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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우리 집 베란다에 작년에 심은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 철모르고 피는 동백을 미친 동백이라 하여 광백(狂柏)이라 부른다. 아무리 설중매라지만 지금 피는 매화는 철을 모르고 피는 것 같아 광매(狂梅)라 부르고 싶다. 한참 광매를 보고 있으려니 부드럽고 상처입지 않은 섬진강이 보고 싶어진다.
 

연곡사 가는 길

 

전주-남원-화엄사까지 밋밋하고 재미없는 길을 달린 후 화엄사부터는 구불구불하고 보드라운 섬진강을 끼고 달린다. 언뜻언뜻 보이는 섬진강 줄기가 눈에 들어오면 괜히 애간장이 저미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차에서 내려 담배 한대 물고 하염없이 본다. 곧게 뻗지 않고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부드럽게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과연 우리의 물길이구나 느끼게 된다. 소리도 내지 않고 숨죽이며 보드랍게 흐른다. 바지춤을 걷어 올리며 이 물을 건너겠다고 오기를 부리면 모두 받아 줄 것 같다. 폭은 좁으나 마음은 넓은 강이다.

 

 

피아골 다랭이 논이 아닌 차밭

 

연곡사는 피아골로 접어들어 20여리 정도 가면 자리하고 있다. 계곡 언덕마다 발 디딜 틈만 있으면 다랭이 논이 차지하고 있다. 치열한 삶의 결과물이다. 이제 다랭이 논은 차밭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군데군데 새로 지은 집들은 다랭이 논과는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차밭과 어울리는 집 모양새를 하고 있다. 예전엔 개간할 엄두도 못하던 산등성이에도 차밭을 만들기 위한 기계음이 요란하다. 이제는 피아골은 차밭골로 바뀌고 있다.

 

피아골 하면 피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빨치산의 아지트였던 피아골이 군경과의 치열한 격전지여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피아골의 유래는 다른 데에 있다. 이 곳이 예전에는 오곡 중에 하나인 피(稷)를 많이 재배하여 피밭골(稷田谷)이라 하였다가 피아골로 바뀐 이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직전리(稷田里)가 피아골 초입에 있으니 이 유래가 신빙성이 있다 하겠다. 한탄강(漢灘江)이 큰여울(漢灘)이라 하여 한탄이지 궁예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한탄(恨歎)한 한탄강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연곡사 부도여행

 

연곡사를 다녀 온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 때만 해도 연곡사터는 덩그러니 교문과 '一'자형 건물 그리고 철봉 몇 개만 녹이 쓴 채 남아 있는 폐교된 어느 분교처럼 애처로운 곳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삼성각과 종각 등이 세워졌고 일주문과 대적광전에 이르기까지 몇 단의 계단이 만들어졌고 시야를 가리는 나무가 심어져 조잡하게 보인다. 부도탑과 석탑이 없었다면  그저 지나쳐버리고 싶은 절로 변해 있다. 이웃해 있는 천은사를 조금만이라도 참고했더라면 이런 마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삼층석탑과 신라 말에서부터 조선말기에 이르는 몇 종의 부도가 답답한 마음을 가시게 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편 채마밭에 뽀얀 삼층석탑이 보인다. 연곡사의 사력(寺歷)을 알리는 첫 번째 석물이다. 일주문과 대적광전의 선상에서 벗어나 왼편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으니 석탑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보면 예전에 연곡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석탑 위쪽으로 거대한 석축을 쌓아 석탑이 있는 자리와 대웅전 영역이 단절되는 느낌이 들어 답답하다.

 

 

경내 뒤쪽 산등성이에 시계반대 방향으로 동부도와 동부도비, 북부도, 서부도가 중심을 잡고 있고 서부도(소요대사부도) 주변에 부도 세 기가 흩어져 있다. 그리고 동백나무 밑에 고광순순절비와 현각선사부도비가 있다.

 

설악은 아름답기로는 남한 제일의 산이요, 그 아름다움은 철을 가리지 않는 명산이다. 지리산은 어떠한가? 우람하고 기품 있기로는 남한제일이요, 변화무쌍하여 지리산에 대한 사랑은 철을 가리지 않는다. 자연경관으로 제일인 두 산이 속 깊은 아름다움까지 갖고 있으니 설악은 진전사터 삼층석탑을, 지리산은 연곡사 동부도를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비스듬한 언덕을 박차 오르면 까만 부도탑이 정갈하게 서 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것이 설악산 진전사지 석탑을 빼 닮았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보더라도 한치 흐트러짐이 없이 꼿꼿이 서 있는 것이 조형미로서는 최고다. 조각수법도 정교하여 오목조목 잘도 생겼다. 신라말기에 만들어졌으며 도선국사의 부도라는 말이 있긴 한데 확실하지 않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한 존재, 완벽한 조건을 갖춘 이상형,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완벽한 존재, 요샛말로 '엄친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동부도에서 위쪽으로 100여m 오르면 북부도가 나온다. 얼핏 아까 보았던 부도를 그대로 보는 것 같다. 동부도를 모방하여 재현해놓은 것이다. 다만 동부도와 색깔의 맵시가 달라 동부도가 까무잡잡하고 윤기가 흐르는 반면 북부도는 살결이 뽀얗다. 상륜부에서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돋보이는 점이 다르긴 하다. 동부도보다 제작시기가 약간 뒤인 고려 초기로 추정하고 있고 만든 재질을 고려하여 현각선사 부도로 추정하나 확실하진 않다.

 

 

북부도 왼편으로 한적한 길이 나 있다. 서부도로 향하는 길이다. 예전에는 이 길이 막혀 있던 걸로 기억되는데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한적하고 맑은 길이다. 서부도는 동· 북부도와 달리 주인이 확실한 부도이다. 소요대사의 부도로 1649년에 세워진 것이다. 동·북부도가 신라 말, 고려 초에 세워진 것이니까 이 때 와서 또 한 번 연곡사는 봄날을 맞이한 것이다. 서부도 또한 동· 북부도와 견줄 만큼 온갖 정성을 다해 만들어진 것이다.

 

 

서부도 뒤에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진 보주형 부도와 간소한 모양의 팔각원당형 부도가 자유롭게 서 있다. 집 안마당에 놓아기르는 닭이 알을 여기저기 낳듯이 양지바른 곳에 보주형부도, 원형몸체에 팔각지붕을 한 부도, 팔각몸체에 팔각지붕을 한 부도를 만들어 놓았다. 귀엽게 보이기도 하고 앙증맞게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만든 게 아니다. 동·북·서부도를 보고 감히 아무렇게나 만들 수 없었을 게다. 크기만 작았지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서부도를 내려오면 몇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그 밑에 이 절과 어울리지 않은 비가 하나 서 있다. 항일의병대장 고광순순절비다. 의병장 고광순이 연곡사와 연을 맺은 건 1907년, 연곡사에 본영을 설치하고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1907년 9월에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고광순 순절비 아래엔 현각선사부도비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연곡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왜적이 들어와 살육과 방화가 있었다 하고 1907년엔 일본군의 방화로 잿더미로 변했으며 한국전쟁 때 또다시 폐사되었다 한다. 현각선사부도비는 이런 시련을 견디며 굳건히 버티어 더욱 장대하며 용감해 보인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건들이면 물어버릴 것 같은 큰 입을 보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일지라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보인다.

 

 

연곡사는 이제 폐사지에서 느낄 수 있는 고즈넉한 맛은 없다. 그러나 1000년, 500년을 건너뛰어 말동무가 되는 석물(石物)과 쓰린 이야기를 말없이 품고 있는 피아골 그리고  그냥 바라만 보아도 가슴을 저미게 하는 섬진강이 함께 하는 연곡사 여행은 다른 폐사지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흥이 있다.


태그:#연곡사,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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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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