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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이름 지었다는 수심교를 건너면 백담사로 갈 수 있다.
▲ 백담사 전경. 전두환이 이름 지었다는 수심교를 건너면 백담사로 갈 수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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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설악 골짜기, 청봉에서 시작된 계곡을 따라 백 개의 담(潭)이 있고 그 마지막 자리에 절집 하나 세워졌다. 역사는 깊되 이어진 화마와 전쟁으로 수난의 시대를 보낸 그 절집은 조계종 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로 이름 올려진 백담사다.

절집에 이르기 전 온갖 욕심 비워지는 백담 골짜기

우리나라의 대표적 오지 절집인 백담사 마당엔 눈이 가득하다. 전각을 따라 사람의 발길이 지나간 곳만 길이 나있고 다른 곳은 눈밭으로 남아 있다. 눈은 영하의 날씨로 표면이 솔아있다(눈 표면이 얼어있음). 발로 밟으면 얼음이 꺼지듯 바직바직 소리를 내며 깨어지는 눈길을 걷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다.

90년대 전까지 백담사는 은둔의 절이었다. 청정도량이었고, 득도의 세계를 맛보기 위해 숱한 운수납자들이 백담사 골짜기로 찾아 들었다. 찻길마저 없어 걸어서 두어 시간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만나는 절집. 절집에 이르기 전 오욕칠정과 헛된 마음이 다 비워진다는 백담사는 겨울을 맞고서야 고요함을 되찾았다.

지난 해 12월 22일 내린 폭설로 백담사는 차량 출입이 통제되었다. 15분 간격으로 출발하던 백담사행 마을버스는 긴 동면에 들어갔고, 버스가 다시 시동을 걸려면 적어도 3월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백담사에겐 이 겨울이 안식의 시간인 것이다.

간혹 눈길을 오르는 차는 국립공원관리소 차량이거나 백담사로 부식을 실어나르는 트럭이다. 빙판으로 변한 길은 사륜구동에다 체인까지 칭칭 감았는데도 미끄러지기 일쑤다. 그럼에도 백담사행 트럭은 하루 한두 차례 우편물과 두부·콩나물 등을 싣고 골짜기를 위태위태 오른다. 

뒤로 법당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좌측 처마만 보이는 건물이 만해와 전두환이 머물렀던 화엄실이다.
▲ 내설악 백담사. 뒤로 법당인 극락보전이 보인다. 좌측 처마만 보이는 건물이 만해와 전두환이 머물렀던 화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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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원 그리 많아 저 많은 돌탑을 세웠을까.
▲ 백담사 골짜기. 무슨 소원 그리 많아 저 많은 돌탑을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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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경쾌하다. 중간중간 폭포를 만난 계곡은 숨구멍처럼 작은 물 웅덩이를 남겨놓았다. 웅덩이는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물이 세상 구경을 하며 한숨 돌리는 곳이고, 산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겐 생명수와 같다.

딱따구리가 고목을 쪼는 소리를 들으며 백담사에 도착하면 먼 길을 걸어 절집을 왜 찾았는지 그 이유를 잊게 된다. 부처님 만나면 꺼내놓으려던 세속의 심란함들은 어찌 했을까. 그것도 무거웠던 것인지 골짜기를 오르면서 하나둘 버렸다.

그래서였나. 칼바람 속에서도 땀은 났지만 백담사로 오르는 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마음이 비워지니 무거웠던 발걸음조차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누군가 말했다. 굳이 백담사를 가려면 반드시 겨울에 가야한다고. 미욱한 나는 눈길을 걸어 백담사에 도착한 이후에야 그 말 끝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정작 마음을 닦아야 할 이는 따로 있는데...

이마에 난 땀을 두어 차례 닦을 쯤이면 일주문이 나타난다. '내설악백담사'라 쓰여진 일주문을 지나면 백담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선 여행자의 눈에 돌로 만든 다리 하나가 들어온다. 곧게 뻗은 다리를 건너면 금강문이 나오고 법당인 극락보전이 나온다.

일직선상에 놓인 다리와 금강문 그리고 법당인 극락보전. 한치의 오차도 없어 보이는, 어쩐지 다리를 건너기가 꺼려졌다. 1990년 전까지만 해도 백담사 법당으로 가려면 허술하게 놓인 나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그 시절, 작은 비에도 나무 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물이 잦을 때까지 며칠씩 기다려 개울을 건넜다. 다리가 생기면서 기다림은 사라졌다. 그 여유가 새삼 그리워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다리엔 '수심교'라 쓰여져있다. '마음을 닦는 다리'라는 뜻일 게다. 뜻은 좋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한 일인데 삿된 마음을 품고 갈 수야 없지 않던가. 하지만 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이 다리의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전두환이라는 전직 대통령이 내설악 깊숙히 자리잡은 백담사와 맺은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에게 권력을 내어준 그는 상왕정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로 맺은 악업을 끊고자 하는 6공화국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버림 받았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해 139억이 전 재산이라며 국가에 헌납했다. 그리곤 도망치듯 백담사로 숨어들었다. 1988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인 11월 23일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방. 안에는 그가 사용했다는 목욕통과 거울, 촛대, 옷 등이 전시 되어 있다. 100년 전 머물렀던 만해의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 화엄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방. 안에는 그가 사용했다는 목욕통과 거울, 촛대, 옷 등이 전시 되어 있다. 100년 전 머물렀던 만해의 흔적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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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경내 안내판에 누군가 쓴 글. 예수 깎아 내리는 선수들은 늘 따로있는 법.
▲ 예의 없는 사람들. 백담사 경내 안내판에 누군가 쓴 글. 예수 깎아 내리는 선수들은 늘 따로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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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공간에서 만나는 일해

전두환이 다시 백담사를 떠난 것은 1990년 12월 30일. 그는 백담사에서 영하 20℃를 오르내리던 겨울을 세 차례나 맞았다. 제왕의 위치에서 잿빛 승복을 입은 죄인이 된 전두환. 돌이켜 조선왕조 5백년사를 보면 그와 같은 운명을 겪은 왕도 한둘이 아니었다.

역사란 언제나 되풀이 되는 법. 그는 손에 묻힌 피를 스스로 지워내지 못한 채 백담사에서의 유배 생활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손이 쩍쩍 들러붙은 영하의 날씨에 장작을 패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음 속에 칼을 갈면서 복수를 꿈꾸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다 내 업보'라며 지난 생을 참회했을까.

전두환이 부처님 전에 앉아 염주알을 굴리던 1989년 세상은 '5공 청문회'로 시끄러웠다. 그해 마지막날인 12월 31일 그는 눈길을 뚫고 청문회장까지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했다. 그는 청문회장에서 미리 작성한 연설문을 당당하게 읽었다. 광주학살은 자위권이라고 말했다. 부처님 전에서도 그는 속죄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연설문을 읽어 내려갈 때 정상용 의원은 전두환을 향해 '살인자 전두환'이라고 소리쳤다. 소장파였던 노무현 의원은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명패를 집어 던졌다. 전두환은 청문회장을 떠나 백담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밤, 사각사각 내리는 눈을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살인자라고 소리친 정상용 의원을 향해 "그래, 내가 다 죽이라고 했다"라고 맞받아치지 못한 걸 후회했을까. 아니면 그 순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 은덕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렇게 '전두환의 쇼'는 시작되었고 2년 1개월만에 쇼는 끝났다.

전두환이 당시 사용하던 거처는 '화엄실'. 법당인 극락보전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며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만해 한용운 선사가 사용하던 곳도 화엄실이라고 한다.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로 독립선언문 연설을 하고 3년간 옥고를 치른 만해 한용운.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 그의 올곧은 정신이 남아 있던 '화엄실'은 '살인자 전두환'이 사용한 공간으로 관광지가 되고 말았다.

만해기념관 앞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흉상. 아래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만해의 글이 써져있다.
▲ 만해 한용운. 만해기념관 앞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사의 흉상. 아래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만해의 글이 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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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문학사상과 불교사상, 독립사상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 만해기념관 만해의 문학사상과 불교사상, 독립사상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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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공간에서도 속죄 못한 전두환

만해의 민족정신과 불교정신이 곳곳에 남아 있는 백담사는 법당과 나한전 산신각을 제외하면 죄다 만해와 관련된 건물이다. 만해기념관·만해수련원·만해연구관·만해교육관·만해도서관·만해당 등.

'만해사'라고 이름 붙여도 이상할 일 없을 정도로 만해의 흔적이 많은 백담사지만 1990년 12월 30일 전두환이 떠나고 나서 때 아닌 '전두환 바람'이 불었다. 청정 수도도량이던 백담사가 창졸지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만해와 일해(전두환의 호)가 살아온 길이 극명하게 다를지언대, 등산복 차림을 한 사람들은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하기도 했다. 이런 몰상식이라니.

힘들게 백담사에 도착한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만해기념관이 아닌 전두환이 머물고 있던 '화엄실'이다.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엔 전두환이 사용하던 목욕통과 촛대 등의 집기와 그가 입던 옷들이 전시실처럼 전시되어 있는데, 적어도 사람들은 그 공간에서 만해가 독립의 꿈을 키웠으리라고는 짐작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 만해 한용운 시 '당신을 보았습니다' 전문

나라 잃은 만해의 눈물이 남아있는 백담사. 그러나 나무 다리를 건너 백담사를 찾았던 전두환은 수심교를 건너 백담사를 떠났다.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다며 '연희궁'으로 돌아갔다. 백담사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2년 1개월을 보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부디 성불하셨기를...
▲ 백담사 부도. 부디 성불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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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차례 오가는 백담사행 트럭. 운이 좋으면 얻어 타고 갈 수 있다.
▲ 부식을 실은 차량. 하루 한 차례 오가는 백담사행 트럭. 운이 좋으면 얻어 타고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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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공간인 백담사에서 전두환의 흔적을 보는 건 괴롭다

1997년, 12·12 쿠데타와 5·18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무기형을 선고 받은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 전직 대통령 자격마저 박탈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그는 여전히 전직 대통령이다.

겨울이 되면 사람의 그림자조차 그리운 곳 백담사. 만해의 사상이 도도하게 흐르는 독립의 땅 백담사에서 전두환의 흔적을 보는 일은 괴롭다. 그가 지난 삶을 제대로 토해내기만 했다면 그를 지금까지 미워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담사 경내엔 언제 매월당이 다녀갔던지 김시습의 시비가 세워져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는 만들어 질 수 없는 글이다.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 오누나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 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 갈꺼나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 있으리

- 매월당 김시습 시 '저물무렵' 전문

백담사를 떠나 골짜기를 걸어 나오는데 까마귀 몇 마리가 한참이나 쫓아왔다. 까악까악. 그 소리가 세상을 향한 만해의 꾸짓음인지, 전직 대통령으로 살아가는 전두환의 뻔뻔함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나저나 영하 20℃까지 떨어지는 고약한 날씨는 언제나 풀릴 것인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이 눈에 밟혀 걷기도 힘들어진다.

걸어서 백담사를 향하는 스님들.
▲ 만행 중이신가. 걸어서 백담사를 향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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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백담사, #만해, #전두환, #한용운, #내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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