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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베토벤 바이러스>의 한 장면.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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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를 잡은 손은 떨리기만 하고 나오라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선율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삑사리(?)'만 나 한숨만 "후~"하고 내쉬는 사람들. 한숨을 내쉰 다음에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뭔가 잘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난 21일 오후 6시경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예술단 건물 1층 '세종나눔앙상블' 공개 오디션 대기실. 그곳은 오디션 시작 1시간 전부터 악기를 매만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날 오디션은 저녁 7시부터였지만, 많은 지원자들은 일찌감치 대기실을 찾아 연습에 열중했고 참가자들의 뜨거운 열기에 대기실은 오디션장에서나 나올 법한 긴장감으로 가득찼다.

'세종나눔앙상블'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창단하는 아마추어 연주단으로 생활 속의 '나눔 예술'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학생·전문예술가·특기강사·악기학원 강사 등을 제외한 직장인을 대상으로 10월 27일부터 11월 7일까지 단원을 모집했다. 당초 서류심사로만 단원을 선발할 예정이었으나, 30여명 모집에 286명이 지원해 계획에 없던 오디션을 실시하게 된 것.

베테랑도 초짜도, 오디션장에선 "떨려요~"

오디션을 보게 된 지원자는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한 131명으로 세종문화회관측은 20일과 21일 이틀에 나눠 오디션을 진행했다. 20일은 비올라와 바이올린에 지원한 65명이 오디션을 봤고 21일에는 클라리넷, 플루트, 첼로, 색소폰, 트럼펫, 더블 베이스, 오보에, 타악기(스네어) 등에 지원한 66명이 오디션을 치렀다.

7시가 다가오자 대기실 안 연주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들 중 클라리넷을 몇 번이나 매만지며 연습에 열중하는 지원자가 있었다. 사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떨렸을 듯하다. 이날 오디션의 1번 타자였기 때문. 1번 타자 백종필(56·남)씨는 현재 모발이식 의사지만 10살 때부터 클라리넷을 연주했고 대학교 때 전공까지 했었다.

현재 인터넷 동호회 '베네스토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한 백씨는 베테랑이지만, 떨리는 건 당연한가 보다. 백씨는 "떨리지만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될 것 같다"고  자신있게 말하면서도 가방에 넣었던 클라리넷과 악보를 꺼내 마지막 연습을 시작했다.

백씨에게 응원의 "파이팅"을 건네며 다시 바라본 대기실. 한 구석에 자리 잡아 악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승안(27·남)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 표정으로 이미 '나 떨려 죽겠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이씨는 "난 초보자 수준"이라며 "다른 지원자들이 연주하는 것을 들었는데 너무 잘한다"고 의기소침해 있었다.

"<베바> 보고 '찌릿'... 10년만에 악기 잡았어요"

 오디션을 보고 있는 이승안(남·27, 싱크대 A/S 기사)씨.
 오디션을 보고 있는 이승안(남·27, 싱크대 A/S 기사)씨.
ⓒ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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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대 A/S 기사인 이씨는 TV를 통해 '세종나눔앙상블' 모집 광고를 보고 10년 만에 악기를 잡았다. 지금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악기를 다시 잡았다는 이씨는 "남들이 1시간 연습할 때 나는 4~5시간 연습할 각오가 되어 있다"며 "정말 하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이씨가 10년 만에 다시 손에 쥔 악기는 클라리넷이다. 클라리넷을 어떻게 배우게 됐냐는 물음에 쑥스러운 듯 말문을 연 이씨는 "어렸을 때 소위 불량 청소년으로 불렸다"며 "학교나 학원에서 정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끝을 흐렸다.

청소년 때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가게 된 곳에서 관악부로 2년 동안 활동했다는 이씨는 "연주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줬던 것이 사실"이라며 "사람들이 내 연주를 듣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클라리넷을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가정환경이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2일 종영한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찌릿'했다는 이씨. 연주를 못했던 단원들이 노력해서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장면을 보면서 10년 전 자신이 속한 관악부가 나갔던 대회가 생각났다고. 그때의 추억과 감동이 새삼스레 밀려와 눈물이 나올 뻔 했단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평생 연주하는 게 '꿈'"이라는 27살 청년. 취미로 혼자 연주하려고 2년 전 구입한 클라리넷에서 피어난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다시 한 번 그와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적막한 오디션장 밖... 그들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오디션 장 밖에서 연주할 곡을 떠올리며 연습하고 있는 백수정(여·35, 핸드폰 결제 프로그래머)씨.
 오디션 장 밖에서 연주할 곡을 떠올리며 연습하고 있는 백수정(여·35, 핸드폰 결제 프로그래머)씨.
ⓒ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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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연주 소리로 가득했던 1층 대기실과는 달리 3층 오디션장은 밖에서부터 적막감이 맴돌았다. 3층으로 올라오면 연주는커녕 악기 음 조율조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지 못하니 지원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많은 지원자들은 머릿속으로 음을 생각하며 손과 손가락을 움직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손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연주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박자를 맞추게 될 정도였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백수정(35·여·핸드폰 결제 프로그래머)씨에게 연습 많이 했냐고 묻자 "아니다, 이미 늦었다"고 아쉬운 표정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러면서도 첼로 위에 얹은 왼쪽 손과 활을 쥔 오른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디션 장에서 연주를 마치자 한 심사위원은 "상당한 연주 실력이다"고 백씨의 연주를 평가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첼로를 배운 지 5년밖에 안 됐지만, 1주일에 1번 레슨을 받고 연습도 꾸준히 했다고.

오디션을 마치고 나온 백씨는 "나나 오디션을 보러 온 사람들은 연주 실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전공 연주자 못지않다"며 "'세종나눔앙상블' 단원이 된다면 문화 소외 계층을 찾아가는 음악으로 그 역할을 이행하고 싶다"고 밝혔다.

오디션 장 밖에서 대기하던 지원자들은 오디션을 보고 나오는 다른 지원자들의 표정을 보며 '아, 이제 내 차례인가'라는 생각에 긴장하는 듯했다. 그 중에서도 "'오디션'이라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무척이나 떨린다"던 김영오(남·35·보험설계사)씨는 1996년부터 색소폰을 연주했다는 경력이 무색할 만큼 많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디션을 보고 있는 김영오(남·35, 보험설계사)씨.
 오디션을 보고 있는 김영오(남·35, 보험설계사)씨.
ⓒ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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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보기 이틀 전에 연락을 받아, 오디션 당일 새벽 4시까지 한강 고수부지에서 연습했다는 김씨는 "연습을 충분히 하면 연주 감이 있는데, 그러지 못해 감이 오지 않는다"고 연습 부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오디션 장으로 들어갔다.

김씨의 연주가 끝나고 한 심사위원은 "앙상블에서 활동하면 이전에 연주했던 곡과 다른 장르의 곡을 연주해야 한다"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씨는 "2년 동안 밴드 활동을 하면서 12번 정도 공연한 적이 있는데, 솔직히 클래식 연주는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트롯 연주를 많이 해봤다"며 "음악의 장르를 구분해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이 즐겁게 들을 수 있는, 그들이 요구하는 음악을 연주했으면 한다"고 '세종나눔앙상블'에 대한 바람을 담아 답변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오디션을 보기 전에는 "떨린다"며 울상을 지었지만, 막상 심사위원들 앞에 서면 차분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알바까지 하면 시간 내기 어렵지 않겠냐"는 심사위원의 물음에 트럼펫 지원자 이희진(여·24·상담원)씨는 "1차 합격자 통보가 났을 때 알바 하던 곳에서 그만두라고 연락이 왔다"며 "'세종나눔앙상블'을 하라고 마침 딱 자른 것 같다"고 재치 있게 답변해 심사위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또 "본인도 스네어 악기가 없고, 세종문화회관에도 악기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심사위원의 물음에 스네어(타악기) 지원자 이민규(남·33·회사원)씨는 "'세종나눔앙상블' 단원이 되면 악기를 사려고 생각 중이다"고 말해 심사위원들의 "와~"하는 환호와 함께 "정말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영혼의 언어 음악으로 마음 상처 치료해 줬으면"

'세종나눔앙상블' 오디션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이 최종 합격자 선정 논의를 하고 있다.
 '세종나눔앙상블' 오디션 심사를 맡은 심사위원들이 최종 합격자 선정 논의를 하고 있다.
ⓒ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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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규씨를 끝으로 장장 3시간 40여분에 걸쳐 진행된 오디션이 끝났지만, 심사위원들은 합격자 선정 논의에 여념이 없었다.

이틀에 걸쳐 치러진 오디션에 대해 심사위원 김영은씨는 "연주를 비롯해 의지, 단합될 수 있는 친화력, 경험 등 고루 심사했다"며 "지원자 모두가 음악에 대해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지원자들의 연주하는 모습이나 그 음색이 따뜻하고 푸근한 느낌이었다"고 평가했다.

일찌감치 오디션을 마치고 1층 대기실에 앉아 있던 강미진(여·32·약사)씨는 플루트를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오디션 본 소감을 묻자 강씨는 "다른 지원자들을 보면서 꿈과 열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며 "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음악은 영혼의 언어라고 하지 않는가"라며 "음악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세종나눔앙상블'이 되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세종나눔앙상블' 최종 선발 단원은 오는 26일(수) 낮 12시 이후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된다. 최종 단원이 확정되면 12월 5일(금)에 '세종나눔앙상블'을 창단할 예정이다. 창단 후에는 일정기간 연습을 한 뒤 세종뜨락축제와 세종별밤축제를 비롯해 학교, 박물관, 병원 등에서 연주를 하는 것은 물론,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 나눔'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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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종나눔앙상블,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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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기자 활동을 통해 '기자'라는 꿈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 싶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문제를 비롯해 인권, 대학교(행정 및 교육) 등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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