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예빈산 정상 이정표에 걸려 있는 다산선생의 글
 예빈산 정상 이정표에 걸려 있는 다산선생의 글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여긴 다산 정약용의 시 한 수가 걸려 있네.”
“정말 그러네, 그러고 보니 산행 시작 때부터 이정표마다 시 한 수씩 걸려 있었잖아? 다산선생의 고장이라 다르긴 다르구먼.”

경기 남양주 한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예봉산에 올랐다가 율리봉을 거쳐 예빈산에 올랐을 때였다. 예빈산 정상인 직녀봉에도 이정표가 서있었는데 다산 정약용의 글이 송판에 새겨져 걸려 있었다.

“우리 집 동녘에 있는 물과 구름 마을인데 가만히 생각하니 가을이면 즐거운 일 많았었지, 밤 밭에 바람 불면 붉은 알밤 떨어지고 어촌에 달이 뜰 때 자줏빛 게맛 향긋했지, 마을길 잠시 걸어도 모두가 시(詩)의 소재, 돈들이지 않아도 주안상은 있다네, 객지생활 여러 해에 돌아가지 못하니 고향편지 볼 때마다 남몰래 마음 다치네.”

다산 정약용이 오랜 유배생활을 할 때 고향을 그리며 쓴 글이다. 산꼭대기 이정표에 걸려 있는 다산의 옛글을 읽으며 시공을 뛰어넘는 절절한 그리움이 읽는 사람들까지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글과 시는 산행 들머리인 예봉산 입구에서부터 볼 수 있었다.

급경사 오름길에서 한 끼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쩔쩔매다

지난 2월 17일은 서울지방의 최저기온이 영하 8도까지 내려갔다. 본래 강원도에 있는 높은 산을 계획했다가 너무 추운 날씨에 무리일 것 같아 계획을 변경하여 오른 산이 남양주 한강변에 불쑥 솟아 있는 예봉산과 예빈산이었다.

예봉산 깔딱고개를 오르다 바라본 한강과 팔당대교 하남시 일원풍경
 예봉산 깔딱고개를 오르다 바라본 한강과 팔당대교 하남시 일원풍경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전철을 타고 달려 팔당역에서 내린 일행 3명은 철길 굴다리를 지나 예봉산 자락으로 접어들었다. 평소 서울지역 노인들이 많이 찾는 산으로 알려졌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바람결이 차가운 만큼 산길이 얼어 있어서 길은 보송보송했다. 첫 번째 이정표를 만났다. 누군가의 시 한수가 새겨진 송판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지만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조금 더 올라가자 길은 급경사로 변했다.

모처럼 도시락을 준비해 가지고 오르는 산이어서 등에 짊어진 배낭이 유난스레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추운날씨에 산 위에서 먹는 점심을 걱정한 아내가 보온도시락과 푸짐한 반찬에 따끈한 시래기 된장국까지 담아주었기 때문이다.

힘겹게 깔딱고개를 넘어 예봉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
 힘겹게 깔딱고개를 넘어 예봉산 정상에 오른 일행들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첫 번째 안부에서 잠깐 쉬고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욱 가파른 급경사다. 코가 땅에 닿을 듯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건 정말 지독한 깔딱고개다. 전에도 한번 이 산을 올랐었지만 그때는 코스가 달랐었다.

“어이! 친구들 천천히 좀 올라가자, 이건 너무 힘들어서 못 올라가겠는 걸.”

그런데 힘 좋은 일행들, 두 사람은 잘도 올라간다. 이날은 두 명의 친구들에 비해 내가 너무 뒤처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잠깐 서서 기다리며 “웬일이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전엔 이렇게 힘들어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온 도시락이 무거워서 너무 힘들어 못 따라 가겠어. 겨우 한 끼 점심이 이렇게 나를 짓누를 줄이야.”

내 푸념이 어이없는지 친구들이 미소를 짓는다.

“아니, 겨우 한 끼 인생이 그리 무거운 걸, 60년 넘는 세월을 어찌 견디며 살아왔나? 허허허.”

한 끼 인생의 무게와 한평생의 비교라니, 그것도 참 그렇다. 그러고 보니 보온 도시락이래야 겨우 한 끼 인생의 무게가 아닌가. 나무에 기대서서 잠깐 숨을 돌리며 바라본 하늘이 모처럼 쨍하다.

율리봉에서 바라본 운길산
 율리봉에서 바라본 운길산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아, 너무 힘들다, 깔딱고개 오르다가 깔딱! 죽을 것 같아.”

다음 안부를 지난 또 다른 깔딱고개에서는 더욱 힘들었다. 평소보다 4~5 kg 정도 무겁게 짊어진 배낭 때문에 오르막 깔딱고개는 정말 너무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급경사는 잠깐씩 숨을 돌릴 수 있는 안부를 제외하면 정상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래도 가끔씩 숨을 돌리며 뒤돌아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그만이다. 급경사 산 아래 한강이 흘러내리고 반대편엔 역시 불쑥 솟아오른 검단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인다. 아래쪽으로는 강변을 따라 펼쳐진 하남시와 덕소가 마주보며 손짓하는 모습이다.

해발 683미터 정상에 오르자 태극기가 싸늘한 바람 속에 저 홀로 펄럭인다. 왼편으로는 철문봉을 거쳐 적갑산으로 이어진 능선길이고 오른편으로 내려가면 예빈산으로 가는 길이다. 골짜기 건너 맞은편에 솟아 있는 산은 운길산이다.

양지쪽에 앉아 간식을 들고 예빈산을 향해 내리막길로 나섰다. 이쪽은 길이 조금 미끄럽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어서 길 표면이 조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내려간 후에는 다시 오르막길이다. 또 다시 힘이 부친다. 오르막길에만 서면 체력이 달려 헉헉거린다.

등산길에서 만난 멋진 소나무
 등산길에서 만난 멋진 소나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역시 오르막길이 힘든 법이야, 내리막길은 순식간이잖아? 등산 다니면서 인생 공부 많이 한다니까, 이미 너무 늦은 공부지만, 허허허.”

일행들도 오르막길이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인가 보았다.

이정표마다 걸려 있는 시 한수, 역시 다산선생의 고장답네

작은 봉우리에 올라서니 율리봉이다. 봉우리엔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등산객 한 사람이 앉아 쉬다가 우리들을 미소로 맞는다. 그는 운길산 입구 골짜기에 살고 있는 5년 전에 귀농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나무 등걸 모양의 쉼터에 앉아 땀을 식히며 그의 귀농 이야기를 잠깐 듣다가 이정표를 살펴보니 예의 시 한수가 적혀 있는 송판이 걸려 있다. 정희성 시인의 ‘숲’이라는 시다.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있더군
제가끔 서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예빈산 오르막길에서 만난 혹부리나무
 예빈산 오르막길에서 만난 혹부리나무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정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능선길로 이어진 듯한 예빈산이 저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길은 한없이 아래로만 내려간다. 능선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끝없이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이정표에도 시 한 수가 매달려 내리막길 서글픈 인생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눈길을 끈다.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시 한 수가 적힌 송판이 걸린 이정표
 시 한 수가 적힌 송판이 걸린 이정표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예빈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율리봉
 예빈산 하산길에서 바라본 율리봉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 다. 내리막길은 거의 골짜기 가까운 지점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다시 예빈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났는데 그곳이 ‘율리고개’ 팔당에서 운길산 골짜기로 넘어가는 옛길이다. 고갯길에 있는 이정표에도 역시 박재삼 시인의 ‘산에 가면’이라는 시 한 수가 걸려 있었다.

견우직녀 애틋한 만남의 전설이 있는 예빈산의 또 다른 이름 직녀봉

예빈산을 오르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경사가 완만했기 때문이다. 해발 589미터, 예빈산은 조선시대 손님맞이 관청이었던 예빈사에서 땔감 벌채용 산으로 지정한 산이어서 예빈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이름은 직녀봉으로 견우와 직녀가 이 산에서 한 번 만났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직녀봉에 오르니 바람이 잔잔하고 햇볕이 따사롭다. 다산 선생의 시 한 수를 등받이 삼고 앉아 점심을 먹었다. 아내가 마련해준 보온 도시락을 꺼내고 보니 음식들이 너무 많다. 국, 밥, 반찬에 뜨거운 물까지, 그러니 도시락 무게에 눌려 힘들었을 수밖에,

“아니 점심 한 끼 먹을 건데 웬걸 이리 많이 싸왔나? 우리네 인생에서 점심 한 끼는 그야말로 찰나인 걸, 허허허.”
“글쎄 말이야. 60평생을 오늘 점심 한 끼 짊어지고 산길 오르듯 했더라면 견뎌내지 못했을 거야! 허허허“

천주교 묘지에서 바라본 팔당호수와 다산유적지
 천주교 묘지에서 바라본 팔당호수와 다산유적지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그래도 따끈한 밥과 국, 푸짐한 반찬에 복분자 정상주까지 곁들이니 직녀봉이 근사한 오찬장이 되었다. 더구나 추위를 무릅쓰고 힘들게 오른 산 위에서 다정한 친구들과 함께 먹는 밥맛이라니!

“이 봉우리가 직녀봉이면 견우봉도 있을 법한데?”

일행 한 사람은 아무래도 견우봉이 궁금한가 보다. 직녀봉에서 점심을 먹고 능선길을 타고 내려오는 길에 정말 견우봉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직녀봉이 있는데 견우봉이 없으면 말이 안 되지.”

일행은 예상했던 대로 견우봉을 만난 것이 그리 기쁜 모양이다. 견우봉을 거쳐 조안면 봉안리 골짜기를 왼편으로 내려다보며 걷는 능선길의 조망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하산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팔당댐
 하산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팔당댐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팔당호수는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호수 속으로 쭉 뻗쳐 들어간 곳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무덤이 있는 유적지다. 북동쪽으로 멀리 솟아 있는 산은 용문산이다.

능선길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전망 좋은 안부에서 멋진 풍경들을 살펴보는 것도 예빈산 등산만의 특별한 묘미다. 한쪽 산자락을 모두 차지한 천주교묘지를 거쳐 팔당 댐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니 산행시간은 4시간이 지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예봉산, #예빈산, #이승철, #시 한 수, #깔딱고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