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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체 게바라의 사진이 표지로 쓰였다. 자세히 보면 체 게바라 사진이 찢어지고 훼손된 것을 찍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살았다면, 본인이 상품이 되어 버린 21세기를 뭐라고 했을까. 르네 뷔리가 찍은 사진
▲ 정당한 분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사진이 표지로 쓰였다. 자세히 보면 체 게바라 사진이 찢어지고 훼손된 것을 찍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살았다면, 본인이 상품이 되어 버린 21세기를 뭐라고 했을까. 르네 뷔리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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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화를 낼 줄 모릅니다. 다만, 자기 손에 움켜쥔 것을 나누자고 할 때만 분노하는 사람들. 눈 가리고 귀 막고 하란대로 살아가지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풍족한 21세기,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를 대며 세상의 부조리에 모르쇠하지요. 인내가 미덕이라고 허리띠를 조르고 기다림을 전략처럼 쓰겠다는 이 시대, 더 이상 속고만 있을 수 없지요. 때론 분노가 필요합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울컥 솟아오르는 기운에 감정을 조절하느라 호흡을 골랐어요. 잠깐 진정하고 다시 책을 펴들어 사진을 봤어요. 뇌에서 통제하려는 시도에 앞서 눈이 먼저 반응을 하네요. 바로 <정당한 분노>[2008. 가야북스] 맨 앞에 나오는 '천안문민주화운동' 사진이에요. 탱크행렬 앞에 한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어요. 19년 전, 천안문에서 탱크 앞을 가로막던 저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사진은 한국의 70~80년대와 겹치면서 더욱 아프게 다가와요. 세대가 달라 글과 사진으로나마 느끼는 저도 이정도인데, 그 시대를 온 몸으로 넘어온 세대들은 어떠할까요. 이제는 잊고 싶은 힘든 기억들일까요, 아니면 오늘을 제대로 살게 해주는 힘이 되고 있을까요. 이 책의 지은이 조병준 시인은 이렇게 적네요.

중국 천안문민주화운동과 광주민중항쟁

"오늘 나는 이 사진을 보며, 까마득한 기억 하나를 끄집어 올린다. 1980년 5월의 어느 날, 정말 비처럼 쏟아지던 사과탄과 지랄탄의 연기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굳게 닫힌 교문 앞에 서 있던 탱크를 기억한다. 서울 시내 곳곳에 서 있던 탱크들을 기억한다. 학교 앞 골목길에 숨어 교문 앞의 탱크를 지켜보다가, 탱크에 깔린 것처럼 비참하게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그날을 기억한다.

어느 새 까마득히 잊힌 서울의 봄,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지독한 검열과 수색의 틈새로 용케 빠져나와 몰래몰래 내 눈앞에 펼쳐졌던 광주의 사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내 온몸을 터지기 직전까지 채우던 감정 하나를 기억한다. 분노, 그렇다. 분노였다." - 책에서

서울 한복판에 탱크가 들어서고 대학생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게 불과 30년 전 이야기에요. 정권을 노린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대도시로 공수부대원들을 보내 자국민을 학살한 것도 현대사에 버젓이 일어난 사건이지요. 그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영화 <화려한 휴가>을 본 뒤, 이게 사실이냐고 물어보는 젊은 친구들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까요. 

스튜어트 프랭클린의 사진.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중국인들의 외로움과 고통이 느껴진다. 한 편, 탱크 앞에 홀로 우뚝 선 자유를 향한 의지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 "나를 밟고 가시오." 스튜어트 프랭클린의 사진.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중국인들의 외로움과 고통이 느껴진다. 한 편, 탱크 앞에 홀로 우뚝 선 자유를 향한 의지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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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과 꽃의 세대

총검술을 아는가요. 군대에 가면 총에다 대검을 끼워서 적을 한 방에 죽이는 기술이지요. 인중, 목, 심장 같은 급소를 노리며 찌른 뒤 검을 빼낼 때는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대검을 비틀어 돌리며 빼는 걸 배우지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전쟁이 벌어져 육탄전이 벌어진다면 칼로 상대를 죽여야 하니까요.

이러한 총검 앞에 꽃을 내보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러운 전쟁, 베트남 전쟁이 벌어졌던 1960년대 말, 꽃의 세대(flower generation)이라 불린 히피들은 총 대신 꽃을 들죠. 사진을 보세요. 어느 젊은 여학생이 미국 국방성 앞의 군인들에게 다가가 꽃 한 송이를 내미네요. 꽃이 총과 칼을 이길 수 있다는 그 순진함에 각박하게 살고 있는 제 모습이 무너져 내리네요. 누구나 한 번 쯤은 총 대신 꽃을 들고 살고 싶었던 적이 있으니까요.

세상에는 경쟁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도 전부 더 나은 짝을 차지하려고, 더 많은 음식을 얻으려고 싸웁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싸웁니다. 인간처럼 뒤에서 명령만 내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안락하게 지키며 젊거나 특정 계층 사람들만 죽음으로 내몰지 않지요. 사람들은 이러한 부조리에 침묵하고 국가공동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살아가지요.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런 순진무구함은 역사에서 통하지 않는다. 한 송이의 꽃이 전쟁을 단번에 멈추게 하지 못한다. 하지만, 수 천 장의 사진이 쌓인다면, 수 천 송이의 꽃이 바쳐진다면, 역사의 바퀴가 굴러가는 궤도를 바꿀 수도 있다. 저 꽃 한 송이는 의미 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정당한 분노’가 피워낸 꽃이라고 말하면, 꽃처럼 약한 것들이 때로는 총과 칼을 이길 수도 있다고 말하면, 그것 역시 너무 순진한 말일까." - 책에서

베트남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소만 바뀐 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지요. 가장 강한 나라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최첨단 과학을 쓰고 있지요.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탐욕 앞에 사람들의 눈은 멀기 쉽지요. 한국 역시, '이라크의 평화'라는 거짓 깃발을 들고 5년 동안 총을 들고 '더러운 전쟁'을 도왔습니다. 이달 20일에 완전 철수하는 자이툰부대에 대해 후손들은 뭐라고 평가할까요.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 대말, 미국 국방성 앞에서 총칼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민다. 저 순진함이 부럽고 놀랍다. 어느새 잊고 살고 있다. 마르크 리부가 찍은 사진.
▲ "당신의 꽃은 어디에 있나요?"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 대말, 미국 국방성 앞에서 총칼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민다. 저 순진함이 부럽고 놀랍다. 어느새 잊고 살고 있다. 마르크 리부가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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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담긴 분노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한다

매그넘 작가들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숨이 멎는 순간들을 잡아서 사진을 찍었지요. 그렇게 찍은 사진이 십만 장이 넘었지요. 그 가운데 ‘천사표, 조병준 시인’이 심혈을 기울여 31장을 뽑았지요. 거기에 사람냄새 풀풀 나며 막 심장에서 꺼낸 듯싶은 절절한 글을 더하여 뜨거운 책으로 묶였네요. 사진에 들어있는 사연과 인상이 하도 가슴 아려서 보는 사람들은 순간 ‘헉’ 하겠네요.

올해, 전국에서 피워낸 촛불이란 아름다운 꽃을 생각해봅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외치며 사람들은 정당한 분노를 촛불에 담아 캄캄한 밤을 밝혔지요. 치밀었던 분노를 묵묵히 눌러가며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 사과를 한 정부는 촛불이 사라지자마자 바로 탄압에 들어갔지요. 인권이나 자유, 민주주의는 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정치권력이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배울 수 있는 교육시간이었죠.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고요.

여전히 가난, 질병, 전쟁, 폭력, 소외, 억압, 탐욕, 차별로 가득한 세상에 분노할 가슴은 지켜야겠지요. 분노가 자신을 삼키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선한 분노'의 불씨까지 꺼뜨려서는 안 되지요. 사랑이 담긴 분노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하니까요. 비록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살 권리가 있으니까요.

세상이 그나마 이정도일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탱크 앞에 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군수산업에 물 들은 전쟁에 사람들이 휩쓸리지 않는 까닭도 아직 총 대신 꽃을 들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은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지요. 팍팍한 현실에 지쳐서 꿈을 서랍장 안에 감추고 아무렇지 않고 있다가 이 책을 읽으며 깊게 반성해봅니다.


정당한 분노 - 때로는 분노가 우리의 도덕률이 될 때가 있다

조병준 지음, 매그넘 사진, 가야북스(2008)


태그:#매그넘, #정당한분노, #조병준, #광주민중항쟁,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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