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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시사프로그램들이 죽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시사프로그램들이 가을 개편 때 사실상 간판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KBS의 '시사 정신'이, KBS의 '뚝심'이 그 근저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KBS의 대표적인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인 <미디어포커스> 제작팀이 7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동료 기자들과 사원들에게 보고한 저간의 사정은 그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병순 사장 취임 이후 새로 부임한 시사제작팀장은 프로그램 제작에 '불합리한 압력'을 수차례 가해왔다고 밝혔다.

 

"논란을 두려워하면 미디어비평도 죽는다"

 

이들이 밝힌 사례는 충격적이다. 기자 여섯 명이 해임된 YTN 사태를 내보내기 위해 팀장과 밤늦게까지 격심한 토론을 벌인 끝에 겨우 방송에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무슨 내용으로 그리 '격렬한 토론'을 벌여야 했는지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유인촌 장관 막말 파문' 때 "유 장관의 품위가 손상될 만한 민감한 내용을 빼라는 지시를 받"기까지 한 저간의 사정에 비춰볼 때 무슨 논란이 벌어졌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명박 OUT'이라는 손팻말 그림도 다른 그림으로 대체됐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은 설 자리가 없다. 미디어 비평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일인가를. 그래서일 것이다. 이들 제작진이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면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은 죽습니다"라고 절규했던 것은. 자율적인 권한과 그에 합당한 책임감의 부여 없이는, 내부의 튼실한 보호막 없이는 그 어떤 '비평'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런 비평 프로그램에 대해 '민감한 소재'는 피하고, 권력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그림 하나까지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을 수 없는 망발을 한 장관의 행태에 대해 '품위가 손상될 민감한 내용을 빼라'고 주문하는 식이라면 비평 프로그램은 아예 간판을 내릴 게 아니라, 없애는 것이 낫다. 그것은 '비평'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S 경영진들과 제작 간부들은 명칭을 달리해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의 명맥은 유지하기로 했다. '미디어 비평'이라는, 어찌 보면 더 직설적인 간판까지 달았다.

 

하지만, 미디어 포커스 제작팀이 밝힌 그 경과를 보면 그야말로 기만적이다. 미디어 포커스 제작팀은 어떻게든 기존의 이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미디어 포커스 폐지를 줄기차게 요구해온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공격과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그것이 맞는 진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진과 제작 간부들은 제작진의 이같은 상식적 판단을 외면했다. 시사보도팀장은 "미디어 포커스 개편은 나의 소관도, 본부장의 소관도 아니"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제작진이 밝힌 것처럼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장 등 그 윗선의 '의중'에 따른 것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전임자는 '인사보복', 후임자는 '인사특전'?

 

게다가 '정치적 개편'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마지막 배수진을 친 제작진들에게 보도국 간부는 공공연하게 '징계성 인사 방침'까지 밝혔다고 한다. 이들 제작진들이 새로 발령받게 될 부서에서 "2년 동안 유배생활을 시킨다"는 입장을 천명했다고 한다. 대신 신설될 '미디어비평' 근무자에게는 "1년 뒤 희망부서로 우선 전보해 준다"는 방침도 밝혔다고 한다.

 

한마디로 '비평 프로그램'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KBS 기자 모두에 대한 모독이다. '비평'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했던 전임자들에 대해 인사보복 조치를 공공연하게 밝히면서 새 프로그램을 맡을 사람들에게 '인사 특전'을 약속한다면, 그 프로그램을 맡는 새로운 제작진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이런 상황에서 그 프로그램을 지원할 것이며, 어떻게 그 프로그램을 맡을 수 있을까. 설령 맡는다 하더라도 어떻게 제대로 취재나 할 수 있겠는가.

 

 

2003년 6월 신설된 '미디어 포커스'는 KBS의 '뚝심'이 잘 드러난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지상파 방송의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은 MBC가 먼저 그 길을 열었다. 2001년 4월 28일 '미디어비평'이란 프로그램으로 그 첫선을 보였다. 방송인 손석희씨가 그 진행을 맡았다. KBS도 그 해 5월 '시사포커스'에 미디어 비평을 강화했지만, 본격적인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은 2003년 5월 '미디어 포커스'를 주말 저녁 황금시간대에 배치하면서부터였다.

 

비록 MBC보다는 뒤늦게 시작했지만,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의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KBS다. MBC의 '미디어비평'은 '신강균의 사실은…', '암니옴니'를 거쳐 2006년 개편을 통해 '뉴스 후'로 바뀌었지만, '암니옴니'를 끝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MBC 내부의 여러 사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팎의 '압력'에 결국 중도하차한 것이다. KBS '미디어 포커스'가 외롭게 조중동과 한나라당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의 명맥을 꿋꿋하게 지켜왔던 셈이다. KBS 사람들의 '뚝심'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그 뚝심이 이제 내부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제작진의 마지막 당부가 더 눈물겨운 이유다. 제작진들은 마지막으로 회사 측에 "지금보다 더 냉철하고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제작환경을 보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들의 당부는 메아리를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그들의 "마지막 싸움이 '미디어 비평'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에서 일하게 될 제작진들에게 작은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는 그들의 '마지막 소망' 역시 소망으로 끝나 버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런 한 가닥 소망마저 놓아버린다면 이 겨울이 너무 춥고 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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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미디어포커스, #이병순, #미디어비평 프로그램,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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