화해오면서 작금의 변화된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와 점점 호흡을 맞춰가고 있다 보여진다. 무엇보다 대중음악이라고 하면 그 '대중'이 의미하는 상업적으로 편향된 인식을 깨고, 거기에 다양성을 담은 대중정서의 의미를 덧붙인 점은 이 상이 지금껏 부지불식간에 해온 가장 큰 공이 아닐 수 없다.

 

갈림길에 서게 된 '한국대중음악상'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문광부의 '한국대중음악상' 지원 중단은 다른 차원에서 그 의도를 이해하게 된다. 문광부는 '한국의 그래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거기에는 역시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상업성을 '대중'이라는 의미 속에 포함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1275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는 투자와 이윤이라는 당연한 결속으로 볼 때, 대중음악의 두 얼굴 중 하나인 상업적인 얼굴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의 통제 하에 대중음악의 틀을 두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대중음악이 가진 체제 반항적 성격을 덜어내고 그 상업적 시스템에 몰두하게 하려는 국가적 프로젝트 속에서 '한국대중음악상'이 선취한 대중음악에 대한 새로운 정서적 의미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단 몇 천만원에도 불구하고 지원중단을 선언한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한국의 대중음악은 이로써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저 한국의 그래미상이 말하는 상업적으로 편향된 획일적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온전히 다양한 기호를 반영하는 대중들 속에 남을 것인가. 거대자본과 미디어에 의해 통제가 가능해진 세상 속에서, '한국대중음악상'이 홀로 서 있는 그 자리가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정덕현 기자는 대중문화평론가입니다.


태그:#한국대중음악상, #대중음악,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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