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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 등이 주최한 <한국 근현대사 특강>이 2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장에서 열렸다. 이날 특강 강사로 이만열 명예교수가 나섰고, 역사교사 100여 명이 강연을 들었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이 주최한 <한국 근현대사 특강>이 2일 저녁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장에서 열렸다. 이날 특강 강사로 이만열 명예교수가 나섰고, 역사교사 100여 명이 강연을 들었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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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자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어느덧 70을 넘긴 나이. 50년 가까운 세월을 역사와 함께 뒹굴었고, 대학 교수 자리에서 정년퇴직을 한 건 2003년의 일이다. 수십 년 동안 역사를 오늘에 불러 끝없는 대화를 나눴건만, 군 장성 출신이 현대사 특강을 하는 '수상한 시절'은 그를 다시 강단으로 소환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예전엔 원고 없이도 두 시간 강연은 충분히 했다"던 그는 검은 글씨로 빼곡한 13쪽의 원고를 들고 나왔다. 원고의 제목은 <독립운동사의 이해>. 이 명예교수는 돋보기를 쓰고 원고를 읽었고, 부연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안경을 벗고 말했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역사를 논하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다.

노역사학자 앞에는 100여 명의 역사교사들이 앉았다. 이번엔 분필이 아닌 펜을 들었다. 학교에 "버젓이 역사를 전공한 자신들이 있는데도, 비전공자들을 불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답답한 시대'"에 이들은 다시 책상에 앉았다.

자신들이 심사했던 교과서를 향해 이제 와서 '좌편향'이라 공격하는 정부의 논리를 수긍해서가 아니란다. "명백한 역사를 눈앞에 두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에 맞서, 역사와 학생들을 지키고" 싶어서란다. 그래서였을까. 늦은 저녁 일과를 마치고 다시 책상에 앉아 2시간 넘게 이어진 강연을 듣는 내내 그들은 진지했다.

노학자와 역사교사들 '열공 모드'로 통했다

이렇게 수상한 시절에 다시 강단에 선 노역사학자와, 답답한 시절에 다시 책상에 앉은 역사교사는 '열공 모드'로 통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던 기자 역시 그들 틈바구니에 살짝 끼어 앉았다.

전국역사교사모임 등이 주최한 '역사교사를 위한 한국 근현대사 특강'이 2일 저녁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관에서 시작됐다. 이날 특강이 열린 교육관의 100여 좌석은 역사 교사들로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이날 특강 현장의 분위기는, 국민 세금 3억 원과 강사 143명을 투입한 서울시교육청의 현대사 특강과는 내용과 질 등 모든 면에서 판이했다. 서울시교육청의 특강이 비전공자가 뚜렷한 자료도 없이 역사를 논해 수많은 학생을 졸게 했다면, 역사교사모임의 특강은 정통한 전문가가 풍부한 자료를 갖고 눈 초롱초롱한 교사들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사진은 지난 9월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을 주제로 기조강연하는 모습.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사진은 지난 9월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근현대사학회 학술대회에서 '한국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을 주제로 기조강연하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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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강단에 섰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는 교사들이 맘에 들었던 것일까. 이만열 명예교수는 예정된 2시간 강연을 쉬는 시간 없이 진행했으면서도 "할 말 많은데 좀 더 합시다"며 수업을 연장했다. 이에 교사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선생님 말씀'을 따랐다.

역시 일제시대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방대했다.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해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강점기 국권수호운동까지. 지역으로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주 지역으로 나뉘고, 시기별로도 구한말과 3.1운동 이전과 이후 그리고 1940년대가 다르니 이걸 어떻게 2시간 안에 마칠 수 있나. 게다가 독립운동 조직의 이념과 조직이 다종다기한데.

이런 독립운동사를 강연하며 이 명예교수가 강조했던 건 바로 "민족독립운동 과정을 통해 공화주의가 정립되고, 근대적 사상 이념의 수용, 헌법체계의 수립과 근대적 정당정치 방법이 실험됐다"는 점이다. 즉 독립운동을 거치면서 근대국가를 이뤄갔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가 우리의 근대화에 큰 보탬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 반박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뉴라이트 진영의 '1948년 건국절'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뉴라이트, 이승만 세우면서 왜 그의 역사의식 못 배우나"

이어 이 명예교수는 구체적 사례를 들며 정부와 뉴라이트 진영의 건국절 주장과 역사교과서 '좌편향' 공격을 비판했다.

이 명예교수는 "이승만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때 '국회와 정부는 3.1운동으로 만들어진 임시정부의 재건이다'라고 말했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1948년 관보 1호를 내면서도 '민국 30년'이란 연호를 사용했다"며 "(뉴라이트는) 이승만 세우기를 하면서 왜 그의 역사의식은 받지 않느냐"고 일갈했다.

이어 그는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데, 왜 우리는 제헌헌법에도 나오는 역사도 없애버리느냐"고 탄식했다.

이 명예교수는 뉴라이트 진영 '교과서포럼'이 만든 '대안교과서'의 한 대목을 읽어주며 정부의 역사교과서 '좌편향' 공격이 얼마나 허구인지 꼬집었다. 아래는 이 명예교수가 읽어준 대안교과서의 한 대목이다.

"1926년에서 1935년까지 1만8000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는데, 그중 많은 수가 공산주의자였다. 일제는 공산주의 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했으며 그로 인해 민족독립운동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높은 평판을 얻었다."

이 명예교수는 교사들에게 "이게 대안교과서에 나오는 것인데, 내가 다 놀랐다"며 "어떻게 공산주의를 이렇게 칭찬하고 있는가"라고 실소했다. 이에 100여 명의 역사교사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또한 이 명예교수는 뉴라이트와 보수우익 진영에서 그야말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김일성을 대안교과서가 어떻게 미화(?)하고 있는지도 그대로 읽어줬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이 이끄는 소규모 유격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보천보에 침투해 경찰주재소, 면사무소, 우체국 등의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 사건은 국내 신문에 보도되어 민족의 사기를 높였으며 김일성이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역사교사들은 "우와~"하는 탄성을 터뜨리며 뉴라이트가 만든 '대안교과서'의 '좌편향'을 조롱했다. 이런 교사들의 반응에 탄력을 받았는지 이 명예교수는 이승만에 대한 '대안교과서'의 기술도 읽었다.

"김일성이 민족지도자? 뉴라이트 교과서 진짜 좌편향이네!"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갈등과 분열은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 이념의 차이, 지역감정 등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갈등의 중심에는 이승만의 독립운동 노선으로서 외교 노선이 있었다."

이 명예교수는 "이게 사실대로 쓴 것이긴 하지만 정말 놀랍다"며 "좌편향으로 공격받는 다른 교과서에서 이승만을 이렇게 '폄훼'한 부분이 있느냐"고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역사 교사들은 그냥 웃고 말았다.

이렇게 시종일관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는, 현장의 역사교사들에게 조롱과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이날 강연을 들은 김나연(33·가명) 교사는 "정부와 보수우익 진영의 교과서 공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는 이번 강연으로도 드러났다"며 "정부는 멀쩡한 교과서에 수정 압박을 가하기 전에 뉴라이트가 만든 대안교과서가 얼마나 좌편향적인지 검사하라"고 비판했다.

또 박아무개 교사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역사도 바꾸고 싶어 하는 영혼 없는 사람들이 요즘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다"며 "역사는 그들처럼 결코 가벼운 대상이 아니라는 걸 오늘 강연에서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을 들은 기자의 소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생들은 전면에서 '졸음 투쟁'으로 서울시교육청의 현대사 특강을 무력화하고, 교사들은 뒤에서 '열공'으로 교과서 수정에 맞서니, 우리나라 공교육 의외로 믿음직스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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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현대사특강, #이만열,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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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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