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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시나가~ 어디 '똥'을 먹는데 방귀를 뀌나!"

설이었다. 부산에 모인 사촌들은 친목도모를 위해 국민 스포츠 '고스톱'에 임했다. 사촌형이 호쾌하게 11번 쌍피, 전문용어로 '똥쌍피'를 먹는 순간, 사촌여동생의 엉덩이에선 '외마디 비명'이 흘렀다.

방귀를 뀐 것이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똥을 먹는 순간 벌어졌으니 말이다. '소리가 큰 방귀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전통 상식도 무시했다. 냄새가 제법 독했다. 고스톱을 치는 사람은 물론 광 팔던 사람까지 패닉상태에 빠졌다. 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벌어졌다.

근데 이 풍경, 굉장히 낯설다. 사촌여동생은 20대 여성이다. 왜 이렇게 생소한가 했더니, 20대 여성이 방귀 뀌는 모습을 그날 처음 본 것이다. 나 내일모레면 서른이다. '삶의 모든 기초 세운다'는 이립(而立)의 나이가 되기까지 '왜 20대 여성이 방귀 뀌는 걸 못 봤냐'고 물으면 나도 할 말은 있다. 2남 중 장남이다. 남중 남고 나왔다. 여동생이나 누나가 있는 친구를 보면, 집에 엄마 아닌 여자와 함께 산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하다. 

그렇게 여자를 모르고 살았다. 여자는 방귀도 안 뀌는 줄 알았다(물론 엄마 빼고). 이런 나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주어졌다.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에 가게 된 것이다. 자취방은 고사하고 (친척 제외한) 외간 여자가 사용하는 방에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나였다.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 기획의 일환으로 1월 27일 노량진 옥탑녀의 집에 방문하게 됐다. 취재 목적이었지만 마음은 딴 데 있었다. 왜 그리도 설레던지, 온갖 핑크빛 상상을 하며 방문할 날만을 기다렸다.

'옥탑녀'도 방귀를 뀔까?

옥탑녀는 참 말이 많다. 버스 정류장에서 옥탑방까지 가는 길은 참 멀었다. 가는 동안 쉴 새 없이 지저귄다. "우리 동네가 좀 으슥해요", "이 슈퍼가 제가 만날 가는 데예요",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계속 입을 놀렸다.

물론 경청하지 않은 내 잘못이 크다. 하지만 처음 여자 방에 가는데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긴장과 설렘 때문에 옥탑녀의 속사포 같은 목소리는 설 특선 영화의 욕설처럼 '무음 처리' 됐다.

어떻게든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해보려고 옥탑녀는 무던히 노력했다. 외간 남자, 그것도 보통 이상 체격의 곰 같은 놈을 자신의 공간에 데리고 가는데, 천하의 옥탑녀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을 터. 옥탑녀는 사투리 듬뿍 배인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걸어왔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건 '무관심'과 '냉소'뿐, 내 마음은 딴 데 가있었다.

'옥탑녀의 방에선 무슨 냄새가 날까?', '옥탑녀도 방귀를 뀔까?'

최신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테스트에서 16점(24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을 획득한 나답게 저런 이상한 생각들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옥탑방에 당도했다. 

고풍스러운 빌라였다. 뉘렌베르크의 고성와 같은 모습으로 웅장하게 서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가파른 옥외 계단을 힘겹게 올라가야 진정한 옥탑이 아니었던가. 옥탑녀의 방으로 가는 길은 아늑한 실내계단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구가 '나를 알아보고' 자동으로 환하게 비춰줬다.

초반부터 고비였다. 반지하는 세 계단만 '내려가면' 되는데, 옥탑은 4층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3층쯤 오르니 숨이 가빠졌다. 옥탑녀에게 나의 '저질' 체력을 들키지 않으려 숨을 멈췄다.

문이 열렸다. 신세계가 펼쳐지듯 빛이 환했다. 드디어 그녀의 보금자리 옥탑방이 내 눈에 들어왔다. 동공이 확장됐다. 내가 처음으로 혼자 사는 여자 방에 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꺄악~" 부엌에서 들려오는 옥탑녀의 비명소리

옥탑방 내부 전경. 정말 넓다. 이종격투기를 해도 될 정도다.
 옥탑방 내부 전경. 정말 넓다. 이종격투기를 해도 될 정도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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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 광활함에 놀랐다. 이건 방이 아니라 '광야'다. 천고 뒤에 오는 초인을 부르면 백마 타고 등장할 정도다. 거의 반지하의 세 배다.

'킁킁~', 우선 향기를 음미했다. 앗! 이건 내가 상상했던 여자방의 향기가 아니다. 지하 식당가에서 흔히 맡던 그 냄새, 생선 굽는 냄새였다. 상큼한 향기 대신 매캐한 '냄새'가 날 반겼다.

'아, 여자방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환상이 20% 정도 깨졌다. 고개를 돌리니 옥탑녀 기사에서 종종 등장했던 '곰'이 늠름하게 서 있었다. 자식, 나랑 많이 닮았다. 겨울이라 그런지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곰! 춥지? 모자 씌워줄게"하며 곰과 대화하는 옥탑녀의 모습이 상상된다. 

옥탑녀의 말 상대 '곰'이다. 고장난 보일러 제어기를 들고 있다.
 옥탑녀의 말 상대 '곰'이다. 고장난 보일러 제어기를 들고 있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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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은 무언가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바로 '보일러에게 뺨맞다' 기사의 주인공, 보일러였다. 순직한 보일러의 파편을 보며 매일 '이젠 삽질 하지 않겠습니다' 다짐한단다.

"꺄아악!"

순간 부엌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문을 여니 연기가 자욱했다. 싱크대엔 까맣게 탄 신문지가 허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옥탑녀는 다급히 소리쳤다.

"불났어요!"

소리치면서도 할 건 다 했다. 물 틀어 불을 끄더니, "프라이팬 뚜껑이 없어서 신문지로 덮어 놨더니 불이 붙네요"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기사로만 접하던 '삽질'을 직접 눈으로 보니 신기했다. 보일러 파편을 보며 한 다짐도 그다지 소용없나 보다. 환상은 이제 반 정도 깨졌다.

처참한 화재의 현장.
 처참한 화재의 현장.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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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 옥탑방... 반지하야 미안해!

불까지 내가며 만든 '직화구이 삼치'가 완성되자 오붓한 밥상이 차려졌다. 삼치 껍질이 다 벗겨졌다. 지난 장보기 기사에서 맛객님이 댓글로 생선 달라붙지 않게 굽는 비법을 전수하셨는데 제대로 안 봤나보다.

반지하의 음습한 육식 위주의 식단과는 사뭇 달랐다. 푸른 채소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옥탑녀는 열심히 쌈을 싸먹었다. 채소를 좋아한단다.

옥탑녀가 차린 밥상. 푸짐하다.
 옥탑녀가 차린 밥상. 푸짐하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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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에 물 묻히기 싫어서 밥 한 숟가락 먹고 상추를 따로 먹었다. "어때요? <꽃남> 김현중 같나요?"라며 옥탑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화재 사건 이후 이완됐던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묵묵히 서로의 밥그릇을 비울 뿐이었다. 다시 '긴장 모드'에 접어들었다.

식사를 한 후 본격적으로 옥탑방을 탐닉, 아니 탐색했다. 우선 창문을 열었다. 저 멀리 교회 십자가와 '박X스' 등 각종 광고판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러웠다. 반지하에서 창문을 열면 옆집 담벼락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니 파란 하늘모양의 천이 보인다. '자유에 대한 갈망' 따위의 심오한 뜻이 담겨있어 보였다. 그 의미를 물었다.

"그거요, 아무 의미 없는데요. 그냥 동생이 만들어줬어요."

하늘 그림. 이건 옥탑방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반지하에 기증하라!
 하늘 그림. 이건 옥탑방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반지하에 기증하라!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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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거운 답변이 돌아왔다. 허탈해졌다. 창문만 열면 하늘을 볼 수 있는 양반이 하늘 그림까지 걸어 놓다니, 참 팔자 좋다. 섬유미술을 전공하는 동생 만들어준 그림천이 벽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지하 벽에 걸린 거라곤 시계가 전부다. 초등교육을 전공하는 내 동생이 '급' 원망스러워졌다.

그림 천 말고도 많은 소품들이 옥탑방을 채웠다. 로봇 피규어 '강철이'와 '곰'을 필두로 한 각종 인형들이 옥탑녀와 동고동락하고 있었다.

센스 있는 마감처리도 돋보였다. 지저분한 전기 콘센트를 양주 박스에 넣어 깔끔히 정리해 놨다. 각종 전깃줄이 똬리를 틀고 있는 반지하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형광등 스위치에 리본도 달았다. 순간 내 반지하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역시 여자방은 다르구나'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환상 가질 만했다. 깨졌던 환상이 도로 다시 생겼다.

기대했던 방귀도 끼지 않았다. 아깝다. 고구마라도 사갈 걸.

웃고 있는 수세미, 리본 스위치, 콘센트 정리 박스. 옥탑녀의 세심함이 엿보인다.
 웃고 있는 수세미, 리본 스위치, 콘센트 정리 박스. 옥탑녀의 세심함이 엿보인다.
ⓒ 김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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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는 길... 옥탑녀의 솔깃한 제안

한 시간여의 옥탑방 견학을 마쳤다. 옥탑녀는 나를 배웅했다. 골목이라 가는 길이 으슥했다. "세상도 뒤숭숭한데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동네 사람들이 정말 착해요. 저는 우리 동네랑 옥탑방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꿈 이루고 돈 벌어서 나갈 때까지 옥탑방에서 계속 살고 싶어요."

말하며 또 배시시 웃는다. 꿈을 위해 고향 떠나 옥탑에 살고 있는 그녀.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보일러에 뺨도 맞았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웃는다. 불이 나도 웃는다. 힘들 때면 '곰'과 대화하면서 이겨낸다. 그렇게 조금씩 옥탑방에서 꿈을 이뤄가고 있다.

"나중에 날 풀리면 옥상에서 삼겹살 구워 먹어요!"

솔깃했다. 날씨가 얼른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태그:#옥탑방, #반지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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