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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노조원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YTN사옥 앞에서 출근을 시도한 구본홍 YTN 사장을 가로막고 자진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YTN 노조원들이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남대문로 YTN사옥 앞에서 출근을 시도한 구본홍 YTN 사장을 가로막고 자진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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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의 새 사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다. 새 사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부와 외부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YTN 내부에서도 대립이 심각해져서 상황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든 상처가 꽤 깊게 패일 모양이다. 이미 늦기는 했지만, 더 늦기 전에 YTN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파장이 더 이상 크게 번지는 것을 막을 지혜로운 해법이 될 것이다.

우선, YTN 사태의 본질은 좌우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는 점이 먼저 설명되어야 하겠다. 새로 임명된 사장이나 청와대가 우파이고, 새 사장을 반대하는 YTN 노조로 대표되는 내부 구성원들이 좌파라고 생각한다면 사태를 잘못 읽고 있는 것이다. YTN처럼 색깔이 없는 언론사를 한국에서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자들 각자에게 사상이나 개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24시간 내내 국내외 발생뉴스를 쏟아내야 하는 매체의 특성 탓에 특별한 정치색을 띤다는 것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YTN노조-청와대, 상식을 깨는 것은 누구인가

그런데 왜 YTN 노조는 새로 임명된 사장을 거부하고 있는가? 대통령 후보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사람을 사장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사상도 이념도 무엇도 아닌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바로 여기에서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YTN 노조가 말하는 상식과 청와대의 상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서는 주주총회라는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임명된 사장을 노조가 받는다 못 받는다 왈가왈부하는 것부터가 몰상식한 것이며 좌파적인 행태라는 것이다.

형식 논리로만 보면 청와대나 정부의 입장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는 틀 안에서 대통령 후보의 방송담당 특별보좌관이 뉴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방송사의 사장으로 선임되었다면 그다지 존경 받을 만한 적법한 절차는 아니다. 그런 정도의 형식논리는 어렵지 않게 깨질 수 있다. 만약 지난 대선에서 현재의 민주당이 정권을 가져갔더라도 같은 사람이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YTN의 주주총회를 거쳐서 새 사장으로 선임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그렇다면 상식에 근거를 두고 YTN 노조가 내세우는 새 사장 반대의 논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옳고 유효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지금이 1980년대 5공 치하라면 그런 상식과 논리가 통할 리가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YTN 노조가 말하는 상식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 보좌관 출신을 언론사 사장으로 내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상식은 지난 수십년간 비싸게 비용을 치르고 얻은 민주화의 산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전체가 장기간 홍역을 앓으며 어렵사리 합의에 이른 "정권으로부터의 언론 자유"라는 상식을 지키자고 주장하는데, 좌파라서 저런다고 덮어 씌우고 밀어붙이면 대다수 사람들이 힘들어진다. 상식은 평균이다. 평균적인 한국 사람들이 그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하면서 갸웃거린다면 그건 이미 상식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상식이 절대적인 것도 또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지만 사회구성원들의 합의 위에 만들어진 상식을 거스르려면, 그것도 고도산업화되고 민주화된 한국에서 그렇게 하려면, 설득력있는 명분이라도 갖춰야 한다. 사장 선임은 "적법하게 이뤄졌다"는 주장은 좋은 명분이 아니라 궁색한 변명이다. 새 사장이 "능력이 있고", "경륜이 풍부한" 언론인 출신이라는데, 이제 본인이 선택한 정치권에서 그 능력을 펼치면 된다. 언론계에서 대통령 후보 특보로 갔다가 언론사 사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명분 없는 불법 유턴에 가까운 일이다.

이전에 사장을 했던 사람들도 알고 보면 특보 출신이 아니어서 그렇지 당시 정권들과 가깝거나 최소한 교감이 있었던 사람들 아니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특보 출신이나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오히려 현 정권의 반민주성을 돋보이게 만든다.

민주화 이후의 정권들은 그래도 특보 출신이나 정권 핵심 인사들을 직파하지는 않았다. 혹은 몇 년 전 KBS의 사례에서 볼 수 있었듯이 반발에 부딪치면 카드를 거두어들였다. 적어도 언론의 형식적인 독립성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상식적인 선만큼은 절제하고 지켰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을 확실하게 끊어버리고서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되묻는 것은 참으로 당황스러운 행태이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언론노조 주최로 열린 'YTN과 공정방송을 생각하는 날 시민문화제'에서 YTN 노조원들이 흥겨운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언론노조 주최로 열린 'YTN과 공정방송을 생각하는 날 시민문화제'에서 YTN 노조원들이 흥겨운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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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 매체' 신뢰 잃으면 부작용만 낳아

YTN을 놔줘야할 다음 이유는 붙잡을 필요도 없고 붙잡는 것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YTN이 아니라도 현 정부의 입장에 자발적으로 동조하고 옹호해줄 유력 언론사들이 있다. 굳이 중립지대에 있는 뉴스채널까지 부자연스럽게 끌어당겨서 붙잡고 안 놔주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막강한 우군이 있으면서도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YTN을 비롯한 언론사나 유관 단체들을 이런 식으로 접수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궁금하다. 언론계를 잘 아는 출신 인사들이 기획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토록 시대정신과 동떨어진 계획이 끝까지 실행에 옮겨졌을 때 빚어지는 부작용은 심각할 것이다. 전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권에 장악 당한 언론사들의 보도가 폭넓은 신뢰를 받을 수 있겠는가?

중립지대에서 치우침 없는 공정보도로 여론의 중심을 잡아줄 언론사들의 공신력을 망가뜨림으로써, 국민들이 차라리 오른쪽이나 왼쪽 끝편에 자리 잡고 있는 매체들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집권 기간 내내 심각한 국론 분열에 휘말리게될 자기파괴의 부메랑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YTN을 놓아줌으로써 시청자들이 그 중립지대의 매체로부터 신뢰를 거두지 않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정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방송사에서 '특보'는 뉴스특보 외에는 없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특보 출신 사장이 몰고올 부정적인 파문 때문에라도 YTN을 놔줘야 한다. 정부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언론사들에서 사장을 하려면 대선 때 대통령 후보 특별보좌관 출신이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몰상식을 정녕 고착화시키려는가? 그렇게 되면 언론사 요직이나 사장을 꿈꾸는 기자들이 적당한 때가 오면 펜과 마이크를 버리고 대통령 후보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부끄러운 선택을 부끄러움 없이 저지르도록 방조하고 합리화시켜주는 것이다. 안 그래도 정치과잉인 한국에서 모든 길은 정치로 통한다는 그늘진 현실을 꼭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게 드러내놓고 "적법하게" 제도화시켜야 하겠는가?

이번 사태와 청와대는 관련이 없다는 설득력 없는 형식논리 뒤에 숨어서 사태를 장기화시킨다면 결국 민심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명분이 분명할 때는 끝까지 뚝심있게 밀어붙이는 것이 미덕이 될 수 있지만,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벌여놓고 사태가 사태를 해결할 때까지 그저 두고 보는 것은 미련스러운 일이다. 이런 명분도 실리도 없는 언론장악에 쏟을 힘이 있다면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써야 할 것이다.

더 늦기 전에 YTN을 깨끗이 놔주자. 그래서 방송사에서 특보는 긴급한 소식을 알리는 뉴스특보 외에는 없어야 한다는 건전한 상식의 손을 들어주자. 이 정권이 그런 건전한 보수가 아니었던가?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언론노조 주최로 열린  'YTN과 공정방송을 생각하는 날 시민문화제'에서 가족과 함께 온 한 어린이가 'YTN 사랑해요'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지난달 30일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 언론노조 주최로 열린 'YTN과 공정방송을 생각하는 날 시민문화제'에서 가족과 함께 온 한 어린이가 'YTN 사랑해요'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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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손준모씨는 1995년부터 2002년까지 YTN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싱가포르 국립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태그:#YTN, #구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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