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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부터 일지매는 청계천 옆 고층건물을 타고 내려와 괴한들에게 잡혀있는 여성을 구출한다. 그리고 빌딩숲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는 일지매는 최신형 자동차로 요란하게 도시를 질주하는 ‘배트맨’보다 더 멋지다.
 
도시가 떠나갈 듯한 엔진소리를 남기며 떠난 배트맨과 달리 일지매가 사건 현장에 남기는 건 매화꽃뿐이다. 배트맨은 부유한 재산과 자신의 성까지 갖춘 ‘있는’ 영웅인 반면, 일지매는 무술로 단련된 몸과 정의로운 마음말고 가진 것 ‘없는’ 영웅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로 밤에 활동하는 은둔형 자객스타일이며,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라는 외로운 영웅이라는 것이다.

‘돌아온 일지매’는 독특한 구성의 사극으로 현재와 과거가 수시로 교차한다. ‘돌아온 일지매’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서 일지매의 활약상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의 납치범과 싸워야했던 일지매는 무자비한 괴물같은 불가사리와 대결한다. 한 눈에 봐도 호리호리한 일지매가 거구에 힘까지 장사인 불가사리와 싸우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일지매는 뛰어난 무공으로 나비처럼 날아서 불가사리를 단숨에 제압한다. 현대와 조선시대를 오가며 활약하는 일지매의 모습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악당이 기승을 부리는 건 조선이나 요즘이나 비슷하고 그럴수록 일지매의 존재가 커질 수 밖에 없다. 경찰이나 포도청이 해야 할 일을 일지매가 하는 건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얘기다. 도둑과 탐관오리가 판을 쳤던 조선 인조시대는 일지매가 활동하기엔 최고의 조건이다.

 

일지매가 필요할 정도로 2009년도 혼란스러운 시기인가. 국가경제가 파탄에 빠지고 철거민이 옥상에서 불타 죽고 대통령 지지율이 20퍼센트를 맴돌 정도로 정치적으로 불안하면 일지매가 나타나더라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몇 개월 전에 일지매가 등장한 바 있다. 일지매는 불행한 시대의 아이콘이다. 일지매의 상징, 매화는 추운 겨울날 피는 꽃이다. 어려운 시대에 아름답게 태어난 일지매의 운명과 비슷하다.


불행하게 태어나서도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좌절하지 않고 그 힘으로 악당을 응징하고 약자를 돕는 건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일지매는 출생부터 버림받은 운명이었고 세상을 떠돌며 삶을 배운다. ‘돌아온 일지매’라는 제목이 상기시키듯이 현대극의 일지매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현대의 일지매는 과거의 일지매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럴 수도 있고 일지매가 환생한 인물일 수도 있다. 돌아온 일지매는 과거의 일지매와 어떻게든 연결된다.교차 편집으로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진행되며 두명의 일지매는 서서히 하나의 인물이 될 것이다.


‘돌아온 일지매’의 독특한 배역은 ‘나레이션’이다. 고우영 원작에서 표현된 전지적 작가시점의 해설은 시대평이 담겨있다. 무성영화의 변사가 맡았던 역할처럼 어떤 장면에선 대사없이 나레이션만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이 나레이션이 단순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 그쳤다면 밋밋했을텐데 독특한 시각과 해석이 담겨있어 해학미가 있다. 작품 초반이라 나레이션이 과도하게 들어간 감이 없지 않으나 균형을 맞춘다면 새로운 형식미가 될 수 있다.


나레이션이 드라마의 전개에 방해를 하지 않는다면 재미있는 조연처럼 쓰일 수도 있다. 사극은 현대극과 달리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의 신분제, 정치적 배경, 일상문화같은 게 현대와 무척 달라서 현대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이상하기 마련이다.

 

설명을 자막으로 처리할 수도 있지만 나레이션으로 할 수도 있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같은 프로그램에서 쓰인 자막처럼 설명이 아닌 편집자의 의견이 과감하게 들어간 나레이션은 웃음을 준다. ‘돌아온 일지매’의 나레이션은 그런 면에서 설명과 의견의 중간 쯤에 해당한다. 시대배경에 대한 충분한 설명에 충실하면서 수줍게 논평을 날린다.


황인뢰 감독의 영상미는 탁월하다. 모던하게 정돈된 현대의 청계천에서 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전환된 장면은 묘한 대비를 보여준다. 유리로 된 건물벽을 빠르게 타고내려 오는 조선시대 복장의 일지매는튀지 않고 잘 섞인다. 화려한 액션장면보다 인물의 내면연기와 긴장감에 치중한 황인뢰의 연출은 색다른 맛이다.


‘돌아온 일지매’는 빠른 전개로 출생의 비밀과 시련은 한꺼번에 처리했다. 선달역을 맡은 강남길의 시점으로 정리될 책과 그걸 현대에서 읽는 윤진서의 고리가 어떻게 풀려갈지가 중요하다. 자칫 단순하게 일대일 대응으로 가게 되면 밋밋한 구성이 될 수도 있고 둘의 고리가 너무 복잡해지면 개연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과거와 현재 속의 일지매를 관찰하는 인물을 집어넣은 것은 나레이션과 겹쳐진다. 그리고 드라마 밖에서 일지매를 관찰한 시청자까지 고려하면 일지매에 대한 해석자가 다수가 된다. 다수 사이에 다른 해석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다투게 된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해 이런 구성을 택했을 수 있다.


나레이션을 다양한 해석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면 불편할 것도 없다. 나레이션의 권위를 걷어내고 시청자의 해석과 함께 다룬다면 흥미로운 대화가 될 수 있다. 나레이션이 일지매를 뭐라고 하든지, 선달이 일지매를 어떻게 서술하든지, 현대의 윤진서가 일지매를 어떻게 바라보든지 나만의 시각으로 일지매를 바라볼 수 있다. 드라마를 보는 순간 새로운 일지매가 태어난다.


태그:#돌아온 일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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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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