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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은 도시락은 불황에도 식은 사랑에도 특효약입니다.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은 도시락은 불황에도 식은 사랑에도 특효약입니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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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르르릉'

새벽 여섯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곁에서 자는 남편이 깰세라 살그머니 일어나 부엌으로 향합니다.

조용조용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행여 도마소리가 날까 싶어 칼질도 조심조심. 칙칙소리를 내며 밥이 끓는 동안 계란말이를 만들고, 지난밤 미리 만들어 두었던 멸치 볶음과 오징어채 무침, 우엉조림을 콩깍지 만한 반찬그릇에 얌전하게 담다보니 어느새 부엌창이 부옇게 밝아 옵니다.

남편의 도시락을 싸다보니 3년 전 수능을 보러 가는 작은 아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던 날이 생각납니다. 수험생의 두뇌 활동을 고려해 5대 필수 영양소(?)는 물론 후식으로 먹을 과일과 차까지 완벽하게 구색을 맞추었던 도시락이었지요.

온갖 재주와 정성을 다 들인 도시락에 화룡점정 하는 마음으로 '이 도시락을 먹고 힘내서 시험 잘 보렴. 사랑한다. 아들아'라는 쪽지를 넣고 있는데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합니다.

"어지간히 하지. 아주 수를 놓는구먼. 애 도시락 하나 싸면서 무슨 유난을 그리 떠는지. 남편이 도시락 싸달라고 하면 싸우자고 덤벼들 여자가 아주 아들한텐 껌벅 죽어요."
"당연하지. 그 나이에 청승맞게 도시락은 무슨 도시락이야. 마누라 귀찮게 할 궁리마시구요. 맛있는 거 사 드세요."

생각해보면 결혼 23년 동안 남편을 위해 도시락을 싸줘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어렴풋이 야근을 하는 남편을 위해 부서원들과 함께 먹을 야식 도시락을 몇 번 준비한 기억이 나긴 하지만 그것 역시 남편을 위해 물불(?) 안 가리던 신혼 때가 전부였거든요. 

대부분 직장인들처럼 구내식당이나 회사 근처 밥집에서 점심을 해결해 온 남편은 점심식사 고민이 지겨워 질 때면 도시락 이야기를 한번씩 꺼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도 집에 있어봐. 만날 집에서만 먹는 밥이 얼마나 지겨운 줄 알아? 난 당신처럼 매일 밖에 나가 사먹으면 좋겠구먼. 그러니 도시락은 꿈도 꾸지 마세요"라며 말도 꺼내지 못하게 사전 진압에 나서곤 했답니다.  

집에서 만든 웰빙 도시락으로 건강도 지갑도 모두 지켜요.
 집에서 만든 웰빙 도시락으로 건강도 지갑도 모두 지켜요.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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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그런 저의 고집이 꺾이고 말았답니다. 요즘 뉴스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 직장인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자주 올라오다 보니 저 역시 솔깃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뭘 먹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직원과 사이도 돈독해지고, 돈도 절약되지만 무엇보다도 식당음식은 믿을 수가 없었거든요. 원산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식재료에다 인공감미료로 맛을 내니 건강에 좋을 리가 없잖아요."
"집에서 싸온 음식이라 일단 안심되지요. 건강에도 좋고 절약도 되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뉴스를 보던 남편이 애절한 시선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아내의 거절이 두려워(?) 선 뜻 말을 꺼내지는 못하지만 그 시선은 분명 '여보, 나도 도시락 싸주면 안 될까?'였지요.

최근 TV에서 본 식품 관련 고발 프로그램 때문에 장보기는 물론 밖에서 뭘 사먹기가 망설여지던터라 이번만큼은 남편의 애절한 시선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점심값도 문제지만 사먹는 음식에 대한 불안이 더 크게 작용을 한 것입니다.

철철이 값비싼 보약은 못해 먹일지언정 몸에 해롭다는 음식을 찜찜한 마음으로 먹게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집에서 먹던 반찬에 밥만 싸줘도 되지? 노력은 하겠지만 정 힘든 날은 못해줘도 뭐라 하기 없기야. 보온 도시락 다 버렸는데 당신 도시락 사러 가야겠다."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말에 상이라도 받은 어린애처럼 표정이 밝아지는 남편. 당장 도시락을 사러가자며 제 손을 잡습니다. 자기가 들고 다닐 보온 도시락을 고르는 남편은 멋진 양복이나 구두, 심지어는 자기가 좋아하는 골프채를 고를 때보다도 더 행복해 보입니다.

교과서에 붉은 김치 국물을 흘려주던 노란 양철 도시락이 문득 그리워진 것일까요? 도시락을 사오면서 남편이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다고 합니다.

"콩으로 하트 같은 것은 그려주지 않아도 되는데, 솔직히 감히 바라지도 않는데, 먹고 싶은 반찬이 있어. 밥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 얹어주고 반찬으로는 분홍색 소시지 부침 좀 해주면 안 될까?”
"맞다. 옛날엔 그게 그렇게 부러웠지. 당신도 그게 로망이었구나. 계란 프라이랑 소시지 부침. 나도 그랬는데. 하하하."

오십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도시락 주머니를 들고 남편이 출근을 합니다. 밥 위에 콩으로 만든 하트도 없고, 낯간지러운 사랑의 쪽지도 없고, 남편이 원하던 분홍색 소시지부침도 넣지 않았지만 남편은 아주 기뻐하며 도시락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났을 시간 쯤 문자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점심 잘 먹었어. 고마워.'

문자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어지간한 일은 전화로 대신하는 남편이 문자를 보내다니 사랑 가득 정성 가득 마누라표 도시락이 약효를 제대로 발휘하는 모양입니다.

새벽잠과 맞바꾼 마누라표 도시락. 오늘 점심은 뭐 먹을까에 대한 원초적인 고민에서 해방되고 건강과 가벼워진 주머니까지 지켜주니 마음 춥고, 몸 춥고, 지갑속도 추운 이 계절을 이기는 방법으로 최고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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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불황, #웰빙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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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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