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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최초의 배 산지폐기 농민인 이근영씨가 애써 수확한 배를 과수원에 갈아 엎고 있다.
▲ 과잉생산 아산시 최초의 배 산지폐기 농민인 이근영씨가 애써 수확한 배를 과수원에 갈아 엎고 있다.
ⓒ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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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농촌은 가뜩이나 비료 값을 비롯한 농자재 가격이 해마다 줄줄이 올라 생산이 어려운데 판로마저 막혀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맘때면 으레 등장하는 '농산물 팔아주기 운동'조차 올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활발하지 않다. 이 대책 없는 답답한 농촌현실이 안타깝다.

지난 10월 27일 아산시청 상황실에서는 농산물 공동브랜드를 개발한다며 지역 농업관련 단체와 시청 공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다. 용역보고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참석자 절반이 고개 떨구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목숨 걸고 덤벼도 될까 말까 한데….

기업체에 협조요청을 하겠다는 것이 유일한 대책일 정도다.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수확하고 결실의 기쁨에 젖어 있어야 할 농촌 들녘에서 한숨 소리만 들린다.

10월 30일 오후 4시 아산시 최초로 수확한 배를 산지 폐기하는 현장을 동행취재했다.

"내년에도 풍년 들까 걱정"

지난 1년간 농민의 피와 땀으로 수확한 결실이 과수원에 버려지고 있다.
 지난 1년간 농민의 피와 땀으로 수확한 결실이 과수원에 버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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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는 홍수와 태풍피해가 없어 그 어느 해보다 배농사가 잘됐다. 맛 좋고, 빛깔 좋고,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한 풍년농사였다. 그런데 하나하나 정성껏 수확한 농작물을 다시 파묻어야 하는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내년에도 풍년 들까 걱정이다."

올해 배 밭에서 만난 농민들에게 가을은 더 이상 풍요롭고 넉넉한 계절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을걷이를 마친 가을 들녘에 힘겹게 수확한 농산물을 다시 묻어야 했다. 농민들에게 올해는 유난히 모든 일이 힘에 부쳤다. 지난 한해 과수원에서 흘린 땀은 넉넉한 수입이 아닌 무거운 부채로 돌아왔다.

올해 초부터 비료를 비롯한 각종 영농자재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관리기와 트렉터 등 각종 농기계와 운반수단인 트럭을 움직일 때도 기름 값 폭등으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또 예년보다 개화기가 일찍 찾아와 인공수분 시점을 맞추기 위해 온 가족이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과수원에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용역시장에서 인력을 조달해 썼다. 가을철 수집상과 청과시장 등에 제값 받고 넘겨 생산원가 제외하고, 자녀들 학비 대고, 생활비도 마련하고, 대출금도 갚으려 했지만 오히려 빚만 늘었다고 한다.

농부의 아내는 버려진 배를 보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농부의 아내는 버려진 배를 보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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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해 농민들은 개화기 인공수분, 과일이 맺힐 무렵부터 비가 올까, 바람 불까 늘 노심초사했다. 과일이 탐스럽게 익어갈 무렵부터는 온갖 유해조수들과 싸우며 사투를 벌였다. 그렇게 수확한 농작물은 시장에 나가기도 전에 농민의 손에 땅 속에 파묻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농림식품수산부에 따르면 올해는 전국적으로 배 재배면적이 8% 줄었지만 기상조건이 좋고, 병해충까지 줄어 생산량은 정확한 수치인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10% 이상 늘었다고 밝힌바 있다. 천안과 아산지역 현지 농가에서도 예년보다 20~30% 생산량이 증가했다고 말한다.

소비는 반대였다. 1년 수확량에서 30% 가량 소비되던 추석명절이 예년보다 10일 가까이 빨라 전 해에 비해 절반도  팔지 못했다. 거기다 장기간 경기불황까지 겹쳤다. 결국 소비처를 잃은 배가 창고에 가득 쌓여 산지폐기라는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린 것이다.

정부와 농협은 배 값 안정을 위해 전국적으로 1만톤 이상의 배를 매립하기로 결정했다. 천안시에는 총 1303톤 폐기가 결정됐으며, 10월31일 현재까지 491톤(37%) 완료됐다고 밝혔다. 아산시는 1170톤 폐기가 결정된 가운데 지난 30일 첫 폐기가 시작됐으며, 11월까지 2차 폐기신청 농가를 접수받을 예정이다.

생산원가 1만2000원, 보상금 8000원

산지폐기 기준은 375g 이상여야 한다. 그러나 무작위로 추출한 배는 폐기기준보다 무려 120g 이상 되는 상품성 좋은 배였다.
 산지폐기 기준은 375g 이상여야 한다. 그러나 무작위로 추출한 배는 폐기기준보다 무려 120g 이상 되는 상품성 좋은 배였다.
ⓒ 이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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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에서 산지폐기가 결정된 배 수량은 총 1170톤 5억2000만원 분량이다.

이 중 둔포면이 36농가 587톤으로 가장 많고, 원예농협 작목반 60농가 449톤, 음봉면 30농가 134톤으로 배정됐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시청, 농협 직원 입회하에 폐기되는 배에 대해서는 정부와 농협에서 18㎏당 8000원씩 지원한다. 폐기 보상금 7000원과 폐기처리비용 1000원 명목이다.

폐기 조건은 개당 375g 이상이며 상품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상품들이 가격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산원예농협 구본권 전무는 "농가에서 18㎏ 한 상자를 생산하는데 투자되는 비용은 최소 1만2000원 이상이다. 결국 정부지원으로 폐기하는 배는 상자당 최소 4000원 이상 적자가 발생되는 것이다. 농가에서는 그나마 적자를 줄여 보려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산지폐기를 신청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폐기에 앞서 소비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 사회복지시설 등에 기증할 수도 있다. 또 축산농가에 사료용으로 공급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축산농가에서 희망하는 농가가 없어 기부 이외에는 전량 폐기할 것이라고 농협 관계자는 전했다.

지난 10월30일 아산원예농협 창고에는 배를 기증받을 사회복지시설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기부할 수 있는 수량도 1인당 18㎏에 한정돼 있다. 기부에 제한을 둔 것은 만에 하나 기부된 상품이 시장으로 다시 흘러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자식 같은 농산물을 내 손으로 묻다니

배 산지폐기가 결정된 과수원은 순식간에 배의 무덤으로 변하고 말았다.
 배 산지폐기가 결정된 과수원은 순식간에 배의 무덤으로 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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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결실을 갈아 엎는 농부의 심정은 무엇일까
 한 해 결실을 갈아 엎는 농부의 심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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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퍽거리는 배의 잔해를 밟고 지나가는, 60 중반을 넘긴 농부의 뒷모습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질퍽거리는 배의 잔해를 밟고 지나가는, 60 중반을 넘긴 농부의 뒷모습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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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아산시 방축동 이근영씨(66) 농장을 찾았다. 출하를 포기하고 아산시에서 첫 배 산지폐기를 신청한 농가다. 20㎏들이 238상자의 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무려 3톤에 이르는 분량이다.

조경수 묘목을 기르던 이근영씨가 배농사에 뛰어든 것은 1990년부터다. 올해로 18년 된 배 나무는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며, 생산량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비슷한 시기에 배농사를 시작한 농가가 매우 많다고 한다.

아산원예농협 구본권 전무는 "배 재배면적은 조금씩 줄고 있지만 생산량은 오히려 늘고 있다. 1990년대 배 재배농가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이번 배 파동의 원인이다. 당시 묘목이던 배가 현재 왕성한 생산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이근영씨 농장을 찾은 방문객은 국립농산물질관리원 공무원과, 아산시청 농정과 공무원, 농협 직원 등이었다. 이들은 산지폐기기준에 적합한지 심사를 마친 후 지난 1년간 흘린 땀방울의 결실을 불과 2시간 여 만에 땅 속에 묻고 말았다.

전국적인 배 주산단지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 아산지역 배 과수원에 탐스럽게 익은 담황색 배가 버려지고 있다.

"하나라도 더 팔겠다" 트럭에 싣고 도시로

산지 과수농가 창고 곳곳에는 아직도 상품선별조차 되지 않은 배가 수북이 쌓여 있다.
 산지 과수농가 창고 곳곳에는 아직도 상품선별조차 되지 않은 배가 수북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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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가격이 폭락하고 있어다. 더 이상 창고에 방치할 수 없어 직접 트럭에 싣고 나왔다."

아산시내 한 아파트 단지에 1톤 트럭 한 가득 싣고 한 봉지에 5000원씩 듬뿍듬뿍 안겨주는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산시 음봉면에서 과수농사를 짓는다는 이들은 추석이 지나며 현 상황을 예견했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A씨는 "이렇게 농사지어 더 이상 수지타산을 맞추기 힘들다. 농협에서 산지폐기 신청 농가를 접수받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폐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A씨는 또 "현재 대학과 고교 재학중인 자녀 학비와 책값, 생활비 등을 생각하면 이대로 땅 속에 묻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직접 시내 판로를 확보하고 나섰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B씨는 "포장박스만 없을 뿐이지 맛과 품질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한 번 먹어본 주부들이 값싸고 품질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지 요즘 단골도 생겨 제법 팔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근에서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영세 상인들과의 마찰도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그나마 산지 또는 도매가격보다 몇 천원 더 얹어 팔아 마진을 조금 남기고 있는데, 농장에서 나온 이들과 또 다른 생존경쟁을 벌여야 하니 서로 어려운 처지를 잘 알면서도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농산물 값 폭락은 최일선 소비단계에서 유통질서 교란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묘안은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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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원사 <주간충남시사> 11월4일자, 생활정보신문 <교차로> 11월5일자, <인터넷충남시사> 송고했습니다.



태그:#과잉생산, #배, #산지폐기, #아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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