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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동 PD는 '순한' 사람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의 얼굴에선 '투사' 이미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상황이 아무리 거칠어도, 겉으로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좀체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말수도 적다. 수백 명 사원 앞에서도 늘 낮은 톤이다. 구호를 선창하는 일도 없다. 평소 대다수 후배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KBS PD협회장, 한국 PD협회장,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대표를 차례로 맡았다. 사원행동에 가입한 700여 명의 사원들은 그를 따라 '공영방송 사수' 외마디 구호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 탁월한 리더십보다는 의연한 결기로 KBS에 공영방송 깃발을 끝까지 지켜냈다.

하지만 해를 넘긴 2009년 1월 16일, '공영방송' KBS는 '공영방송 사수'를 외쳤던 그를 내쳤다. '파면'이다. 그에게 KBS의 모든 것을 잊으라는 강요다. 그는 전국 PD대회를 가던 택시 안에서 '파면'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2월 공영방송법 제정 분위기 조성 위한 사전 정지작업"

KBS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은 양승동 PD
 KBS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은 양승동 PD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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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4시 민주광장엔 200여 명의 PD들이 모였다. 이들은 외쳤고, 울고, 분노했다. "양승동과 징계당한 동료들을 반드시 되찾아 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늘 그렇듯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직금 중간 정산이라도 해뒀어야 했는데 한 번도 안했다"며 농담도 던졌다. "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성재호 기자는 한창 일할 땐데 해임이라니 기가 막히다"며 오히려 후배를 걱정해 줬다.

양승동 PD를 18일 저녁, 여의도 근처 한 맥주집에서 인터뷰했다. KBS 본관에서 나와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그리고 인터뷰 하는 내내 쉴새없이 위로 문자가 날아들었고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려는 동료 PD들이 100여 명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양 PD는 이번 사태가 "사원행동과 통합 집행부를 꾸리려는 노조를 향한 경고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2월 공영방송법 제정 분위기 조성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원행동은 공영방송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저항이었고 똑같은 상황이 와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라며 "KBS 노조가 현명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개인 복직 문제보다는 이렇게 KBS가 흔들리고 무너지나 하는 고민이 더 많다. 질기게 싸워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성재호 기자 해임됐다는 소식에 놀랐다"

양승동 KBS 사원행동 공동대표가 지난 9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사원행동 총회에서 이병순 신임 사장, KBS 노조와의 문제 등에 관한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양승동 KBS 사원행동 공동대표가 지난 9월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사원행동 총회에서 이병순 신임 사장, KBS 노조와의 문제 등에 관한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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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파면 결정이 났다. 통보는 언제 받았나?
"지난 16일 금요일에, 서울 수유리에서 전국 PD대회가 열렸다. 그날 '통보가 올 수도 있겠다' 얘기가 있긴 했다. 수유역에 내려 택시 타고 행사 장소로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 통보받는 순간 어떤 생각이 들었나?
"거의 행사장 앞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참석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런데 괜히 분위기만 썰렁하게 할 것 같아 김덕재 KBS PD협회장한테만 간단히 (파면 통보) 얘기했다."

- 파면 통보받고 그냥 '알았다' 하고 끊었나?
"별 말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성재호 기자가 해임됐다는 것에 놀랐다. 성 기자의 경우가 해임감인가? 기가 막히더라. 난 솔직히 20년 동안 직장 생활했다. 성 기자의 경우 한창 일할 땐데… 더 해야 하는데…  성재호 기자 생각이 가장 많이 나더라."

- '파면'은 최고 중징계다. 예상했나?
"'해임'도 아니고 '파면'이라니…  처음에는 좀 황당했다. 물론 '파면설'이 사측에서 흘러나왔지만 언론 플레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퇴직금 중간 정산이라도 해둘 걸 그랬다. (웃음)"

- 지난해 8월 상황의 책임을 묻는 징계가 이듬해 1월 중순에 내려졌다.
"인사위원회에 참석하라는 전화 받았을 때 든 생각이 '사원행동이 노조 참여하는 문제 때문에 그렇구나' 싶었다. 이른바 '통합 집행부' 구성에 대해 막판까지 진통이 계속되고 있는데 타이밍을 이때 맞췄구나 그런 생각… 사원행동과 함께 머리를 맞댄 노조를 우려스러워 한다는 사측의 얘기도 흘러나왔고… 사원행동을 노조에 참여시키지 말라고, 노조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본다. 정 사원행동이 노조에 들어가려면 일종의 '무장해제'를 하고 들어가라는… ."

"경영진 단독 결정? 다른 의도 있었을 것"

'공영방송 사수 KBS 사원행동' 양승동 대표(앞줄 오른쪽)와 사원들이 지난 8월 27일 오전 여의도 KBS본사앞에서 이병순 사장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공영방송 사수 KBS 사원행동' 양승동 대표(앞줄 오른쪽)와 사원들이 지난 8월 27일 오전 여의도 KBS본사앞에서 이병순 사장 출근을 저지하기 위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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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심 신청할 건가?
"2주 내에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절한 시기를 봐서 재심 신청할 것이다. 다음 주 중에 파면 해임 등 징계 대상자가 한 번 모이려고 한다."

- 재심 이후 결과가 번복될 가능성이 있나?
"인사위원회 들어가서 이렇게 얘기했다. '사원행동 대표로서 책임질 부분 책임지겠다. 하지만 언론인, 방송인으로서 양심과 상식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재심 열려도 난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니, 더 세게 얘기할 것이다. 나를 파면한 특별인사위원회 위원들이 내 선배들인데, 그들이 이런 독단적인 결정에 참여했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 재심 이후에도 사측의 태도가 변하지 않으면? 법적 투쟁까지 생각하고 있나?
"당연하다. 재심은 쉽지 않을 것이다. '파면'을 시켰는데, 난 이게 경영진 단독 결정이었을까 싶다. 사장도 여러 경로를 통해 부담스럽다고 했다는데, 사장 홀로 외로이 결단을 했을까? 사장 주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화합해야 한다 조언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격적으로 칼 뺀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 결국 파면에까지 이르렀다. 후회는 없나?
"PD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에 대학 다닐 때 형성됐던 가치관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사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하고 싶어서 KBS에 입사했다. 20년 가까이 PD로 일하고 프로그램 통해 뭔가 사회나 역사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프로그램 제작에만 매진했다. 처음에는 조직적 제약 때문에 쉽지 않더라.

그러다 2002년 무렵에 KBS 내에 제작 환경이 많이 열렸다. KBS에 뜻을 품을 당시 생각했던 프로그램을 드디어 만들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PD협회장 하면서 다시 그런 것을 제약하는 현실이 드러났고, 내가 할 역할이 뭘까 고민했다. 늘 다른 사람들을 추천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피하지 않았다. 내가 프로그램 제작할 때의 기본 자세와 정신을 계속 이으려 노력했다."

"사원행동 대표 피하는 건 비겁한 것이라 생각"

'공영방송 사수 KBS 사원행동' 소속 직원들은 지난 8월 26일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임 이병순 사장을 방송장악을 위한 '청부사장'으로 규정하고 27일부터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공영방송 사수 KBS 사원행동' 소속 직원들은 지난 8월 26일 여의도 KBS본관 민주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신임 이병순 사장을 방송장악을 위한 '청부사장'으로 규정하고 27일부터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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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순 KBS 신임 사장이 지난 8월 27일 오전 청원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취임식이 열리는 여의도 KBS본사에 들어간 가운데, 사복을 입은 청원경찰들이 공영방송사수KBS사원행동 직원들이 취임식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다.
 이병순 KBS 신임 사장이 지난 8월 27일 오전 청원경찰들에게 둘러싸여 취임식이 열리는 여의도 KBS본사에 들어간 가운데, 사복을 입은 청원경찰들이 공영방송사수KBS사원행동 직원들이 취임식장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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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원행동 대표 맡을 때 부담스럽지 않았나?
"노동조합이 지난해 6월 무렵부터 공영방송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결정적인 계기가 지난해 8월 8일이다. 신태섭 이사를 이런저런 이유로 엮어 결국 해임하고(공교롭게도 양 PD에 대해 파면 통보가 내려진 지난 16일, 신 교수는 1심에서 동의대측의 해임이 무효라는 판결을 받았다- 기자의 말) 새 이사 밀어넣고… 탈법적인 이사회를 열고… 그날 이사회장 앞으로 꽤 많은 사원들이 모였다.

그런데 경찰력까지 KBS에 들어오면서 결국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이 출범했다. 난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협회장들보다 고참으로서 더 책임감을 느꼈다. 20여 년동안 KBS 지켜온 사람으로서 여기서 회피하는 건 개인적으로도 비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KBS는 '보도자료'를 통해 징계 조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번 징계 대상자는 지난해 8월 경영진 교체 시기에 이사회 개최 등과 관련해 이사진에 대해 폭언과 함께 기물을 파손하고 근태처리 없이 집회에 참여하는 등 집단행동을 함으로써 이사회의 업무수행을 방해하는 한편 근무질서를 문란케 하고 직원으로서의 품위를 훼손한 직원들입니다. 이사회는 이와 관련해 이들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고 KBS는 사규상의 절차에 따라 특별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심의를 하였습니다.

- 사측이 발표한 '징계 조치 사유' 봤나?
"KBS 수첩에는 KBS 방송강령, 윤리강령이 나와 있다. 사원행동이 한 행동 중 저촉되는 게 없다. 자유언론 실천자로서 진실과 용기를 갖고 방송해야 한다는 내용인데 그걸 위배하지 않기 위해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될까? 그리고 그건 최소한의, 정말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우리가 몸부림쳤지만 이사회도 다 열었고, 결국 '저쪽' 뜻대로 다 되지 않았나? 그래도 그나마 언론인으로서, 공영방송인으로서 KBS 자존심과 명예와 품위를 지킨 것 아닌가? 진술서도 이렇게 썼다."

"이번 징계 조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
         
양승동 PD 등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의 징계에 항의하는 200여 명의 KBS PD들이 지난 18일 본관 계단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양승동 PD 등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의 징계에 항의하는 200여 명의 KBS PD들이 지난 18일 본관 계단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전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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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회사의 징계 조치가 노-노 갈등을 유발하는 한편으로 전체 사원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의미라는 얘기가 많다. 
"만일 그렇게 생각했다면 회사의 큰 착오다. 역사를 돌아봐도 KBS는 결정적일 때 모두 일어섰다. 기자, PD를 비롯한 우리 사원들의 수준을 사측이 너무 안이하게 보는 건 아닌가 싶다. 이런 식으로 무도하게 나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행동하게 마련이다. 기자 PD 아나운서 할 것 없이 끓어 오르고 있다. "

- 아까 결의대회장에서 발언을 통해 '더 큰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정권 차원에서 '지상파 이대로 둬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재벌과 족벌신문에게 지상파 뉴스도 허용하려 하지 않나? KBS 역시 '좀 관영방송화해야겠다'면서 공영방송법 준비하고 있다. 난 이런 차원에서 이번 징계가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내 복직 차원을 넘어서서 KBS가 더 걱정이다. 큰 틀에서 대응해야 할 문제다. 1~2주 끓어올랐다가 가라앉는 싸움 아니다. 큰 차원으로 보고 끝까지 질기게 싸워야 할 때다."

- 그렇다면 이번 징계 조치를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얘긴가?
"물론. 당연히,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 새 노동조합은 이미 출범 당시 '징계는 파국'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나?
"집행부의 의지가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위원장의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언컨대, 지금 노동조합이 현명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멈칫하고 아우르지 못하면 KBS가 비극적인 상황을 맞을 수 있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사원들이 뭔가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KBS를 위해서나 지금 KBS 노동조합을 위해서도 그렇게 돼서는 안된다."

- KBS 사원들에게 남길 말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책임질 만큼 책임지겠다고 얘기했었다. 사측에서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무도하게 할 줄은 몰랐다. 개인의 복직 문제 등은 법적 투쟁을 해야겠지만 난 KBS가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질까봐 걱정스럽다. KBS 사원들이 인식을 새롭게 할 때다. 떠나기 전, 이런 얘기를 사원들에게 들려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고품격 다큐멘터리 만들 기회 있었으면…"

"복직 후에는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냐"며 다소 성급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이른바 '보복인사'의 희생양으로 심의실에 근무중인 양 PD는 투쟁 지도자에 앞서 <역사스페셜> <인물현대사> <KBS 스페셜> 등을 만들어 낸 '스타 PD'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수상 경력도 꽤 된다. 

"하하 벌써 그걸?" 이라며 웃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물현대사> 같은 프로그램 만들 때 사실 아쉬운 게 많았다. 사람과 시간의 지원 받아서 좀 더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 만들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가 왜곡되고 은폐되면서 민주화가 지연된 사회 흐름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그것을 제자리로 돌리는데 약간의 기여는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좀더 조직적으로 움직여 이런 프로그램들을 더 빨리 내놨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은 있다. 내가 복직할 때쯤 되면 사회가 좀더 좋아져서 시사적으로 너무 예민한 거 안 해도 되는 환경이었으면 한다. 고품격 다큐멘터리를 만들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안갯속이지…."

인터뷰를 마친 뒤 양 PD가 인사위원회 참석 전 진술서에 썼다는 KBS 방송강령을 찾아봤다. 전문은 이렇게 돼있다.

우리는 이땅의 방송을 대표하는 KBS이다.
우리는 공영방송의 기능을 다해 국가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이바지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세계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높은 이상을 실현한다.
우리는 자유언론의 실천자로서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과 정직 그리고 균형을 바탕으로 한 공정방송을 성실히 수행한다.
우리는 전문 방송인으로서의 직업윤리를 준수하며 지혜와 용기를 다하여 품위있고 책임있는 방송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태그:#KBS, #양승동, #사원행동, #이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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