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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총학생회 선거운동이 한창인 서울 고려대 캠퍼스 전경.
 2008년 총학생회 선거운동이 한창인 서울 고려대 캠퍼스 전경.
ⓒ 이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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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대학가의 총학생회 선거결과는 한마디로 '실용 진영의 현상유지와 운동 진영의 계속된 몰락'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미국발 경제위기 등으로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큰 폭으로 요동쳤음에도 대학생들의 이념지형은 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거에 대한 무관심도 계속됐다. 출마자가 나오지 않아 선거 자체가 무산된 대학이 속출했고 선거규정을 변경해 당선요건을 대폭 낮추는 대학도 생겨났다. 투표율 미달로 연장투표를 하거나 단일선본이 선거를 치른 대학도 부지기수였다.   

일부 언론은 몇몇 대학에서 운동권 성향의 선본이 당선된 것을 두고 "대학가 운동권 부활"이라는 논지로 크게 보도했다. 심지어 <세계일보>는 지난달 24일 "운동권 총학, 과거로 돌아가선 안 된다"며 경고성 사설까지 쓰는 다급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실제 대학가의 분위기는 이와 온도차가 크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현실과 다른 섣부른 보도"라는 목소리가 많다. 전형적인 침소봉대의 오류를 범한 것이거나 대학사회의 본질적 모습을 살피지 못한 수박 겉핥기식 취재를 한 결과라는 것이다.

[여전한 '실용' 득세] '촛불'에도 불구, 실용진영 강세 더 두드러져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 있는 총학생회 선거관련 홍보물. 올해 연대 총학 선거는 사상 처음으로 비운동권 선본 2팀이 출마해 각축을 벌였다.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 있는 총학생회 선거관련 홍보물. 올해 연대 총학 선거는 사상 처음으로 비운동권 선본 2팀이 출마해 각축을 벌였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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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학 총학생회 선거 결과를 살펴보면, 올해도 어김없이 실용 진영의 강세가 이어진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서울대는 지난 촛불집회 때 미지근한 대응으로 원성을 샀던 '실천가능' 선본이 올해도 여유 있게 재집권했다. 연세대에서는 운동권 선본이 도전장도 내밀지 못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한열·노수석 등 수많은 민주화 투사를 배출한 연세대에서 비운동권 선본 2팀의 경합 구도로 선거가 치러졌다니,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매년 '운동권 강세'가 이어지던 이화여대도 비운동권 선본이 '정권'을 잡는 파란을 일으켰다. 당선된 '이화 We Can' 선본은 '특정 정치색을 대변하지 않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중앙대와 광운대는 사상 처음으로 비운동권 선본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국민대·한국외대 등 일부 대학에서 운동권이 '정권탈환'에 성공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례다. 이마저도 학생들의 '운동권 선호'에 따른 선택이라기보다 기존 비운동권 총학의 무능과 부패로 인해 얻은 반사이익의 측면이 강하다. 국민대 재학생 박상익(25)씨는 "하던 사람이 매번 다시 출마하는 기존 총학에 대한 불신이 작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나머지를 보자. 운동성향의 총학이 당선된 대학은 하나 같이 특징이 있다. 학우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나홀로 선본'이 쓸쓸히 선거를 치른 곳(건국대·홍익대 등)이 대부분이다.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촛불집회 및 이명박 정부의 계속된 국정혼란은 대학가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대학생들의 주된 반응이 그렇다.

윤서한씨(24·광운대)는 "촛불집회 때 20대가 제일 잠잠하다고 말이 많았는데 지금도 대학생들의 정치 무관심은 여전히 큰 상태고, 이는 총학 선거 결과에도 그대로 나타났다"며 "극심한 경제위기는 되레 대학생들의 활동위축과 사회적인 무관심을 부추기고 있을 뿐 저항의식이 고취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명은씨(24·연세대)도 "'운동권 부활'이라는 언론보도를 보고 의아했다"며 말을 이었다.

"우리학교만 보면 전혀 그런 분위기가 없다.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다들 자신의 취업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지고 있다. 워낙 힘드니까 스펙 올리고 취업하고 보자는 말들이 많지, 이를 넘어서는 대안을 찾으려는 모습은 아직까진 보기 힘들다."   

[정체된 '진보'] '총학 패권의식'이 운동권 불신 자초했다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이 2009년 총학생회 선거에 내건 공동공약 내용.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이 2009년 총학생회 선거에 내건 공동공약 내용.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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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실용을 앞세운 비운동권 총학의 거침없는 대학가 점령은 불가항력적인 면이 많아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실용진영의 득세와 운동진영의 참패를 사회적인 환경 탓에만 돌릴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운동권을 등진 대학생들의 표심에는 변화와 혁신을 거부한 '정체된 진보'의 모습에 실망한 면도 적잖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올해 조선대에서 벌어진 선거부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1번 선본(기존 총학생회 출신·한총련계열)은 상대 측 참관인이 없는 사이 수백표로 추정되는 부정표를 만들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선거관리를 맡고 있던 총학생회는 상대 측의 문제제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를 그대로 강행했다. 그렇게 운동진영의 '총학 패권'은 계승됐지만, '진보'의 핵심 가치인 민주적 절차는 처참히 무너졌다(결국 부정선거는 탄로 났고, 선거는 무효처리 됐다).

이처럼 오랫동안 총학생회를 이끌어오던 운동진영의 '총학 패권의식'은 학우들의 불신을 자초한 주범으로 작용한 사례가 많다. 하지만 이는 타성처럼 굳어져 있어서, 부당한 행위도 당연한 것처럼 합리화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중앙대에서 일어난 사상 첫 '실용 총학'의 집권도 이를 잘 보여준다. 운동권 선본은 탄탄한 조직력과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바탕으로 학우들에게 다가가는 노련함을 보였으나, 상대선본의 '비운동권' 구호 하나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한 재학생은 "기존 운동권 총학에서 '진보'답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여와 학우들의 실망이 극에 달해 있었다"고 말했다.

전남대의 사례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전대는 5년 동안 '우리학생회'(NL계열)가 총학을 장기집권하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단선으로 선거가 치러졌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반대표가 21% 가량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김수지 <전대신문> 편집장이 <독설닷컴>에 올린 글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갈수록 학생회에 대한 불신은 커져만 간다. 찬성을 찍을까 반대를 찍을까 고민하다 찬성을 찍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래도 학생회가 있긴 있어야지'하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양심을 배반한 거다. 매년 '우리학생당'에서 비슷비슷한 자질의 후보들이 비슷비슷한 사업들을 시행하고 있어서 이제 지칠 때도 됐다. 많은 학생들이 지치고 질렸을 것이다. 그들의 이념성에 대해서 뭐라고 할 자격은 없으나 지금의 총학생회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학생회 선거에서의 패권 유지가 운동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변질돼는 순간, 학생운동의 순수성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대학생들은 "운동권에게서 변화하는 진보의 모습이 아니라 부패하고 정체된 한나라당의 모습을 많이 봤다"고 성토한다. 운동진영으로서는 처절한 반성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계속되는 무관심] "후보 간 경쟁보다 '선거 무산' 막는 것이 급선무"

서울 경희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성향의 한 선본이 내건 현수막.
 서울 경희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비운동권 성향의 한 선본이 내건 현수막.
ⓒ 네모난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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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적인 문제는 '학생회 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투표조차 안 하는 상황에서 "운동이니, 실용이니"하는 논의는 부차적인 사안이라는 것이다.

춘천교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선거 출마자가 나오지 않아 2년 연속 '텅 빈 총학'을 맞게 됐다. 재학생 장하림씨(22)는 "임용시험 준비 등으로 바빠서 그런지 총학생회는 물론 과학생회도 잘 안하려 하는 분위기"라며 "후보조차 나오지 없는데 선거에 대한 관심이 있을 리 있겠나"라고 말했다. 상지대 역시 출마자가 없어 선거 자체가 무산됐다.

선거 출마자가 많은 대학에서도 '무관심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제 시간'에 투표를 마친 대학은 극히 소수였다. 연장투표는 일상적인 일이 됐다.  

서울대는 올해로 '6년 연속 연장투표 실시'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정식 투표 기간 동안에는 37% 가량의 저조한 투표율에 그쳤으며, 연장투표 마지막 날인 지난 11월 26일 밤 11시가 돼서야 50% 투표율을 넘겨, 겨우 개표를 진행할 수 있었다. 재학생 정성헌(28)씨는 "대학 내에 개인주의가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고, 취업난으로 인해 자기일이 바쁜 상황이라 그런지 매년 선거는 학생들 사이에서 관심순위 밖"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도 투표율 미달로 인해 투표 일정을 지난 11월 28일까지 하루 연장했다. 연장 기간 동안 정문에까지 투표소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투표독려를 한 결과, 가까스로 50%의 투표율을 넘길 수 있었다. 서강대는 3년 만에 선거가 경선으로 치러져 두 선본 간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으나, 올해도 어김없이 투표율이 미달돼 1일까지 연장투표를 실시했다.   

학생들의 무관심이 지속되자 '선거 무산'을 막기 위한 고육책도 이어지고 있다. 신라대는 올해부터 투표율 33% 이상(단선일 경우, 경선 시에는 40% 이상)에 과반의 찬성(기존 50% 이상 투표율, 과반 찬성)으로 당선요건을 낮춰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매년 연장투표 내지는 선거무산으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동서대 역시 단선일 경우 '투표율 30% 이상, 과반 찬성'을 규정으로 선거를 치르고 있다.  

서울의 한 4년제 대학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을 맡아 선거를 관리․감독했던 김아무개(23)씨는 "육성홍보·문자메시지·간식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도 투표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학우들은 소수였다"며 "선거가 후보들 간의 경쟁이라기보다 투표율 그리고 무관심과의 전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의 대표자를 뽑는 권리를 행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0초 정도인데, 이마저도 안 하고 귀찮은 듯 지나가는 학우들을 보면 솔직히 너무 속상하다"며 씁쓸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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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태그:#총학생회 선거, #총학생회, #대학생, #대학, #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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