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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책을 읽는 어린이가 보통 어린이라면 한번 시간을 내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한 시간만 몸을 움직여 보세요. 또 귀를 막고 한나절만 지내보세요. 손이나 발을 묶고 한동안 있어 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 오랫동안 혼자 있어 보세요. 그러면 장애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한지, 왜 장애인에게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지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초등학생 여자 아이가 몸이 불편한 장애아 친구를 처음으로 사귀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책, <휠체어를 타는 친구(1997, 보리)> 뒤표지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저 글에 나오는 것처럼 저도 요즘 한 번씩 눈을 감고 몸을 움직이는 시늉을 해 보곤 합니다. 책 따라하려는 건 아니고요, 한 사람을 알아가는 중에 저절로 우러난 행동이랍니다. 그 사람은 바로 2년 전 당뇨망막증으로 시력을 잃게 된 정용진씨입니다.

정용진씨는 이름보다는 '노엣지'라는 아이디로 저한테 익숙합니다.(그래서 이제부턴 '노엣지님'이라고 씁니다.) 그 아이디를 알게 된 건 진보신당 홈페이지 게시판입니다. 이분이 시각장애인이라는 것도 게시판 글을 보고 알았습니다. 부끄럽게도 장애인에 대해 워낙 무관심한 저인지라 그것 말곤 노엣지님에 대해 더 아는 것도, 알아볼 마음도 없었습니다.  

노엣지님이 운영하는 커피숍 '바리스'는 수색역 4번 출구 근처에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커피와 와플, 머핀을 각각 천원에 만날 수 있습니다.
▲ 천원의 행복 이벤트 노엣지님이 운영하는 커피숍 '바리스'는 수색역 4번 출구 근처에 있습니다. 정말 맛있는 커피와 와플, 머핀을 각각 천원에 만날 수 있습니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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쩍쩍 붙은 그 맛, 커피광이 보장합니다

그러다가 노엣지님이 내가 사는 은평구에 커피숍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건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니 관심이 자꾸 생기고 만나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같은 동네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조금이라도 매상을 올려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나 봅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는, 커피숍 다녀온 이야기랑 사진을 여기저기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 하나 매상 올려봤자 별 도움도 안 될 테고, 어떤 식으로든 이 가게를 홍보할 방법을 내 식대로 찾아 볼 마음이었죠.

막연한 궁금증과 어설픈 의무감을 안고 2009년을 하루 앞둔 12월 31일, 지하철 수색역 4번 출구 근처에 있는 커피숍 '바리스'에 자전거를 타고 갔습니다.

게시판에서 글과 사진으로 자주 보았던 커피숍, 직접 보니 생각보다 훨씬 아담하고 예뻤습니다. 여기저기 사진을 올려도 좋을 만한 풍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별 느낌을 못 받고 오면 어쩌나, 가기 전에 조금은 걱정을 했거든요. 커피숍 운영을 실제로는 도맡아 하고 있는 노엣지님 부인한테 '당원'이라고 솔직히 말씀드리고 사진 찍어도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기꺼이 허락해 주셨죠.

생각보다 훨씬 아담하고 예쁜 커피숍 안 풍경. 화가분이 벽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 벽화가 있는 커피숍 생각보다 훨씬 아담하고 예쁜 커피숍 안 풍경. 화가분이 벽에 직접 그린 그림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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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안 곳곳을 사진으로 찍고, 이번엔 음식을 맛보기로 했습니다. 바리스의 대표 메뉴인 커피와 와플을 먼저 시켰습니다. 하루에 다섯 잔은 너끈히 먹는 커피광으로서 감히 말씀드리지만, 끝내줬습니다. 흔한 말로 입에 쩍쩍 붙습니다. 정말 궁금했던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와플 맛도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같이 간 남편이랑 마지막 한 조각까지 밀고 당기며 달콤한 크림이 묻은 와플을 입 안으로 밀어넣었습니다.

다른 음식 맛도 궁금해집니다. 집에 가져가려고 산 천원짜리 커다란 머핀은 몇 조각 뜯어먹다보니 어느새 다 먹어버렸습니다. 내친 김에 샌드위치까지 시켜봅니다. 저녁을 막 먹은 뒤라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지만, 결국 샌드위치까지 말끔히 비워버립니다. 마요네즈가 안 섞였음에도 고소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이었거든요.

그렇게 한 시간 넘게 먹고만 있는 우리들이 마음에 든 건지, 커피 한잔을 그냥 더 주시네요.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잠이랑 전혀 상관없는 나, 다시 나온 커피까지 말끔히 비웠습니다.

노엣지님은 커피숍에 늘 있지 않습니다. 이 날도 처음엔 안 계셨죠. 못 만나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었는데 밤 9시 즈음, 사진으로 많이 본 얼굴이 가게 안으로 들어옵니다. 노엣지님이었습니다. 운이 좋았죠.

제가 진보신당 게시판에 글을 많이 쓰는지라 노엣지님도 제 이름만은 알고 계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 나는 노엣지님 얼굴을 보고 있지만 노엣지님은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그 당연한 현실이 갑자기 안타까웠습니다. 부인이 가져다주는 커피를 "커피 왔어?"하고 물은 뒤에야 조심스레 마시는 모습도.  

입에 쩍쩍 붙는 커피, 달콤한 와플, 고소하고 산뜻한 샌드위치, 촉촉한 머핀까지. 저녁 먹은 뒤에 저 많은 음식들을 모조리 해치웠습니다.
▲ 미각을 자극하는 메뉴들 입에 쩍쩍 붙는 커피, 달콤한 와플, 고소하고 산뜻한 샌드위치, 촉촉한 머핀까지. 저녁 먹은 뒤에 저 많은 음식들을 모조리 해치웠습니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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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엣지님 커피숍, 안 도와드리겠습니다

초면이지만, 서로 어색함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도 진보신당과 은평구라는 두 가지 울타리가 엮인 사이라서 그랬겠지요. 밝고 맑은 목소리와 생각들이 섞여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몇 시간이고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았지만, 그 날은 제가 보신각 촛불 문화제에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커피숍을 나왔습니다.

그렇게 다녀온 뒤에, 진보신당 게시판에 있는 노엣지님 글을 죽 읽어보았습니다. 노엣지님이 운영하는 블로그(http://blog.naver.com/noedge74)에도 들어가 보았고요. 한 번 만난 것뿐인데 글이 주는 울림이 전과 많이 다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건, 전과 같지 않다'더니만 제가 꼭 그런가 봅니다. 노엣지님 마음 구석구석이 조금씩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장애인에 대한 나와 우리 사회의 무지와 무관심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컴퓨터를 한다는 게 생활에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네이버 블로그 같은 경우 몇 번 개편되면서 동영상이나 사진 같은 걸 올리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전에는 사진이나 동영상·음악링크도 혼자 할 수 있었는데 개편되면서 이 세 가지 기능 모두 스크린 리더기를 지원하질 않지요. 시각장애인은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데 관심 없을 것이라는 접근은 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게다가 블로그나 사이트 개편할 때 고려대상도 아닌 것 같고요. 제가 알기로는 영국 같은 경우 시각장애인의 웹 접근성을 고려하는 사이트를 운영하지 않거나 현저히 접근성에 위배된다면 처벌받는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에 대해 논의조차 없는 듯 하여 안타까울 뿐입니다. 네이버나 다음 정도의 메이저 포털이라면 이런 서비스 부분에서 어떤 대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엣지님이 쓴 저 글을 보면서 내 자신을 돌아봅니다. 실은, 노엣지님이 게시판에 글 남기는 걸 보면서 '어떻게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진보신당 락 동호회 활동도 하는 분이어서 한 번씩 음악 동영상도 올리고는 했는데, 그때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답은 바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스크린 리더기'였던 거죠.

하지만 스크린 리더기가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건 아닌가 봅니다. 2년차 시각장애인인 노엣지님은 그런 현실을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자 '시각장애인 당원님들을 위한 센스리더로 게시판 글쓰기 방법'이라는 글도 남기고, 그 방법을 본인 목소리로 녹음한 파일까지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밝고 맑은 목소리와 생각들이 섞여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참 좋았던 시각 장애인 노엣지님. 초면이지만 어색함 없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 몹쓸 편견을 버리게 해 준 사람 밝고 맑은 목소리와 생각들이 섞여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참 좋았던 시각 장애인 노엣지님. 초면이지만 어색함 없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 조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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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 시각장애인이 된다는 것. 그 절망감과 아픔은 제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기하기도 합니다. 나 같으면 절망의 바다에서 끝없이 허우적댈 것만 같은 시간들을 노엣지님은 경쾌하고 즐겁게, 그것도 정말 많은 글로 사람들과 나누고 있으니까요. 신형 MP3를 다루면서 겪는 어려움, 처음으로 전기밥솥에 밥을 지으며 느낀 행복감, 시각장애인용 휴대폰을 지원받아서 문자도 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하는 모습….

이랜드 투쟁 1년이 되었을 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직접 만든 노래를 올리기도 했죠. 특히 글마다 끝에는 식은땀을 흘리는 토끼 이미지, 머리를 땅에 박고 자학하는 토끼 이미지처럼 이모티콘을 대신하는 글을 남겨 저한테 그림을 상상하는 시간까지 안겨줍니다. 이렇게 글만 보면 이 사람이 정말 시각장애인 맞나, 착각이 되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제 편견이 만든 잘못된 착각일 겁니다. 장애인은 힘들게 살 거라는 막연한 편견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그 몹쓸 편견을 조금씩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난스럽고도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노엣지님 덕분에요.

더불어 커피숍 홍보하는 글이라도 남겨서 노엣지님께 보탬이 되고자 했던 어설픈 마음도 털어내려고 합니다. 노엣지님은 내가 도움을 줘야할 대상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갈 친구이자 동지인 것뿐이니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듯, 노엣지님도 내가 몰랐던 부분, 조금씩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니까요.

'바리스'는 사회·문화· 정치 토론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진보커피숍'으로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 자주 가겠다는 약속을, 저렇게 쿠폰에 이름을 적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 진보 커피숍 '바리스'는 사회·문화· 정치 토론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진보커피숍'으로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 자주 가겠다는 약속을, 저렇게 쿠폰에 이름을 적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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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노엣지님을 만나면 이런 것부터 물어보고 싶어요. 십대 후반부터 만화가로 지낸 시간, 좋아하는 음악, 여러 가지 맛난 커피 이야기들 말이죠. 벌써부터 너무 궁금해졌거든요. 물론 그 이야기는 맛좋은 커피와 좋은 음악을 만날 수 있는 커피숍, '바리스'에서 나눌 생각입니다. '바리스'는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공간이자 사회·문화·정치 토론을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진보커피숍'으로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다만 다시 만나기 전에 이 사실 만큼은 미리 가슴에 꼭 담아두려고 합니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남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투쟁적인 삶인지'에 대하여.

그런 마음으로 맨 처음에 말한 것처럼 저는 요즘 한 번씩 눈을 감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움직이거나 물건을 잡아보기도 합니다. 바로 지금은 눈을 감고 이 마지막 문장을 키보드로 쳐보는 중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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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커피, #시각장애인, #진보신당 , #진보커피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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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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