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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리앙 학교에서 우린 두 번의 환영식을 받았다.

한 번은 9월 달에 처음 스터디 트립차 들어갔을 때고, 두 번째는 11월에 두 달간 교육을 위해 들어갔을 때다. 그 때마다 아이들은 언제나 여러 악기들을 대동해서 신나는 행진 음악을 연주해주며 우리를 맞이했다. 이 후, 아이들과 캠페인을 하건, 캠프를 진행하건 언제나 음악을 연주하는 행렬은 최선두에 서곤 했다.

태국 국가와 몇 몇 행진곡이 신나게 연주되는 풍경, 그런데 그 이면에는 몇몇 사실들이 숨어있었다.

고쳐놓은 악기의 모습, 아마 선생님들이 결심하지 않아도 아이들 스소로 해낼거라 믿는다
 고쳐놓은 악기의 모습, 아마 선생님들이 결심하지 않아도 아이들 스소로 해낼거라 믿는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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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 곳 하나 없는 악기, 알고 보니 선생님도 없어

태국 북부, 족히 20여군데의 학교들을 돌아다녀 본 우리 팀. 왕리앙 학교의 연주는 평범한 수준이었다. 어느 학교나 우리가 방문하면 항상 음악 행진이 있기 마련이었고, 잘 알아듣진 못하지만 '음악대'에 대해 신나게 설명하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왕리앙 학교엔 그런 광경을 볼 수 없는지 궁금했다.

"우린 그런거 없습니다."

'쏨싹' 교장선생님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서 두 가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린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가 첫 번째, '너 여기까지 신경쓸래?'가 두 번째 였다. 첫 번째는 우리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두 번째 반응은 머문지 한달 반 정도가 넘어갈 때 시작된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비판의 목소리를 가했기 때문이다. 잘 한다고 했던 일이 점점 선생님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탓이었다.

그런데 이 음악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애초에 선생님들한테 모든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하긴 그동안 우리가 이것저것 들쑤시고, 은근히 선생님들의 일을 늘려놓았으니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은 아이들이 아침마다 악기를 꺼내오는 곳을 몰래 들어가 보았다. 창고같은 곳엔 수많은 악기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나머지 사용하는 것 역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양 악기와 태국 전통 악기를 모두 합쳐 세보니 40여개. 고치는 돈 부터가 장난이 아닐 것 같다. 벽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능' 영어선생님이 들어왔다.

"고, 우리 학교엔 음악 선생님이 없어요. 악기를 고쳐놓은 들 근본적인 해결이 안되는 거예요. 관리할 사람도, 지도할 사람도 없는거죠"

"아니, 유치원에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있는데 왜 음악선생님이 없어요? 악기 수를 보니까 그 전엔 있었던 것 같은데?"

"예전엔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이유는 나도 몰라요."

결국 '능' 선생님의 말로 답답함만 더해갔다.

점심시간, 람푼 지역에서 악기를 배울 때 4만원 정도 들여서 산 '씅(태국 전통악기,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다)'을 만지작 거리고 있자 아이들이 내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자기들이 대부분 씅을 칠 수 있다고 말했다. 덥석 잡는 손길, 곧 '로이끄라통(태국의 전통 축제 이름, 노래도 따로 있다)' 한 곡이 뽑혀나오더니, 태국의 전통 노래 몇 곡이 아이들의 손을 건너건너 나오기 시작했다.

"나 그거 잘쳐. 한 번 해볼까?"

손발을 다 섞어가며 말한 결과, 다른 태국 전통악기도 아이들 대부분 조금씩 연주가 가능하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없어서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잡았다. 치앙마이 YMCA 피페 매니져한테 말했다.

"매(엄마를 뜻하는 태국어), 나보러 한 번 와야겠어요!"

벽면을 꾸민 모습.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
 벽면을 꾸민 모습.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 그렇게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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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내, 보다보다 저런 사람들 처음입니다"

"매, 내가 마을에 있을 때 마을 어르신들 중 태국 악기 연주실력이 수준급인 사람을 몇 명 봤어요. 그 분들이 주에 한 번씩만이라도 와서 아이들을 가르쳐주면 되요. 애들은 대부분 악기를 다를 줄 아니까요. 그리고 악기 관리는 힘들어도 학교 선생님들 중 한 명이 하면 되요. 대신 내가 다 치우고 다 꾸며줄께요. 재산대장도 만들어줄거고!"

이렇게 피페 매니져가 들어오자마자 말을 한 보따리 클러놓았다. 딴 사람은 내가 이렇게 말을 끌러놓으면 수습하려 하는데 피페 매니져는 그저 내 말대로 이루어지게끔 하기위해  움직여주기 시작한다.

"'참 내, 보다보다 저런 사람들 처음입니다'라고 선생님들이 그런다. 네가 일을 할수록 선생님들 일이 느니까 조금 힘든가봐. 그럴 수록 잘해야지. 고, 이건 처음이 중요해. 잘 꾸미고 틀을 잘 만들어줘야지 우리가 이 마을에서 빠지더라도 이 형태가 유지된다고. 잘 할 수 있지?"

결국 죽음 음악교실은 그렇게 되살리기도 결정이 되었다. 물론 몇 일동안 아이들이 악기를 만지작만지작 거리며 선생님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 음악교실의 모습, 이것도 어느 정도 치워낸 모습이다.
 처음 음악교실의 모습, 이것도 어느 정도 치워낸 모습이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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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것 여기까지에요"

피페 매니져가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전통악기 8개 수리되서 오고, 어떻게 관리하고 운영할 것인지 선생님들이 논의하기 시작했다.

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창고같은 곳을 치우기 시작했고, 오후쯤 되자 더없이 깔끔한 공간 하나가 완성되었다. 섬세한 팀원들이 악기실 비슷한 형태로 꾸미기를 시작했고, 왕리앙 학교에서 우리가 활동한 사진들이 한쪽 벽면에 붙기 시작했다.

악기의 사진을 찍고 재산대장을 만들던 날, 난 그 이상의 일을 진행하지 않고 정지시켰다. 처음엔 악기실을 연 후 아이들과 함께 연주회라도 한 번 하려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정한 사항이었다.

우리가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변화가 없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죽은 음악교실을 건드릴 때 우리에게 보인 태도는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행동을 너무 많이 한다는 암묵적인 경고이기도 했었다. 결국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최종행보는 현지인이 하게끔 해야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서 만든 것이지만, 최종 산소호홉기를 떼는 것은 이 학교의 주체들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왕리앙 학교를 떠나기 전 날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몰래 연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분명히 호홉기가 떼질거란 생각은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중학교 3학년 '뱅크'와 2학년 '뚜이'가 오토바이를 타다 심하게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방과후 별다른 놀거리가 없으니 오토바이를 탄 것이다.

'돈을 맹목적으로 준 것도 아니고, 불쌍함에 몸들바를 모르다 시설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아주 소액에 돈으로 최소 몇 년 이상은 아이들의 인성에 도움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니 그렇게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

오늘도 제멋대로 봉사자의 자기 위로는 이렇게 합리화(?)의 과정을 겪고 만다.

덧붙이는 글 |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1월 20일 태국 팀은 귀국했고, 마지막 일정 중 여의치 않은 인터넷 사정 탓에 귀국 후 기사 몇 개를 더 송고합니다. 감사합니다.



태그:#라온아띠, #YMCA, #KB, #해외봉사, #음악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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