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가 왔다 2007년 5월 22일, 저마다 등번호 22가 찍힌 빛바랜 유니폼을 꺼내 입고 앉아있던 대구구장 3루 쪽의 홈팬들이 원정팀 더그아웃을 향해 100송이의 장미꽃을 던졌다. 그리고 장난스런 "이만수 홈런" 구호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 이만수가 왔다 2007년 5월 22일, 저마다 등번호 22가 찍힌 빛바랜 유니폼을 꺼내 입고 앉아있던 대구구장 3루 쪽의 홈팬들이 원정팀 더그아웃을 향해 100송이의 장미꽃을 던졌다. 그리고 장난스런 "이만수 홈런" 구호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 사진제공 : 이만수


2007년 5월 22일, 저마다 등번호 22가 찍힌 빛바랜 유니폼을 꺼내 입고 앉아 있던 대구구장 3루 쪽의 홈팬들이 원정팀 더그아웃을 향해 장미꽃 100송이를 던졌다. 그리고 장난스런 "이만수 홈런" 구호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비록 적진에 몸을 담고 있을망정, 10년 만에 돌아온 '행님'을 위한 가슴 시린 사랑고백이었다. 

사상 첫 안타, 첫 홈런을 때려내며 한국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렸던 1982년 봄부터 은퇴식도 없이 떠나야 했던 1997년 가을까지, 16년 동안 삼성 라이온즈의 파란 유니폼을 입고 대구구장의 터줏대감으로 군림했던 이만수.

그가 비록 SK 와이번스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원정팀 더그아웃에 앉아 있긴 했지만 대구구장은 잠시나마 타임머신이 되어 1980년대로 비행했고, 그래선지 오랜만에 라이온즈 타선도 폭죽처럼 홈런 네 발을 연쇄 폭발시키며 선두팀 SK 마운드를 맹폭했다.

대구상고 시절, 그는 김시진과 배터리를 이루며 전국무대에 이름을 알렸고,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거치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갔다.

그리고 운 좋게도 대학을 졸업하는 해 출범한 프로야구무대에서는 개막전에서 사상 첫 안타와 첫 홈런을 때려냈고, 원년 홈런왕 김봉연과 치열한 경쟁 끝에 사상 첫 통산 100홈런 고지에 깃발을 꽂았으며, 원년 멤버 중 가장 길었던 16년간의 선수생활을 통해 숱한 신기록과 진기록을 만들어왔다.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른 것을 비롯해 통산 252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1980년대의 대표적인 홈런왕으로 자리매김했고, 1984년에는 사상 최초의 타격 트리플크라운(타율·타점·홈런 동시 석권)을 달성하는가 하면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던 포수였고 올스타 최다득표만 네 번을 기록하는 전설을 써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수에 대한 대구 팬들의 사랑은 그저 그런 성적과 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는 '홈런왕'이기 이전에 '만수'였고, '만수 행님'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투수리드에 당겨 치는 큰 스윙... 약점 많은 '만수 행님'

대구상고의 영웅, 이만수 1977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MVP 이만수. 그는 대구의 아들이었고, 서민들의 우상이었다.

▲ 대구상고의 영웅, 이만수 1977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MVP 이만수. 그는 대구의 아들이었고, 서민들의 우상이었다. ⓒ 사진제공 : 이만수


"대구상고도 야구는 명문이었으니까 내가 처음에 갈 때는 잘 몰랐는데, 가서 보니까 그렇데요. 라이벌이라는 학교가 웬만한 학교도 아니고 경북고 아닙니까? 학교 배지 하나만 달고도 온 세상이 자기 것인 것처럼 활보를 하는 경북고 학생들 앞에서, 대구상고 학생들은 그냥 기가 죽어가지고…. 그런데 야구장에서만큼은 대구상고가 그 경북고를 박살내기도 하고 했으니까, 동문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울분을 달래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더라고요."

1960년대 이래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해왔던 대구, 그곳에서도 정통 엘리트코스로 통했던 경북고의 위세는 대단했다. 정관계와 재계의 수장을 지낸 알 만한 이름들로만 학교 역사관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그 학교의 배지는 대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중심부를 향해 고개 빳빳이 쳐들고 있는 유망주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상고를 다닌다는 것은 일찌감치 은행에나 취직하는 것으로 주제 파악을 마친 서민의 자식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만수는 자신이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중심에서 한 발 벗어난 곳에서 출발했고 주변인과 서민들의 우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장에서 발견되는 그의 개성과도 상승 작용했다. 

5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독식한 1980년대의 대표적인 포수이긴 했지만, 이만수의 수비는 빈틈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공의 배합이 단순한 것이 문제였는데, 1990년 한국시리즈 때 상대팀인 LG트윈스의 백인천 감독이 투수들에게 이만수의 타석에서 만만한 공을 헌납하도록 지시해가면서까지 포수 출장을 유도했다는 후일담은 유명하다. 그만큼 이만수의 투수리드가 단순해 상대팀으로서는 대응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석에서만큼은 1980년대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타자였음이 분명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한편에서는 '그나마 장효조보다는 상대하기 한결 쉬운' 면도 노출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큰 스윙 폼 때문에 홈런을 맞을 우려가 많은 반면 병살 유도도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만수는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가신 공략에 짜증내거나,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버린 병살타에 기죽는 사람이 아니었다. 선동열의 노련한 슬라이더에 쓰러질 듯 어이없는 헛스윙을 하며 물러날 때는 관중의 야유보다도 한 숨 빠르게 스스로 헬멧 위로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더그아웃으로 뛰어 들어갔고, 다음 회에 실수를 만회하는 홈런을 날리면 그라운드 위로 두 팔 두 발을 모두 휘두르며 겅중겅중 뛰어대다가 제풀에 엉켜 넘어지는 '몸 개그'를 선사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다보면, 애초에 '꼭 이겨야 할 텐데… 지면 분해서 어쩌나' 하는 집착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던 관중도 '그래, 병살타를 칠 때도 있고, 그러다보면 홈런 날릴 때도 있겠지'하며 절로 여유롭고 흥겹게 경기를 즐기게 되곤 했다.

1990년대 중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그도 2할대의 평범한 타자로 전락해 대타로나 선수생명을 이어가며 홈런보다 더 많은 병살타를 난사해대던 시절에도, 경기가 7회나 8회쯤 넘어갈 때면 대구 팬들이 '이제 승부는 됐고, 이만수나 보여달라'는 듯한 목소리로 "이만수"를 연호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왕년의 야구 스타, 팬티만 입고 운동장 돌다

팬티만 입고 달리다 고무엉덩이가 붙은 트렁크 차림의 이만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로 22명의 팬과 구단 직원들이 그와 함께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팬티 세리머니'는 80년대 이후 TV 9시뉴스 첫 소식으로 전해진 첫 번째 야구뉴스가 되었고, 2007년 들어 폭발한 갑작스런 야구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 팬티만 입고 달리다 고무엉덩이가 붙은 트렁크 차림의 이만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로 22명의 팬과 구단 직원들이 그와 함께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팬티 세리머니'는 80년대 이후 TV 9시뉴스 첫 소식으로 전해진 첫 번째 야구뉴스가 되었고, 2007년 들어 폭발한 갑작스런 야구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 SK 와이번스


선수 은퇴 후 미국에서 일하다가 SK와이번스의 수석코치가 되어 국내로 복귀한 2007년 봄, '팬티 세리머니'라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던 것도 그런 이만수였기 때문이다.

한창 파리 날리던 관중석을 보며 한숨을 쉬던 그가 기자들 앞에서 "앞으로 열 번의 홈경기 안에 만원이 된다면, 팬티만 입고 야구장을 돌겠다"는 도가 넘는 농담을 하고 만 것이다. 볼거리에 목말랐던 기자들이 곧바로 이만수의 농담을 공약으로 만들어 전했고, '스포테인먼트'의 가시적 사례를 찾던 구단이 재빠르게 반응하면서 사건이 됐다. 

2007년 5월 21일. 그날을 D데이로 설정한 구단은 인천시청과 시내 기업들을 돌며 표를 팔았고, 시민들도 '이만수 팬티 보는 날'이라는 연통을 문자메시지로 돌리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웅을 팬티 질주라는 희극으로까지 몰아넣은 현실이 씁쓸했던 팬들은, 함께 달리기로 결심했다. 그날, 4회 초가 끝날 즈음 전광판에 '만원사례'라는 글자가 새겨졌고, 3만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5회를 마친 다음, 한국야구의 황금기였던 1980년대를 상징하는 정수라의 노래 '난 너에게(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고무엉덩이가 붙은 트렁크 차림의 이만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로 22명의 팬과 구단 직원들이 그와 함께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팬티 세리머니'는 1980년대 이후 TV 9시뉴스 첫 소식으로 전해진 첫 번째 야구뉴스가 되었고, 2007년 들어 폭발한 갑작스런 야구 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솔직히 쪽팔렸지요. 사실, 만원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와, 이 나이 먹고 벌거벗고 운동장을 어떻게 도나…, 죽었다 싶었어요."

'헐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작달막한 키, 순한 눈매, 동네 과일가게 아줌마 같은 둥글둥글한 말씨. SK와이번스가 첫 우승의 감격을 아직 삭이지 못하고 있던 2007년 겨울, 구단의 어느 회식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그날의 기분을 물었었다.

민경삼 운영본부장이 폭탄주를 한 잔씩 말아서 돌리는 걸 보며 나긋한 대구 사투리로 "하이고, 몸에도 안 좋은 걸 왜 그렇게 섞어서까지 마셔요"하며 혼자 따로 시킨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그가 답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술과 담배와 커피를 멀리하고, 운동을 거르지 않는 성실한 체육인이다.

"그래도, 프로잖아요. 프로는 팬들 사랑을 먹고 사는 거고. 처음 한국 돌아와서 텅 빈 관중석을 보면서 너무 허전해서, 정말 저 관중석을 채울 수만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팬서비스 한다고 벌금 낸 적도 있어요"

그러나 그가 지나온 세월, 한국 사회는 무작정 근엄하고 무겁기를 강요해왔고,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알몸도 아닌, 정확히 말하면 반바지 하나 입고 달린 세리머니가 따져보면 대단한 파격이랄 수도 없는 21세기에 우리가 살지만, 무겁고 획일적인 시대에 길러진 50대 초입의 세대가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맞아요. 옛날에는 안타치고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 한번 흔들어주는 것도 눈치 보일 때가 많았지요. 저도 홈런 치고 관중석을 향해 손 흔들었다가 경기 후에 선배들한테 끌려가서 혼난 적도 많아요.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하면서. 이번에 제가 팬티 입고 뛰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옛날에는 과하게 팬서비스 한다고 감독님한테 벌금을 문 적도 있어요."

'팬서비스'를 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린 그 감독이 누구였느냐고 묻자, 조심스런 눈짓으로 맞은편을 가리킨다. 그쪽에는 신영철 사장의 잔을 받으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 요즘에는 팬들의 사진촬영이나 사인 요구를 거절하는 선수들에게 내규를 통해 벌금을 물리기까지 하는 김성근 감독이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그 역시 팬들에게 웃음이나 흘리는 얼빠진 녀석들은 혼을 내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야구 지도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그는 야인 시절과 지바 롯데 코치시절을 거치며 팬의 처지에서 야구를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시절, 이만수는 감독 눈 피해 선배들 꾸중 들어가며 관중석으로 손 흔들던 몇 안 되는 선수였고, 그렇게 야구를 즐기고 팬들에게 봉사하는 프로였다.

'야구의 추억' 마지막 회, 이만수 택한 이유

이만수의 귀국 2006년 10월, 이만수가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서 한국무대에 복귀했고, 1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팬들이 그를 마중나왔다.

▲ 이만수의 귀국 2006년 10월, 이만수가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서 한국무대에 복귀했고, 1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팬들이 그를 마중나왔다. ⓒ SK 와이번스


물론 팬들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구단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팬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집중해왔던 그동안의 많은 야구단들에게, 팬의 지지를 받는 선수란 오히려 부담스런 존재인 경우가 많았다. 이만수 역시 40세까지 현역에서 뛰겠다는 소망을 채우지 못한 채 구단과 불화 속에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혼자 힘으로 길을 개척했다.

그는 직접 테스트를 받아가며 코치 자리를 얻었고, 성실함 하나로 따돌림을 극복하며 우승반지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팬들의 끊임없는 요구는 삼성 라이온즈로 하여금 이만수의 등번호 22번을 영구결번 시키도록 만들었고, 이만수는 2003년 7월 3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US 셀룰러필드 전광판에 뜬 '한국의 베이브루스, 헐크 만수 리 영구 결번'이라는 메시지에 환호하는 미국 팬들의 축하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이만수와 그의 팬들이 서로 주고받은 사랑이 띄엄띄엄 결실을 만들어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징검다리가 되었고, 지금 그는 대구와 인천의 팬들로부터 어느 현역 스타 못지않은 지지를 받는 스타가 되어 있다.

야구를 잘하는 많은 선수들이 있었고, 야구를 사랑하는 몇몇 선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다시 이만수라는 이름의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그가 팬에 대한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선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만수는, 우리 사회가 '프로야구'라는 걸 시작할 무렵 이미 알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히 깨우치지 못한 것, 즉 팬들의 사랑이 있어야 '프로'임을 알고 행동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얄팍한 지식과 졸렬한 감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 삼 년 가까이 끌고 온 '야구의 추억'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이 될 백 번째 글의 주인공으로 이만수를 택한 이유 또한 그것이다. 삼십 년 가까이 나이를 먹고 성장한 한국 프로야구가 팬들의 사랑이라는 정확한 지향점을 향해 굵어가기를, 그래서 2007년 5월 22일 대구에서 뿌려진 장미송이처럼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이 늘 펼쳐지는 야구장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소박한 야구팬의 마음에서 말이다.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홈런 1982년 3월 27일 MBC청룡전, 이만수는 1회 사상 첫 안타를 때려낸 데 이어 5회에는 사상 첫 홈런을 때려내며 한국프로야구의 출발을 알렸다. 그 날 첫 홈런을 때린 공로로 받은 등가구 쇼파는 한국을 비운 10년 사이 누가 들고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홈런 1982년 3월 27일 MBC청룡전, 이만수는 1회 사상 첫 안타를 때려낸 데 이어 5회에는 사상 첫 홈런을 때려내며 한국프로야구의 출발을 알렸다. 그 날 첫 홈런을 때린 공로로 받은 등가구 쇼파는 한국을 비운 10년 사이 누가 들고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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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그동안 '야구의 추억'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만수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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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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