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앨런 무어 글, 데이비드 로이드 그림의 <브이 포 벤데타>는 당대 마거릿 대처 정부가 보였던 파시즘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2005년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되었다.
 앨런 무어 글, 데이비드 로이드 그림의 <브이 포 벤데타>는 당대 마거릿 대처 정부가 보였던 파시즘적 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2005년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에 의하여 영화화되었다.
ⓒ 시공사

관련사진보기

때는 어느 미래의 영국. 핵전쟁 이후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 상태가 되었다.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폭력과 혼돈의 공간에서, 마침내 정권을 잡은 이들은 파시스트와 우익 세력 정당 '노스파이어'였다. 그들의 슬로건은 이러했다.

"국력은 청빈으로, 청빈은 신앙으로."

강력한 정부를 이룬 그들은 집과 거리마다 감시, 도청 장치를 설치했고 경찰권력과 언론을 장악했으며 사회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흑인, 파키스탄인, 동성애자,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무자비한 박해를 받으며 찍 소리 못하고 박스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게 되었다. 공룡 교회와 장사꾼 성자들이 적극 달라붙어 도왔다. 인간의 영감과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어느 누구도 정부에 반대하지 못하며 무조건적인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는 독재 국가. 파시즘의 악령이 찾아온 것이다. 바로 <브이 포 벤데타>의 세계다.

흔히 만화라면 철모르는 아이를 병들게 하는 것이라 치부하기 일쑤인 한국에서, 만화책의 이야기를 짓는 앨런 무어는 초라한 괴짜로 보일 만하다. 그러나 앨런 무어는 그래픽노블 씬에서 이른바 '전설'로 일컬어지는 작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왓치맨>은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최고의 100대 소설에 꼽혔고, 실상 읽어 보자면 어른도 어려워 골치가 아프다. 그런 앨런 무어가 <브이 포 벤데타>를 마거릿 대처의 극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지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픽션다운 과장이 있지만 만화 속 파시즘의 세계는 대처리즘과 많이 닮아 있다. 사실 파시즘의 악령은 요즘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일상 안과 밖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특히 한국은 더하다. 숨 막힐 정도로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서구 땅덩어리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시민사회 영역이 튼실해질 여유도 없이 개인이 빠진 집단주의가 세를 불렸다. 전체주의가 나타나기 쉬운 땅이다. 과연 괴상한 향수에 빠져 옛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자는 이야기가 싱거운 농담이 아닌 진지한 논의가 되는 걸 보면 두려운 마음이 아니 들 수 없다.

사실 미치광이 혁명가 '브이(V)'의 이야기는 한국에 만화책보다 영화로 먼저 선보였다. 제임스 맥테이그 감독의 영화는 무척 재미나고 통쾌하여 거듭 돌려 보았다. 이비 역할의 나탈리 포트만은 왜 그리 예쁘단 말이냐. 그런데 외려 원작이 되는 만화책은 다르다. 영화보다 훨씬 복잡하고 음울하다. 이비도 못 생겼으니 절로 나탈리 포트만이 그리워진다. 그럼에도 내가 영화가 아니라 만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까닭은, 쉬이 희망을 말하지 않으며 쉬이 절망을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브이 포 벤데타>는 혁명의 이야기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는 안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혁명은 간단하고 유쾌하다. 그러나 혁명이란 정말이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뒤바꾸는 일이 마냥 즐거울 리 없다. 혁명에는 혼란과 폭력이 함께 따라온다.

<브이 포 벤데타> 괴짜 혁명가 '브이'는 모두가 잠자코 침묵하고 있을 때 반대를 외치며 나선 인물이다. 파시즘은 위로부터의 억압은 물론,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브이 포 벤데타> 괴짜 혁명가 '브이'는 모두가 잠자코 침묵하고 있을 때 반대를 외치며 나선 인물이다. 파시즘은 위로부터의 억압은 물론,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 워너 브라더스

관련사진보기


영화가 브이를 홀로 혁명하는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아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과 함께 '칙칙폭폭' 질주한다면, 만화는 브이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묵묵한 눈길을 준다. 그렇기에 때론 망연하도록 냉랭하다. 앨런 무어의 입담에 맞추어 데이비드 로이드가 그렸는데 컷 안에다 강렬한 라이트를 비추듯 명암이 뚜렷하다. 게다가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지 서걱서걱 소리가 날 법한 거칠고 건조한 질감이다. 일그러진 눈매와 주름진 이마, 치켜뜬 눈 그리고 구겨진 옷깃의 선 깊숙한 골짜기까지 까맣게 어둡다. 사각의 칸에 꾹꾹 어둠을 잡아내는 우직한 필선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죽는다. 그야말로, 1997년 11월 4일 운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파쇼 런던의 길거리다. 질식할 분위기다.

파시즘은 이성과 합리에 대한 맹신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졌다. 과학기술이 훌쩍 발달하며 인간 이성은 의심할 바 없는 진리처럼 여겨졌다. 다윈의 진화론이 우생학으로 활용되기는 금방이었다. 말하자면 세상을 향하여 이성의 찬연한 등불을 번쩍 비추자는 거였다. 세상을 환하게 밝히면 숨을 곳 없게 되고 사람들은 오로지 올바로 살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성의 칼날은 규격에 맞지 않는 이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렇게 세상의 세균들을 박멸하는 파시즘의 세상이 왔다. 사람들은 환하게 밝혀진 공간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몸과 마음을 따로 버리며 살게 되었고, 미처 빛이 닿지 않았던 구석은 더욱 어두워져 죄악이 득실거렸다. 그리고 등불을 비추던 이들은 스스로에게는 빛을 돌리지 않고 어둠에 숨었다. 지배자의 허약한 내면은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을 부추기게 되었다.

문제는 민중 스스로가 그런 폭력과 박해를 달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노스파이어'의 슬로건을 두고 무조건 잘 살게 해 줄 거라며 거의 광신적인 지지를 보냈다. 괴로운 사실이지만 바로 민중이 독재자를 뽑았다. 그렇게 이성은 비이성을 낳았고 너무 밝아서 어두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세상이 되었다. 거기서 홀로 반란의 기치를 세우는 이가 바로 브이다. 그이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썼고, 툭하면 셰익스피어의 글을 읊어대고, 음악과 그림에 환장하고 있으며, 펜싱과 장미를 좋아한다. 무엇보다 브이는 비이성과 비합리의 인간이다.

괴로운 사실이지만 바로 민중이 독재자를 뽑았다.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는 파시즘을 싹트게 하고, 광신적 지지는 싹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한다.
 괴로운 사실이지만 바로 민중이 독재자를 뽑았다. 권력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는 파시즘을 싹트게 하고, 광신적 지지는 싹을 무럭무럭 자라나게 한다.
ⓒ 워너 브라더스

관련사진보기


<브이 포 벤데타>는 혁명의 이야기지만 함부로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혁명은 어렵다. 평소 정부의 대국민 선전 방송을 듣던 시간, 그러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브이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영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열변을 토한다. 지금 엄혹한 독재 정권을 당신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당신은 기개도 긍지도 없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로 당신이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를 뽑았다고, 그래도 당신이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진짜 끝장이라고, 민중의 목소리를 내라고 이야기한다. 브이는 이길 수 없는 적들과 홀로 싸우며 시대의 좌절을 돌파하고 있다. 그러나 브이는 홀로 승리하지 못할 걸 안다. 당연하다. 해방이란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킬 때 비로소 진정하고 온당하다. 누가 다른 이의 족쇄를 대신 풀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해방이 아니다.

다만 브이는 민중에게 열쇠를 주었다. 오직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 뿐 구세주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선언하듯 사라진 브이의 자리에는 광장에 우두커니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남았다. 그들 모두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걸로 민중은 족쇄를 풀어버릴 수도, 족쇄를 다시 채울 수도 있다. 옛날 민중은 똑같은 선택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 퇴보할 것이냐, 진보할 것이냐. 그때 그들은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선택했었다. 또 그러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왔다.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겠다. 다만 언제 어디서나 분노와 비탄이 있는 땅이라면 결코 '브이'는 죽지 않고 살아있으리라는 걸 확신한다. 누군가 메마른 모래땅에 외로이 피어나는 자유의 장미를 발견하게 될 테다.

"언론은 정부의 손아귀에 있는 피아노가 되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나치 독일 제3제국 선전장관

"생각 없이 사는 일상적 삶이 악의 근원이다."
- 한나 아렌트, 정치 이론가

"넌 감옥에 있었어, 이비. 그들은 네게 신념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 중 하나를 고르라고 제안했지. 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어. 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섰고 차분하고 고요했어. 감옥의 문이 열렸어, 이비. 네가 느끼는 건 바깥의 바람일 뿐이야. 겁내지 마."
- 브이 포 벤데타


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시공사(만화)(2008)


태그:#브이 포 벤데타, #파시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