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서 머리에 얄팍한 지식들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허세와 무지로 점철되었던 과거 나 자신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아프게 되돌아오곤 한다. 어수선한 IMF 위기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내 또래의 아이들은 ‘볼거리 한마당 세대’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대여점을 들락날락거렸다.

부풀었던 경제가 거품처럼 사그라지면서 각종 예술 영화, 문학 등에 대한 붐도 꺼지게 되었고, 서점이나 극장으로 가던 발길들은 저렴한 대여점을 찾기 시작했다. 만화가나 군소 작가에겐 치명타였겠다만 우리들은 때 아닌 특수를 누리며 시간만 나면 영화를 보곤 했다. (지금은 점포 정리를 하는 대여점이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자체적으로 영화 정보지를 발간할 정도로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것이다) 나는 특히 ‘쌈마이’ 액션 영화를 좋아했다.

<다이하드>를 보며 러닝셔츠 차림의 뉴욕 형사와 함께 적들을 일거 소탕하기도 했으며, <트루 라이즈>를 보며 지금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어있는 아놀드와 함께 탱고 춤을 추다 전투기를 몰며 테러리스트들을 박멸하기도 했다. 만약 헐리우드에서 친미반공 소년대원을 모집했다면 나는 한국 대표로 뽑혔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다이하드>의 런닝구 형사가 머나먼 전설로 퇴색될 무렵, 존 맥클레인이<다이하드 4.0>으로 돌아왔다. 머리숱은 예나 지금이나 없긴 했어도 박력 넘치는 뉴욕 형사를 기대했던 관객들은 명퇴 1순위로 곱게(?) 늙은 초췌한 몰골의 브루스 윌리스를 보고 적잖이 실망했으리라.

거죽이야 어쨌든 맥클레인은 여전히 뒹굴고 몸을 내던지며 제 몸 혹사하길 밥 먹듯 하는데, 그 와중에도 비장하게 가족과 나라를 지키라며 미국 공화당의 슬로건을 은근슬쩍 선전하기도 한다(안 그래도 존 매케인과 이름이 비슷한 존 맥클레인 역의 브루스 윌리스 역시 공화당 지지자이다).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과 오락 같은 화면 구성으로 난리 블루스를 추던 영화는 결국 ‘국가 안보를 잘 지킵시다’란 교훈을 남기고 썰렁하게 끝난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히어로란 이런 것인가?

명색이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히어로 영화가 우파(右派)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하지 않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순 없는 것일까, 고민하던 중에 마침 미학 수업으로 출강 나온 진중권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예의 미소를 싱긋 머금은 채 대답했다.

“뭘 그렇게 거창한 고민을 하세요?”

거창한 고민이 돼버린 히어로 영화의 숙제
   
이러한 히어로 영화가 갖는 문제점은 사회적, 혹은 개인적 폭력이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폭력을 택한다는 것에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로 상징되는 고대의 형법 제도는 사실 기득권층의 현상 유지를 위한 ‘무기와 경고’ 역할로 작용했다.

중세로 시대가 전환되면서 형법과 처벌은 종교와 밀착되었고 그에 따라 더욱 잔인한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유럽 각국에선 집단 히스테리적인 마녀 사냥에 나섰으며 진(gin)의 발달로 급상승한 범죄율을 다스리기 위해 영국의 경우 신체를 절단하는 식의 고문을 공개적으로 하기 이르렀다.

그렇지만 그들도 이런 잔인한 형벌로 범죄를 억누를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형벌의 잔혹함은 점차 사그라졌다. 그러나 폭력과 보복의 망명은 여전히 지금 시대의 영화 속에서 떠돌고 있다.

 영화『공공의 적 1』의 한 장면  

▲ 영화『공공의 적 1』의 한 장면   ⓒ 시네마서비스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에 등장하는 형사 강철중은 한국형 히어로라고 꼽기에 무리가 없다. 치밀한 과학적 지식과 현란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라스베가스의 CSI 요원들과는 달리, 강철중은 그저 자신의 튼튼한 몸으로 역경을 강행 돌파한다. 그가 활약하는 <공공의 적>은 단순한 영화다. 경찰이다 뿐이지 ‘나쁜 놈’과 매한가지인 형사와 위선적이고 패륜적인, 누가 봐도 ‘나쁜 놈’이다 싶은 범인 둘이 누가 더 ‘나쁜 놈’이냐를 놓고 피터지게 싸운다는 내용인데, 이런 기나긴 권선징악의 응징을 보며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것은 관객 자신이 사회 속에서 공감하면서도 쉽게 행하지 못했던 것을 강철중이 속 시원하게 대신 해줌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대리만족에 가깝다. 그것은 과연 사회적인 의미에서 정당한 쾌감인가? 강철중을 통한 대중들의 대리만족을 거꾸로 뒤집으면, 우리 사회가 폭력 해소의 꿈을 두 시간여짜리 필름 영상물에 기대어 꿀 수밖에 없을 정도로 경직되었음을 뜻한다.

영화로 인한 현실 개혁의 가능성을 너그럽게 인정하더라도 강철중의 방법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질 않는다. <공공의 적>은 언뜻 보면 돈과 권력이란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대항하는 한 개인의 고군분투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홍길동이나 임꺽정이 활약하던 조선 시대도 아니고 기업과 국가 단위의 조직적인 문제가 산적해있는 지금의 상황을 영웅적인 개인 한 명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강철중이 고생을 함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바로 폭력에 있을 것이다.

폭력의 대물림은 이미 많은 영화들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 주제였다. 원신연 감독의 <구타 유발자들>는 우스꽝스럽고도 섬뜩하게 저주와 같은 폭력의 악순환을 그려냈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가 지적한 ‘계몽의 변증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도르노는 서사시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를 예로 들며 신화의 타파를 위해 등장한 계몽이 다시 신화로 전락하는 과정을 현대에 대입시켜 설명한 바 있다.

폭력을 일삼는 ‘악의 무리’를 징벌하기 위해 강철중은 그들보다 더 독하고 강한 폭력으로써 대항한다. 그러나 강철중이 그렇게 처단한 건 수많은 ‘악의 무리’ 중 하나일 뿐이고, 강철중과 같은 폭력적인 대책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폭력은 더욱 늘어난다. 결국 강철중은 외양만 다를 뿐 그 자신이 퇴치하려 했던 ‘악의 무리’로 편입된 셈이다. 

영화『구타유발자들』의 한 장면  

▲ 영화『구타유발자들』의 한 장면   ⓒ 프라임 엔터테인먼트


두 번째 오류는 ‘나쁜 놈’에겐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대해도 괜찮다는 영화의 태도에 있다. 적에 대한 무자비한 무관용은 대개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에서 자주 드러나는 특징인데, 그 원인은 강력한 기독교 국가에서 파생된 가족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망나니였던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 개과천선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면서도 이슬람 국가들에게는 ‘악의 축’이라며 폭탄을 퍼붓는 부시 미 대통령은 자애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독교가 갖고 있는 양면성을 극적으로, 또 몸소 보여주었다.

이 가족주의의 모순은 우리 편, 우리 소속, 우리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데에 반해 우리 편, 우리 소속이 아닌 사람들이나 단체에게는 잔인하게 배척한다는 점에 있다. 광적으로 변질된 가족주의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하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독립운동가, 좌익 사상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민간인 학살로 확장되었고, 그칠 줄 모르는 광기는 지금으로까지 이어져 색깔론, 편 가르기로 재생산되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가족주의는 기독교 국가의 수장인 미국과 그들의 눈엣가시인 이슬람 국가의 대결 구도(라기 보단 일방적인 미국의 응징)로 나타난다. 물론 대개의 적들은 민간인들의 생명을 담보로 잡은 테러리스트로 나오지만, 이러한 배경 뒤에는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숨어있다.

폭격을 지시하다 작전 수행 도중 피해를 입은 민간인 사상자들에게 ‘테러리스트에게 무기를 비밀리에 조달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발표하는 정부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렇다. 이런 논리는 지난 촛불 집회를 대하는 수구 언론과 정부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배후가 의심스럽다, 사상적으로 불온한 운동가들이 대거 포진했다, 친북 반미 세력들이다, 심지어는 ‘빨갱이’들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시민들은 촛불을 밝혀야 했다. 기득권층의 이러한 공격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광주 항쟁의 주역인 도민들을 간첩이라고까지 몰아넣고 학살한 전두환 일당도 있지 않은가. 반공 이데올로기와 가족주의적 이기심이 깊숙이 뿌리를 박은 대한민국에는 애석하게도 좌익 운동가나 ‘빨갱이’의 인권은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날카로운 방패와 물대포의 공격을 받거나 총칼로 살육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영화『배트맨 ; 다크나이트』의 홍보 포스터  

▲ 영화『배트맨 ; 다크나이트』의 홍보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어두운 밤에 나타난 흑기사, <배트맨 ; 다크 나이트>

관객 동원력으로 보나, 내용적인 면으로 보다 2008년 최고의 영화는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 다크 나이트(이후 다크 나이트)>가 아닐까 싶다. 감독 특유의 완성도 깊은 연출력과 배우들의 호연, 최고의 오프닝이란 평가를 받는데 일조한 카메라 기술까지 더해져 <다크 나이트>는 평단과 관객 모두의 찬사를 받았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대표적인 미국산 히어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히어로 영화의 공식을 무너트린 점, 그리고 영화 속에 내포된 현재 미국에 대한 알레고리 때문이었다.

<다크 나이트>의 이야기는 마찬가지로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배트맨 시리즈의 전작<배트맨 비긴즈>와 연결된다. 조커란 새로운 악당의 출현을 예고하던 전작의 결말대로 <다크 나이트>는 오로지 배트맨의 암살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미치광이 살인자 조커와 배트맨의 대결로 풍비박산 나는 고담시의 우울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 속의 대립 구도는 조커와 고담시의 갱들이 만든 반(反) 배트맨 전선 대(對) 유능한 검사 하비 덴트를 필두로 한 고담시의 경찰들, 그리고 고담시의 히어로 배트맨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대립 구도는 엉키고 어둠 속에서 외롭게 도시를 지키던 배트맨은 홀로 떨어져 문자 그대로 고독한 ‘원흉’으로 전락한다.

사실 배트맨은 미국이 만들어낸 수많은 만화적 영웅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캐릭터다. 검은 가면과 갑옷, 망토로 전신을 가린 채 박쥐처럼 밤에만 활동하는 배트맨은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에 비교하자면 뒷맛이 개운치 않은 음침한 영웅이다. 더욱이 배트맨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은 거대 기업주 아닌가? 빌딩 옥상에 배트맨 라이트를 켜놓고 지상으로 내려와 악당을 처벌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면 정의의 수호자라기 보단 ‘하찮은 것’들을 신나게 패며 업무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화이트 컬러의 비밀 유희 같다.

하비 덴트와 배트맨의 합공으로 수세에 몰리는가 싶었던 조커는 현란한 언변과 지략, 그리고 능숙한 폭탄 테러를 이용하여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더 나아가 배트맨을 모함하여 경찰뿐만 아니라 고담의 시민들까지 그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고, 이러한 상황에 배트맨은 딜레마에 빠진다. 고담의 평화를 지키고 싶으면 조커의 요구대로 정체를 밝혀야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민들은 죽어만 간다.

악몽 같은 상황에 하비 덴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이로써 조커를 체포하지만 애인과 자신의 얼굴 반쪽을 잃고 만다. 이에 광분한 하비 덴트는 양면의 동전으로써 조커와 협력한 경찰들을 처단하기 시작한다. 한편 배트맨은 조커와의 마지막 대결에서 마침내 그를 제압하지만 고담시의 차세대 히어로 하비 덴트는 죽고 만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되, 아무런 진전이 없는 현실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영화『배트맨 ; 다크나이트』의 홍보 포스터  

▲ 영화『배트맨 ; 다크나이트』의 홍보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나는 이 영화를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부시라는 제국주의적 일면의 미국에 대한 조소로 읽었다(물론 영화에선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나오긴 하지만). 자신과 대립되는 입장의 놓인 상대를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제압하려는 배트맨의 대응은 이라크를 비롯한 이슬람권 국가에게 무자비하게 폭격을 가한 미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심한 논리적 비약이 허락된다면, 기업주로서의 브루스 웨인과 어두운 히어로로서의 배트맨은 신자유주의의 분열적인 두 얼굴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합리성의 기업, 힘의 논리로 적을 제압하는 배트맨― 이들의 근간을 이루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머나먼 타지에서 총싸움하느라 쏟아 부은 막대한 전쟁 비용과 부동산 거품 붕괴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배트맨은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고 만다. 정의의 실현을 위해 싸웠건만 ‘나쁜 놈’들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되레 조커와 같은 ‘미친 놈’만 더욱 늘어가는 판국이니 배트맨의 입장으로선 어처구니가 없을 법도 하다. 사실 조커와 배트맨은 역학적으로 공생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다. 조커는 ‘안티 배트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배트맨은 그런 조커를 없애려고 함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확인한다. 이런 순환은 꼭 물에 빠진 자신의 다리를 잡기 위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우둔한 신사의 모습과 같다.

배트맨의 폭력은 결국 미봉책일 뿐이고, 그에 대한 결과로 조커가 등장한다. 결국 악을 자신의 힘으로 처단하겠다는 배트맨의 방식은 실패했다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이라크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살 폭탄 공격, 테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우울한 시대에 되짚어 보기

<다크 나이트>는 지난 여름날의 촛불 집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한국에 개봉되었다. 정부의 건국절 행사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8월 15일 광복절의 촛불 집회는 색소 섞은 물대포(360° 회전이 된다!)까지 앞세운 경찰, 전경, 의경 대연합 작전에 무참히 연행되고 해산되고 말았다.

구호는커녕, 붙잡히지 않는 것이 집회의 목적으로 변해버린 무시무시한 종로를 헤매던 나는 100일 가까이 이어지던 촛불 집회가 결국 공안정권의 탄압으로 실패했다는 사실에 침울함에 빠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지나 <다크 나이트>를 보면서 내 눈에는 자꾸 말도 안 되는 폭력으로 시민들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가 눈에 어른어른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공공의 적>이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형태를 달리한 강철중이 형태를 달리한 ‘공공의 적’들을 깨박살내면서도 왜 그걸 보는 우리의 가슴은 허전함만 맴돌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은 영화와 관객들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다. 아무리 강철중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들 현실의 대한민국엔 여전히 ‘공공의 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 현실에서 좌절된 이상을 영화에서 찾으려는 관객이나 그런 전제하에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들은 배트맨과 조커의 관계처럼 서로를 기만에 빠트리고 있다.

<다크 나이트>의 의의는 히어로 한 개인이 사회의 문제점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기만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스스로 탈피했다는 점, 그러한 주제를 할리우드 영화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풀어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크 나이트>는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점화된 미국 영화 르네상스의 연장선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다크 나이트』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녀의 저서『폭력의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말은 공안 정권이 아니면 조금도 유지가 안 되는 현 정부에게 아직도 유효하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공공의 적 배트맨 다크나이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