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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체 : 2일 밤 11시 55분]

 

"땅의 구석구석이 폭력의 도가니오니, 하느님, 일어나소서." (시편 74장 20절)

 
지난해 '광우병 쇠고기' 정국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을 앞장서 보호했던 신부와 수녀들이 다시 한 번 십자가와 촛불을 들고 나섰다. 지난 달 20일 새벽 서울 용산에서 희생된 철거민들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대표 신부 전종훈)은 2일 저녁 7시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시국미사를 열고 '용산 참사'의 진상규명과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날 시국미사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와 수녀 100여명, 시민 1000여명이 함께 촛불을 들었다. 사제단 중에는 푸른 눈의 외국인 신부도 끼어 있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은 고인들의 영정을 들고 맨 앞줄에 앉았다.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와 진보신당 심상정, 노회찬 공동대표도 자리를 지켰다.
 
시국미사 현장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준비한 16개의 만장이 등장했다. 만장에는 "인색한 부자야,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갈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무대 정면에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뜻이 담긴 펼침막이 올려졌다. 정의구현사제단은 펼침막에 '시편 74장 20절'과 함께 "네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는 성경 구절을 인용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시국미사 강론을 통해서도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경찰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강론에 나선 김영식 신부는 "그리스 신화의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는 이 세상에 불을 가져다줬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죽음만을 가져다줬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비난했다.
 
김 신부는 고 이성수, 윤용현, 이상림씨 등 용산 참사 희생자들 5명의 이름을 소리 높여 일일이 부른 뒤 "공권력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불시에 하직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친다"며 "이명박 정부의 잔혹하고 무지막지한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깨닫게 해준 그분들을 열사라고 부르자"고 호소했다.
 
이어 김 신부는 "이 대통령이 임기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숭례문이 불탔다, 이제 1년을 정리하는 시점에 대통령과 정부는 철거민을 불태워 죽였다"며 "남은 4년이 지금과 같다면 이 대통령과 정부를 국민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자"고 말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시국미사 마지막에 발표한 성명에서도 이 대통령과 경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들은 "오로지 몇몇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생존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는 헌법에 나와 있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며 "용산 참극에서 나타났듯이 국민을 국민으로 대하지 않고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성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어 "반성하지 않는 경찰과 진실을 감추는 검찰을 두둔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더욱 우리를 슬프고 울분에 떨게 만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은 4년이 지금과 같다면 이 대통령을 마음속에서 지워버리자"
 
정의구현사제단의 강론과 연설 사이사이마다 좌중에서는 박수와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유족 대표로 시국미사에 참석한 권명숙(고 이성수씨 부인)씨는 진상 규명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권씨는 인사말을 통해 "참사의 피해자인 철거민들을 가해자로 몰아붙이는 검찰 조사를 시국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막아 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고 서민을 위한다고 해서 우리 편인 줄 알았더니 이건 아니다"라며 "왜 철거민들을 살인자로 만드느냐"라고 울부짖었다.
 
밤 9시 청계광장 시국미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명박 타도, 석기 구속" 등 구호를 외치며 청계천을 따라 명동성당까지 행진했다. 십자가를 든 신부와 수녀들이 앞장선 대열은 밤 9시 30분께 을지로입구역 사거리에서 경찰에 가로막혔다.
 

신부들은 "명동성당까지 행진로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인도로 행진해야 한다"며 인도로 향하는 길만 열어둔 채 차도 행진을 허용하지 않았다. 격앙된 신부들은 "현행법을 어겼다면 신부들도 다 잡아가라"며 교차로 한복판에 멈춰 섰다.
 
경찰과 정의구현사제단이 대치하면서 현장에는 한때 긴장감이 높아졌다. 경찰은 "신부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하느냐, 애초 약속대로 인도로 행진하라"며 여러 차례 경고방송을 내보냈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이 움직이지 않자 경찰은 "모두 연행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결국 밤 10시 30분께 경찰은 병력을 동원해 대열을 인도로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참가자들이 넘어지면서 다치기도 했다.
 
 

경찰에 밀려 인도로 올라선 시국미사 참가자 300여명은 그대로 명동성당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밤 11시 명동성당에 도착한 이들은 곧바로 해산했다.
 
김인국 신부는 마무리 발언을 통해 "용산 참사의 진실도 사제단이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며 "국민을 속이고 목숨을 다한 자는 없다, 우리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국미사 참가자들과 경찰이 대치한 을지로입구역에서는 현장을 채증하던 경찰관 1명이 시위대에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또 행진 과정에서 양아무개(50)씨 등 3명이 폭행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노원경찰서로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이날 사제단이 발표한 시국 선언문 전문이다.
 
"'환난상휼'과 '공생공락'의 믿음을 깨뜨린 죄"
 
<재앙과 파국의 대한민국>
 
"헤로데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이리하여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2,16-18)
 
세상과 동고동락해야 할 교회의 운명
 
1. 대한민국에 벌어지고 있는 엄청난 일들을 괴로운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을 나눠서 그야말로 동고동락해야 하는(사목헌장1항) 교회의 운명을 새삼 무겁고 절박하게 깨닫습니다.
 
2. 용산 참사는 과연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파국의 종점은 어디인지 국가구성원 모두에게 질문과 충격을 던진 무서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제들은 대한민국에 덮친 재앙과 불행의 현실에 대해서 경고와 호소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공권력에 대한 근본 질문
 
3. 먼저 국가와 공권력의 존재이유를 따져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공적인 것(Res publica)은 바로 국민의 것(Res popoli)라는 대원칙을 성립시키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입니다. 국민의 생명과 행복을 위하는 바른 정치가 공화국 탄생의 근본 동기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몇몇 부자들을 위해 대다수 국민의 생존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용산 참극에서 나타났듯이 국민을 국민으로 대하지 않고 서슴없이 폭력을 저지르는 이명박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성을 잃어버렸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경찰과 진실을 감추는 검찰을 두둔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은 더욱 우리를 슬프고 울분에 떨게 만듭니다. 유감스럽지만 1987년 어느 대학생의 죽음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했던 일 하나로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려야겠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행복은 물론 생명마저 서슴없이 빼앗고 또 이를 법률, 질서, 공권력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면서 이에 항의하는 연대를 외부세력, 테러집단, 좌파로 규정하는 현실을 우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불안과 염려
 
4. 도대체 대한민국을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것입니까? 사방에서 들려오는 통곡과 비탄 그리고 한숨소리에 우리 사제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국민 분열의 죄
 
4-1.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것도 대통령의 책임이지만, 함께 가난해지고 함께 넉넉해지는 '환난상휼'과 '공생공락'의 믿음을 깨뜨린 죄는 더욱 무겁습니다. 하필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부자들의 세금을 우선 걱정하고, 의혹과 우려를 윽박질러가며 극구 미국축산업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편드는 등 국민의 마음에 불신과 분열의 상처를 낸 일은 일일이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잦은 거짓말이 불신의 병을 키웠습니다. 손바닥 뒤집듯 대담하고 뻔뻔하게 말을 바꿀 때마다 국민의 자존심은 무참히 짓밟혔고, 대한민국은 양심과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배려와 연대, 참여와 책임, 정의와 중용처럼 금세기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완전히 무너졌고, 반대로 반칙과 불공정, 편법과 탈법 등 강도의 윤리가 득세하는 도덕 파탄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왜곡과 폄하의 죄
 
4-2. 가장 뻔뻔스런 거짓말은 역사 왜곡입니다. 건국 60년을 운운하고 4.19 혁명을 데모라고 깎아내리며 동영상 교과자료에서 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6.10 항쟁은 언급도 하지 않는 등 한국사회가 희생과 투쟁으로 일궈낸 귀중한 역사를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런 파렴치한 기세라면 헌법이 명시하는 3.1 운동과 4.19 혁명의 민주이념마저 부정하여 국기를 흔들 것이며 사찰과 도청, 감시, 연행과 고문 등 민주 양심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설 것이 분명합니다.
 
민족분열의 죄
 
4-3. 화해와 상생의 남북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린 일은 이명박 정부가 저지른 숱한 실정 가운데 가장 절망스런 일입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조롱거리이며 민족공동체 앞에 중대한 범죄입니다. 급기야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모든 합의사항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까지 폐기될 지경입니다. 남북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이르렀는데, 경제위기에다 전쟁위기까지 불러일으키면서도 남북 관계쯤 망해도 좋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니 통탄할 노릇입니다.
 
민주주의 파탄의 죄
 
5. 현 집권세력이 원하는 궁극적 목표는 민주주의의 근본토대를 완벽하게 붕괴시킴으로써 부당한 권력을 영구히 사유화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통의 도구인 방송과 인터넷 장악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공영방송과 은행 등 각종 공적인 가치들을 재벌이나 족벌신문에게 나눠주려는 무수한 음모를 보고 있으면 불과 십년 전까지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들던 독재 권력들의 뿌리 깊은 악행들이 되살아난 듯 섬뜩할 따름입니다.
 
선언과 호소
 
6. 어린이와 젊은이들의 꿈을 빼앗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가치관의 일대 혼란을 불러일으킨 이명박 정부의 과오는 하느님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중대한 범죄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은 거룩한 분노로 맞서 저항할 것입니다.
 
7. 신앙의 소명과 역사의 책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사제들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도 공권력과 나라의 장래를 언제까지 맡기고 인정할 것인지 함께 고뇌를 나누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양들의 침묵일 뿐입니다.
 
8. 한국사회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교만과 탐욕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통치자에게 더 이상 사람의 길, 생명의 길, 사람의 길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수 없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되찾읍시다.
 
2009. 2. 2 주님봉헌축일에

태그:#용산참사,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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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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