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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오바마가 당선되었다. 이미 오랫동안 여론조사는 오바마의 승리를 예측해 왔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지지자들조차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영화 <식코>의 감독 마이클 무어는 선거 다음날 후원자들에게 흥분 가득한 이메일을 보냈다. "나를 좀 꼬집어봐 달라"는 제목의 메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중 할 말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눈물이 솟구쳐 오릅니다. 기쁨의 눈물이." 

 

마이클 무어는 편지에서 오바마의 당선이 "미국 원주민의 학살과 흑인 노예의 착취 위에 건설된" 미국의 수치스런 역사에 어떤 진보와 개혁의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면서 감탄사로 말을 맺었다. "미합중국의 44대 대통령, 버락 후세인 오바마. 우와, 진짜로 우와."

 

검은 피부 여자아이의 속삭임 "나도 커서..."

 

선거가 끝나고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11월 4일 밤. 시카고의 그랜트 공원에는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감격하며 모여들었다. 밝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추어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그날의 주인공이 무대에 나올 것을 기다리면서.

 

여자·남자·젊은이·노인·백인·흑인·아시아인·라티노…. 성별·나이·인종·직업 등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의 입가에 웃음이 넘치고, 눈가는 물기로 젖어 있었다. 그 무리들 가운데는 남편 없이 혼자 아기를 데리고 나온 엄마들도 여럿 보였다. 팔에 안긴 검은 피부의 여자아이가 엄마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나도 커서 대통령이 될 거야."

 

안 그래도 넘칠듯 일렁거리던 엄마의 눈물이 빰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제까지도 엄마의 가슴을 후벼팠을 딸의 이 당돌한 꿈은 더 이상 아프게 들리지 않았다. "그래, 우리 딸도 대통령이 될 수 있고말고."

 

미국 역사상 이런 대통령선거가 있었을까? 지난 4일은 정치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희망과 기쁨을 최대치로 보여준 날로 기억될 것이다.

 

세계의 많은 언론이 '오바마가 가져오게 될 변화'를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의 당선 자체가 이미 획기적인 변화를 반영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훌륭한 중재자, 합리적 소통가

 

오바마의 당선은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은 화제를 낳은 것은 "오바마 당선인과 이명박 정부의 비전이 닮은꼴"이라는 청와대의 발언이었다. 1년 간격으로 한국과 미국 대통령 당선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서, 두 사람의 지도자상(리더십)을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바마와 이명박 대통령 사이에는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둘 모두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그리고 곧 그렇게 될 거라는) 점과,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는 점을 빼면 말이다.

 

미국 언론과 오바마 측근이 일관되게 동의하는 점은 그가 훌륭한 '중재자(mediator)'이며 '소통가(communicator)'라는 점이다. 오바마가 학생 시절부터 보였던 탁월한 중재능력은 잘 알려져 있다.

 

오바마가 몸담았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의 하버드 법대는 대단히 말썽이 많았다. 인종 간의 갈등, 진보와 보수 간의 반목은 그 교육기관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그 시절 법대를 다녔던 크리스틴 스퍼럴은 PBS와 한 인터뷰에서 "당시 법대 분위기는 서로 상처를 주고 공격하는 불행한 가정 같았다"고 회상한다. 

 

오바마가 <하버드 로저널> 편집장을 맡게 된 때가 바로 이 불운한 시절이었다. 법대의 갈등과 대립은 저널의 편집부에서 한층 더 강화된 형태로 표출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다 연방대법원과 백악관에서 일한 정치인은 "워싱턴에서 정치생활을 20년 넘게 했지만, <하버드 로저널>과 같은 끔찍한 정치를 경험해 본 일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오바마는 이곳에서 흑인과 백인, 진보와 보수의 중재자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오바마가 편집장으로 출마했을 때, 그의 말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섰던 보수 편집자조차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했다. 오바마야말로 공동체의 갈등을 치료하고 통합할 적임자라는 이유였다.

 

오바마의 이런 성공적인 소통의 비결은 아주 간단하다. 그는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잘 듣는 것으로 유명하며, 상대의 이념보다 그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런 성향은 당선연설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선거날 밤, 그랜트 파크의 연단 위에 나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날입니다. 이날을 가져온 사람은 젊은이, 노인, 부유한 자, 가난한 자, 민주당, 공화당,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시아, 미국원주민, 동성애자, 이성애자,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우리 미국인 모두입니다."

 

미국 사회를 구성한 이들을 빠짐없이 호명하며 감사를 표한 오바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저는 여러분들께 한 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대통령으로서 내리는 결정이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처한 문제를 언제나 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니다. 제게 반대하는 목소리일수록 더 열심히 듣겠습니다." 

 

'닮은꼴'이라는 이명박의 지도자상

 

이명박 대통령의 지도자 자질을 요약하고 평가하기에 앞서, '오바마와 닮았다'는 주장이 나올 즈음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살펴보자.

 

오바마가 당선되기 직전 이명박 대통령이 한 일은 3일 부로 민동석 전 농업통상정책관을 외교통상부에 복귀시킨 것이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책임 당사자로서, 협상 내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서명을 한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넉달도 안 되어 민동석을 재기용한 것은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어떤 통치철학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말해준다.

 

이는 촛불시위가 뜨거울 당시 '식탁 안전에 대한 국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고 거듭 사과해놓고도 시위가 주춤해지자 시위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에 나선 데서도 드러난다. 

 

오바마가 당선된 직후 이명박 대통령이 한 일은 임기도 지나지 않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7일자로 해임한 일이다. 김윤수 관장의 해임은 이명박 당선 직후 지속되어 온 '국정철학 다른 공공기관장 몰아내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국방송공사의 정연주 사장 역시 같은 이유로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같은 날 대통령은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생각이 다르면 병난다"며, '수도권 규제 완화에 관련해 혼선 없이 국민들에게 홍보하라'며 단단히 정신교육을 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이 반대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사실은 측근과 보수언론조차 인정하는 바다. 듣고 타협하기보다는 말하고 지시하는 데 익숙한 이명박의 성향은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CEO형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선적인 국정 운영은 타협과 중재를 좋아하는 오바마보다는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적'이라고 믿는 조지 부시 대통령과 유사하다. 경제 정책은 부유층 감세와 '친성장 반분배' 정책 등 매케인과 닮은 꼴이다. 4년 후 이명박 대통령이 어떤 모습으로 퇴임하게 될지는 이 두 사람을 보면 된다.

 

4년 후, 어떤 모습으로 물러날 것인가

 

작년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날 밤, 나는 '승자 없이 당선자만 있던 선거'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아니다. 그의 당선은 수년에 걸쳐 한국사회에 일어난 광범위한 변화의 한 징후일 뿐이다. 관공서 앞에 '부자 되라'는 현수막이 걸리고, 청소년들에게 '재테크에 미칠' 것을 요구하며,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사회에서 도덕보다 돈을 앞세운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향후 5년은 현재의 어려움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명박 정부의 고뇌가 있고, 같은 지점에 (미약하나마) 진보진영의 기회가 있다.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가져 온 문제가 진보정책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과정은 이명박 정부에게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경험이지만, 진보세력에게는 어느 정도 누명을 벗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민들은 자신이 던진 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국민들과 한 약속을 저버렸던 현재의 (아니, 과거의) 집권세력은 야당으로서 자신들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를 반성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들이 현명하다면 말이다."

 

나는 이 우울한 칼럼을 쓰면서도 예측이 어긋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비관적 전망은 1년이 못 되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앞으로도 더 나은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일 '이명박은 오바마와 닮은꼴'이라는 게 현 정부의 솔직한 판단이라면, 한국 사회에 희망은 없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지도자에게 희망을 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지도자를 뽑은 것만으로 족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실패는 한국사회가 불행해지는 길이다. 때문에 나는 '오바마와 닮았다'는 청와대의 말을 '오바마와 닮기를 희망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4년 남은 임기를 존경받는 지도자로 보내기를 바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오바마로 당선되어 부시로 물러나게' 만든 것이 바로 독선적인 리더십 때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도자가 다른 견해를 수용하는 것은 '겸양'이라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머리가 하나보다 낫다'는 지극히 실용적인 상식의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적인 대통령으로 물러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바마가 말한 대로 '반대하는 목소리일수록 더욱.'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하는 지도자가 된다면, 시카고 그랜트 공원의 수백만 환호보다 서울 시청광장을 덮던 수십만의 촛불이 더욱 값진 목소리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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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바마,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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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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