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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多事多難). 올 한해를 평가함에 있어 이처럼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해보면 올해는 정말 충격과 공포의 연속이었다. 새 정권의 '강부자'·'고소영' 내각 구성, 광우병 파동, 대규모 촛불집회, 광화문 한가운데 쌓여진 명박산성, 초강경 시위진압과 인권탄압, 미국발 금융위기와 미네르바의 등장, 그에 따른 우리 경제위기 등 정말이지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한 해였다.

그 와중에 2008년을 관통할 단 하나의 단어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교육'을 들 것이다.

새 정권은 스스로를 '실용정부'라 부를만큼 실용과 자율, 경쟁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에 뒀다.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지 않았다. 교육의 평등성보다는 수월성을 강조했고, 인수위 시절부터 그에 입각한 정책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귀족학교 논란이 있는 자율형 사립고 100개교, 농·어촌 지역의 학업성취도를 높일 수 있다는 취지의 기숙형 공립고 150개교, 특화된 실업계 학교인 마이스터고 50개교를 세워 공교육을 다양화 및 특화시키겠다는 '고교다양화 300프로젝트'는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사다난'했던 올해 교육계를 살펴보니

이경숙 전 대통령직 인수위 위원장
 이경숙 전 대통령직 인수위 위원장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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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거센 반발로 정책 발표 이후 단 며칠 만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백지화된 '영어몰입교육 정책'은 황당함의 극치였다. '영어=국제경쟁력'이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수식 관계를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인수위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다웠다.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영어, 이 영어를 학교에서만 배우더라도 대학진학 및 일상회화에 있어 전혀 문제없게끔 만들겠다는 목표로 탄생한 이 영어몰입교육 정책은, 그러나 발상부터 세부적인 내용까지 엉터리 그 자체였다.

영어 과목을 영어로 수업할 수 있는 교사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영어 이외의 교과목을 영어로 수업할 수 있게 하겠다는 발상은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영어지도 전문인력 확충 방안 역시 해외 유학생을 공익근무요원으로 활용한다든지, 뛰어난 영어실력을 가진 주부들을 투입한다든지 하는 웃지 못할 것들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이 대통령과 인수위의 주장처럼 사교육을 잡는 데 쓰이는 대신 사교육을 살리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우리말로 가르쳐도 수업을 못 따라가는 학생들이 적지 않은데 하물며 영어수업이라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거다. 그렇다고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만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학생들은 방과 후 어디로 갈까? 또, 수업을 따라가는 학생은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인수위원장이 언론 앞에서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코미디, 영어몰입교육 정책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영어몰입교육 충격 가시기 전에 등장한 학교 자율화

공교육 포기·무한 입시경쟁 조장하는 '학교자율화 계획' 철회를 위한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지난 4월 2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범국민교육연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민주노총, 진보신당 주최로 열렸다.
 공교육 포기·무한 입시경쟁 조장하는 '학교자율화 계획' 철회를 위한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지난 4월 2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에서 범국민교육연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민주노총, 진보신당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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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몰입교육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부에서 터뜨린 또 하나의 대형사고는 바로 '4·15 학교자율화 조치'였다. 학교자율화 3단계 추진계획이라고 불린 이 정책은 교육자치 실현을 위해 교과부에서 일선 학교를 규제하고 있던 여러 항목들을 폐지하고 학교에 대한 자율권을 보장하며, 정부의 권한을 시도 교육청과 일선 학교장에게 위임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육자치 실현'이란 표현은 언뜻 듣기에는 타당한 것 같지만, 이 정책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려할 만한 것들 투성이었다.

학교자율화 3단계 방안, 그 1단계에서는 지금까지 일선 학교에서 규제되어 왔던 지침 29개를 폐지하는데, 이 규제중에는 '0교시 수업 및 오후 7시 이후 강제 보충학습 금지', '수준별 이동수업 금지', '영리단체의 방과 후 학교 참여 금지'와 같은 공교육 정상화 및 교육적 평등가치 실현, 학생 인권 보호를 위한 규제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규제가 있던 시절에도 일선 학교에서는 공공연히 0교시 수업과 방과 후 강제 보충학습이 이뤄져 왔다. 거기에 규제마저 없어진다면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초창기 촛불집회에 참가한 중·고등학생들이 들고 나왔던 피켓 구호를 기억한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수준별 이동수업은 학급당 학생 수가 많아 교사 한 명이 학생 모두를 살필 여건이 안 되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 어쩌면 필요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 교육 현실에서 수준별 이동수업은 학생들을 차별해 '계급화'시키고 그것을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실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영리단체의 방과 후 학교 참여가 이뤄진다면, 공교육이 사교육을 흡수하려고 만든 방과 후 학교가 도리어 공교육이 사교육에 먹히는 결과를 낳게 될 게 뻔하다. 이처럼 학생인권을 침해하고, 교육적 평등가치를 무너뜨리고, 사교육의 창궐 가능성을 무한하게 한 4·15 학교자율화 조치는 현 정권의 교육철학이 아메바 수준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사교육 개입 막는다더니... '대박'난 사교육계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10월 실시된 초·중학교 '일제고사' 당시 학생들의 야외체험학습을 허락한 전교조 소속 공립교사 7명에 대해 중징계(3명 파면, 4명 해임)를 결정한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신문로2가 서울시교육청앞에서 열린 징계 철회 및 공정택 교육감 퇴진 촉구 기자회견에서 파면통보를 받은 정상용 교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10월 실시된 초·중학교 '일제고사' 당시 학생들의 야외체험학습을 허락한 전교조 소속 공립교사 7명에 대해 중징계(3명 파면, 4명 해임)를 결정한 가운데, 11일 오후 서울 신문로2가 서울시교육청앞에서 열린 징계 철회 및 공정택 교육감 퇴진 촉구 기자회견에서 파면통보를 받은 정상용 교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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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30일, 우리나라 교육의 또 한 차례 홍역을 예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치러졌던 날이며, 동시에 공정택 현 서울시 교육감이 당선되던 날이기도 했다. 교육의 수월성을 중요시한 공정택 후보와 교육의 평등성을 중요시한 주경복 후보, 이 두 사람의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건 강남 3구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공정택 후보였다. 공정택 교육감은 당선 이후 여러 메가톤급 정책 카드를 꺼냈는데 그 중 돋보이는 건 단연 국제중학교 신설과 고교선택제였다.

공정택 교육감은 국제중학교를 세움으로써 양질의 교육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고, 조기유학을 억제하여 인재 유출과 외화낭비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을 들었다. 또한 사교육의 개입을 막기 위해 영어면접을 전형에서 배제하고, 추첨제를 도입하는 등 여러 대책을 마련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국제중에서 한다는 교육이란 건, 고작해야 영어로 수업하고, 제 2외국어 학습을 시킨다는 정도다. 겨우 13~16세인 아이들을 데려다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면 국제경쟁력이 생길까? 그 나이 또래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이미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지 않나. 사교육의 개입을 막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국제중 발표 이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 시장이 대박을 맞았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지 않은가.

고교선택제는 또 어떤가. 한 해 서울대 20명 보내는 학교와 서울대를 한 명도 못 보내는 학교 사이에서 학생들에게 진학할 학교를 고를 수 있는 선택권을 준단다. 대입에 욕심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라도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공 교육감의 발상은 일단 경쟁을 붙여 놓은 뒤 뒤떨어지는 학교에 지원한다는 건데, 이미 한 번 경쟁에 밀려 '하위고'로 낙인 찍힌 학교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게다가 그 낙인에서 벗어나고자 학교는 학생을 몰아붙이고, 학생은 숨이 막히고, 학부모는 허리가 휘어진다. 잔혹한 입시경쟁에 기름을 뿌린 격이다. 저소득층이 늘어나면 교육의 질이 떨어지니 강남에 임대 아파트를 짓지 말아달라는 공문을 보낸 공 교육감의 교육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정책들이다.

경쟁부터 시키고 보자는 '무대포 정신', 교육 망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지난 5월26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서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 철회를 촉구하며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을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지난 5월26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문화제에서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정책 철회를 촉구하며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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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다사다난했던 올 한 해, 그러나 아직 교육계의 진통은 그치지 않을 모양이다.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제고사 파문은 이제 시작인 듯하다. 이 일로 교사 4명이 해임됐고, 3명이 파면됐다. 이들 7명은 교사 자격이 박탈되고 다시 교사가 되려면 각각 3년, 5년 뒤에 임용고시를 치러야 한다. 가히 사형선고와 같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런 중징계가 떨어진 이유는? 학부모에게 일제고사 응시 여부를 묻는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일제고사 당일 학생들의 체험학습을 허락했다는 게 이유였다.

학부모에게 돈을 받아 그 돈으로 해외여행을 가고, 학생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교사에게도 고작 정직 3개월이라는 경징계를 내렸던 서울시교육청이 고작해야 학생과 학부모에게 일제고사에 대한 체험학습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파면과 해임이라는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나라가 군사정권 시절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된 바 있다. 이제 거기에 교육계마저 20년 전 참교육 운동을 벌인 전교조 교사들이 대량해직 당했던 그 시절로 회귀하면서 대열에 동참한 것이다.

평소 교육에 관심 많던 내가 올 한 해를 겪으며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교육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학이 없는 주체가 교육을 책임지게 되면, 반드시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대책없이 일단 경쟁부터 시키고 보자는 무대포 정신, 그러다 보면 공교육이 살아날 거라는 무사안일, 반대의견은 듣지도 않고 묵살해버리는 권위주의…. 그 안에 교육주체인 학생을 위한 정책이 있을 리 없다.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는 말에 담긴 그 의미를 현 정권이 깨닫지 못한다면, 앞으로 남은 4년 동안 학생들은 언제라도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들의 권리를 외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올해의 단어' 응모글입니다.



태그:#교육, #올해의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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