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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부천은 지금 겉으로는 평온하다. 하지만 27개 고등학교 중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선택했던 19개 고등학교의 역사교사들은 깊은 시름과 고민에 빠져 있다. 경기도 교육청은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교육청 다녀온 교장선생님, 금성교과서 교체 압박

 

며칠 전 교장 선생님들이 경기도교육청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던 것일까? 다음날 교감선생님께서 역사 교사들을 전부 불렀다. 근현대사 교과서 교체 주문이 오는 12월 10일(수)까지 가능하다는 공문이 내려왔으니 교과서 재선정을 위한 교과협의회를 하라고 했다.

 

서울시교육청이 고등학교들의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바꾸게 하기 위해 규정을 어겨가며 주문 기간을 연장하고 교체를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12월부터는 출판사에서 인쇄에 들어가기 때문에 11월만 넘으면 안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12월이 되어 안심하고 있던 우리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우리는 교과협의회를 했다. 교감선생님께서는 친절하게도 근현대사 6종 교과서 중 하나만 못 구하신 채 5종을 건네주셨다. 나는 이미 교과서가 정해진 후 이 학교에 부임해서 다른 근현대사 교과서를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이날 처음 다른 출판사 교과서들을 보았다.

 

다시 비교해 본 우리들의 결론은 원래 쓰던 교과서(금성 교과서)가 가장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모든 교과서가 대동소이하겠지만, 학생들의 눈에 쏙쏙 들어오도록 편집이 잘 되어 있고, 자료가 풍부하며, 수능과 수능모의고사에 인용된 자료, 사진, 본문 등이 이 교과서에 이미 있는 내용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말씀드렸지만, 교감선생님은 마음에 드는 교과서의 순위라도 정하라고 말씀하셨다. 강압적이 아니라 간곡하게 부탁한다고 하셨다. 우리는 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 후 몇 번이나 지루한 면담이 반복되었다. 교장선생님과도 대화했다. 우리 학교 역사교사들은 결국 다른 교과서를 선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과서 교체를 위한 학교운영위원회가 오늘(8일)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장은 무소불위... 교과서 교체 거부는 절망적

 

 

생전 처음 부천지역 역사교사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회의에 나갔다. 하지만 3시간에 걸친 회의 끝에 알게 된 것은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서울에서 근현대사 교과서 교체 요구가 나올 즈음 부천의 몇 개 고등학교에서도 교장, 교감선생님들이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머지 고등학교들은 조용했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들께서 경기도교육청 회의에 다녀오신 이후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를 쓰고 있는 19개 고등학교 전체에서 교과서를 바꾸라는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선정절차는 이렇다. 먼저 해당 교과 교사들이 여러 검인정 교과서들을 비교해 보고 1, 2, 3위 순위를 매겨 채점표와 함께 학교운영위원회(이하 학운위)에 제출한다. 학운위는 여러 명의 교사, 학부모, 지역인사들로 구성되는데 1, 2, 3위 교과서 중 하나를 채택하고 교장선생님이 최종 선정을 한다.

 

보통 학운위는 교사들이 1위로 선정한 교과서를 채택한다. 위원들이 모든 과목의 교과서를 다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전문가이기 어렵고, 교사의 교재 선택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은 학운위에서 통과된 교과서를 거부하고 다른 교과서를 선택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

 

결론은 교사들이 재선정을 거부해도 교장 직권으로 학운위에 교과서 제출 안건을 상정할 수 있고, 설사 내가 감동적으로 설명해서 학운위가 교체를 거부하더라도 교장선생님이 이를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도 아무런 제재를 가할 수 없다고 한다. 워낙 학교라는 곳이 교장의 재량이 거의 무한대로 허용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 학교에서는 학운위가 열릴 것이다. 나를 포함해 모든 역사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기본적으로 교장선생님의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강한 학운위를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전망은… 절망적이다.

 

학교가 이렇게 외압에 흔들려도 괜찮은 건가

 

어느 학교는 1인 시위를 하고, 어느 학교는 피켓 시위를 하고, 어느 학교는 호소문을 나누어 준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처럼 교과서는 비슷비슷한데 왜 이러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량한 교사 따위들의 자존심 때문에 왜 교장을 힘들게 하고 학교에 분란을 일으키느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이 우리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느끼실까? 좋은 게 좋은 것이니 그냥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실까? 우리가 수업에 쓸 교재를 우리 내부의 문제 제기가 아닌 외부의 강압 때문에 바꿔야 한다면 순순히 바꿔주는 것이 옳다고 하실까?

 

게다가 더욱 우려되는 것은 교과서 문제가 근현대사 교과서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근현대사가 평정(?)되면 다음은 반기업적인 경제 교과서가 문제가 될 것이고, 월북작가들의 작품을 담은 문학 교과서도 문제가 될 것이다.

 

나는 두렵다.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역사 교과서에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광주사태'가 될 것만 같아서. 5·16 군사정변이 '5·16혁명'이 될 것만 같아서. 마지막으로는… 일제시대에 우리는 근대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평가가 나올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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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근현대사, #부천, #고등학교, #금성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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