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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포커스>(이하 <미포>로 줄임) 마지막 녹화를 하루 앞둔 오늘(14일), KBS 김용진 기자(전 <미디어포커스> 데스크, 전 탐사보도팀장)가 사내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려 "완장 찼다고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사측을 맹비판했다.  

 

<미포>는 수십차례에 이른 피켓시위 등 제작진의 반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을개편에서 간판을 내리게 됐으며. 다음주부터는 <미디어비평(금요일 밤 11시 30분)>이라는 새 프로그램이 신설된다.

 

제작진은 내일(15일) 오전 신관 스튜디오에서 마지막 녹화를 한 뒤, 그동안 <미포>를 거쳐간 기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며 작별할 예정이다.

 

김용진 기자는 우선 고 조종옥 기자(지난 2007년 6월 비행기 사고로 사망)와 첫 방송을 준비하던 시절을 상기했다. 김 기자와 조 기자는 <미포> 창립멤버다.

 

"하루는 조 기자가 풀이 죽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부 선배들이 '완장 찼다고 경거망동하는거 아냐, 조심해'라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그 때도 후배들에게 상식 이하의 협박을 일삼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 따위 협박에 주눅 들지는 않았다. 영상자료실에서 밤을 새며 숱하게 본 KBS의 과거 모습이 너무 참혹했고, 그것을 그냥 덮어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협박과 비아냥거림을 그냥 흘려보냈다."

 

김 기자는 이어 <미포> 첫 회 'KBS, KBS를 말한다' 프롤로그를 기억해냈다. 

 

'개혁적이라는 (노무현) 정권도 KBS를 장악하려는 우를 범한 것이다…. 군사독재에서 문민정부로, 여에서 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KBS는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공영방송, 국민의 방송 KBS는 언제까지 힘 있는 자, 가진 자의 편에만 설 것인가?'

 

그는 "이 물음이 5년여가 흐른 지금 <미포> 강제폐지 등과 맞물려 또다시 유효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5년여 동안 여러 선후배들이 미포 간판을 굳건히 지켜왔다. 그런데 어느 날 정권이 바뀌고, 사장이 바뀌고 폐지 얘기가 유령처럼 떠돌더니, 내일 260회 방송을 마지막으로 간판을 내려야 한단다. 인사권·편성권을 쥔 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 왜 간판을 내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제작진들이 반대하자 폐지가 아니라 업그레이드란다. 상대사가 오래 전 쓰다가 폐기한 이름을 슬쩍 주워쓰고, 한밤 시간대에 처박는 것도 업그레이드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김 기자는 "<미포>가 특정 이념, 특정이즘에 경도돼 왔다는 사실은 인정한다"면서 "그것은 KBS를 장악한 자들이 그렇게 간절히 딱지 붙이고 싶어하는 '소셜리즘'이나 '꼬뮤니즘'이 아니라 바로 '저널리즘'의 이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글을 맺었다.

 

"5년 5개월 전 고 조종옥 기자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말을 이제 진짜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한다. '완장 찼다고 경거망동 하지말기'를 바란다. 덧붙여 이 말도 들려주고 싶다. 제발 역사를 두려워하라!"

 

 

<미포> 창립멤버, 탐사보도팀 창립멤버, 탐사보도팀장 등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 김용진 기자는 KBS 탐사보도·기획보도의 상징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부산방송총국으로 전보 발령돼 "보복인사의 최고 희생양"이라는 말이 돌았으며, 사측이 그를 다시 울산방송총국으로 발령했을 때는 "부관참시"라며 사내 일부 기자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9월 부산으로 발령난 뒤에도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려 "탐사팀원들에 대한 인사는 권력의 사주를 받아 여러분들(경영진)이 자행한, KBS 저널리즘에 대한 청부 살해 사건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사측을 비판한 바 있다.

 

아래는 오늘(14일) 김용진 기자가 사내 미디어보도 게시판에 올린 글 전문이다. 

 

멀리서 <미포>의 임종을 보며

<미디어포커스> 죽이기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내일 방송이 <미포> 고별 방송이 될 것이라고 한다.  5년 전 <미포> 첫 방송 준비할 때가 떠오른다. 너무 빨리 세상을 달리해버린 고 조종옥 후배와 둘이서 취재를 맡았다. 노사 공방위와 코비스, 보도게시판 등에서 문제 제기된 프로그램과 뉴스 사례를 모두 모아 전두환에서 김대중 정권까지 대표적인 불공정 방송 목록을 만들었다.

 

영상자료실에서 일일이 해당 테이프를 찾아보고, 회사 안팎을 돌아다니며 문제의 프로그램이나 뉴스 제작자들을 상대로 취재·제작 경위를 '취재'했다.

 

하루는 조 기자가 풀이 죽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부 선배들이 "완장 찼다고 경거망동하는거 아냐, 조심해"라며 윽박질렀다고 한다. 그 때도 후배들에게 상식이하의 협박을 일삼는 무리들이 있었다.

 

조종옥 기자는 가슴아파하긴 했지만 그 따위 협박에 주눅들지는 않았다. 영상자료실에서 밤을 새며 숱하게 본 KBS의 과거 모습이 너무 참혹했고, 그것을 그냥 덮어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며 협박과 비아냥거림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렇게 해서 2003년 6월 28일 밤 <미디어포커스> 첫 회가 나갔다. 'KBS, KBS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방송이 나갈 때까지 본부장은 물론 국장·부장도 내용을 몰랐다. 사실 이들도 다 취재대상이었다. 당시 지휘라인의 과거 보도물도 샅샅이 훑어봤다.

 

그래서 당시 본부장의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낯뜨거운 리포트도 찾아내 프로그램에 집어넣었다. 취재와 제작에 매달리다보니 방송이 임박할 때까지 제목을 결정하지 못했다. 처음 공개하는 사실이지만 'KBS, KBS를 말한다'라는 제목은 그 재기 넘치던 조종옥 후배가 제안해 채택한 것이다.

 

'KBS, KBS를 말한다'는 프롤로그에서 KBS에 대해 이렇게 묻는다.

 

"개혁적이라는 (노무현)정권도 KBS를 장악하려는 우를 범한 것이다.(중략) 군사독재에서 문민정부로, 여에서 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KBS는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해왔다. 공영방송, 국민의 방송 KBS는 언제까지 힘 있는 자, 가진 자의 편에만 설 것인가?"

 

이 물음이 5년여가 흐른 지금 <미포> 강제 폐지 등과 맞물려 또다시 유효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혹자는 이 첫 편을 KBS의 처절한 고해성사라고 평했지만 우리 제작진은 과거에 대한 반성보다는 새로운 결의라는 부분에 방점을 뒀다. <미포>를 제작하면서 오로지 저널리즘 원칙에만 헌신하자는 각오였다.

 

<미디어포커스> 창립멤버이자 탁월한 기자였고,누구보다 KBS를 사랑했던 조종옥. 그가 <미포> 첫 회를 만들었고, 타이틀도 지었다. 그 뒤를 이어 5년여 동안 여러 선후배들이 <미포> 간판을 굳건히 지켜왔다.

 

그런데 어느 날 정권이 바뀌고, 사장이 바뀌고 폐지 얘기가 유령처럼 떠돌더니, 내일 260회 방송을 마지막으로 간판을 내려야 한단다. 인사권·편성권을 쥔 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 왜 간판을 내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제작진들이 반대하자 폐지가 아니라 업그레이드란다. 상대사가 오래 전 쓰다가 폐기한 이름을 슬쩍 주워 고, 한밤 시간대에 처박는 것도 업그레이드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심심하면 '특정이념' '편향된 시각' 운운하지만 역시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그저 조중동이 쳐놓은 프레임에 갇혀 그들의 선전을 무뇌아처럼 되풀이 할 뿐이다. <미포> 제작진들에게 최소한의 동료의식이라도 있다면 그 좋아하는 '객관' '공정'의 잣대로 <미포> 첫 회부터 지난 주 259회까지 다 훑어봐라.

 

도대체 '좌빨'의 흔적이라도 있는지. 나는 <미포>가 특정 이념, 특정 이즘에 경도돼 왔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미포>가 신봉한 이념은 KBS를 장악한 자들이 그렇게 간절히 딱지 붙이고 싶어 하는 '소셜리즘'이나 '꼬뮤니즘'이 아니라 바로 '저널리즘'이라는 이념이다.

 

오늘 <미포> 홈페이지에서 들어가 임종을 지키는 심정으로 'KBS, KBS를 말한다'를 다시 봤다. 그러다가 KBS를 장악한 자들이 왜 미포를 한사코 지워버리려 하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5공 초기 KBS 보도국은 '특별입체기획-제 5공화국 1년'이라는 유치찬란한 제목의 특집을 만들어 전두환에게 바쳤다.

 

"제 5공화국 1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지난 30년 헌정사에서도 이룩하지 못한…"

 

감격에 차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KBS 기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미포> 첫 방송에 소개된 이 특집 리포트의 주인공은 그 뒤 보도국장도 하고, 이사도 하고, 다 아는 바대로 MB 특보도 하다가 얼마 전에는 사장 후보 0순위에까지 올랐었다. 이 분을 사장으로 옹립하려던 심복은 지금 보도본부 최고 실세라고 한다. 이게 KBS의 현 주소다.

 

'KBS, KBS를 말한다'는 권력 교체 후 KBS의 극적인 변화도 잘 보여준다. 전두환이 구속되던 날, 9시 뉴스는 5공 내내 민족의 태양으로 떠받들었던 전두환을 갑자기 "정권욕에 눈이 멀어서 저질렀던 역사적인 과오로 인해 이제 씻을 수 없는 오욕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신세가 됐습니다"라며 꾸짖는다.

 

나도 기사 '독하게' 쓰는 편이지만, 이 정도로 안면몰수하고 독한 멘트를 쓸 자신은 없다.

 

이게 바로 과거 KBS의 행태였다. 이 굴종과 곡필의 유령이 2008년 부활해 KBS를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미포>는 이런 과거를 들춰내고, 고해성사를 했다.

 

조중동은 이런 <미포>가 불편했다. 자신들은 단 한 번도 일제와 독재에 부역한 과거를 반성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첫 방송 후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자신들과 다른 길을 가는 <미포>와 KBS가 미치도록 싫었을 것이다.

 

정치권력도 불편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은 수시로 이른바 코드방송론과 더불어

전가의 보도인 색깔론을 덧칠하며 <미포>를 공격해댔고, 반대로 노무현도 <미포>가 정부정책을 부당하게 공격하며 전파를 낭비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특히 과거를 숨기고 싶은 KBS 인사들은 <미포>의 존재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나타냈다.

 

이제 이들은 그 알량한 권력을 등에 업고 <미포>를 땅 속에 묻으려 하고 있다. <미포> 간판과 함께 그들을 불편하게 한 진실과 견제의 시스템도 삭제하려 한다. 대통령의 구름잡는 얘기에 라디오를 대주며 권력의 나팔수가 되기를 자처하면서, <미포>가 편향됐다고 말하는 이들의 정신분열 증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KBS의 앞날을 걱정하는 후배들에게 '인사조치'로 대응하겠다는 그 야만성의 뿌리는 어디일까? 그러나 아무리 <미포>를 죽이고, 탐사를 무장해제하고, 제작진을 각개격파해도 진실에 헌신하고자 하는 대다수 KBS 기자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대다수 KBS 기자들은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았고, 저널리즘의 가치가 뭔지 분명히 아는 세대다. 권력에 빌붙어 단물을 빨던 세대와는 종자가 다르다는 말이다.

 

길게 보면 이 반동의 시기는 한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미포를 지키지 못한 못난 선배로서 요절한 조종옥 후배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바이스 시절에도 한 번씩 <미포> 아이템 꺼리를 가져오던 기억이 선한데.

 

5년 5개월 전 고 조종옥 기자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말을 이제 진짜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한다. '완장 찼다고 경거망동 하지 말기'를 바란다. 덧붙여 이 말도 들려주고 싶다. 제발 역사를 두려워하라!


태그:#미디어포커스, #미포, #김용진, #조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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