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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이 미국발 금융위기의 광풍에 휩싸이며 길을 잃었다. '신뢰의 위기'다. 진작에 신뢰를 잃고 이제 정권이양을 앞두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해결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공은 11월 4일 새로 선출될 미국 대통령에게로 넘어갈 것이다. 미국이 어떤 지도자를 선출할 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미국 대선 격전지를 취재하고 돌아온 KBS 1TV '특파원 현장보고'팀의 박성래 기자가 취재후기를 보내왔다.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분위기를 토대로 대선 전망은 물론 방송에서 다루지 못한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다룰 예정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1948년 대선 다음날 새벽, 해리 트루먼이 '듀이, 트루먼을 꺾다'는 역사적인 오보를 게재한 <시카고 트리뷴>을 들어 보이면서 웃고 있다.
▲ "여러분, 여론조사가 틀렸어요! 제가 이겼어요!" 1948년 대선 다음날 새벽, 해리 트루먼이 '듀이, 트루먼을 꺾다'는 역사적인 오보를 게재한 <시카고 트리뷴>을 들어 보이면서 웃고 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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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이렇게 이상한 선거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에다 조직과 선거자금, 운동원들의 열정 등 선거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오바마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매케인은 산토끼를 잡아오기는커녕 집토끼마저 놓치는 약체 후보다. 그런데도 선거 막바지까지 오바마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정말 도깨비 같은 선거다.

'과학'이라는 여론조사를 보자. 오바마가 여유 있게 앞서고 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만큼은 여론조사의 정확성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브래들리 효과'가 나타날 거라느니, 백인들이 투표장에서 반란을 일으킬 거라느니, 반대로 흑인과 젊은이들의 응답률이 낮기 때문에 여론조사에 반영이 안 됐다느니, 그래서 오바마가 지금 여론조사 수치보다 더 득표할 거란 전망이 쏟아진다.

어떤 사람들은 1948년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트루먼 대통령 자신이 '공화당 듀이 후보에게 졌다'는 신문기사를 번쩍 치켜들고 환호하는 유명한 장면이다. 역사적인 오보다. 이 신문은 선거 열흘 전에 실시한 갤럽 여론조사를 근거로 머리기사를 뽑았다가 망신만 당했다.

올해 여론조사는 어떨까? 조사기관마다 한결같이 오바마 우위를 점치는데 매케인과의 격차는 2%에서 15%까지 다양하다. 13%나 오락가락하는 여론조사 수치를 어디다 쓸 것인가? 여론조사 기관은 투표일에 실제로 어떤 사람이 투표장에 나올지 예측한 후 그 값을 반영해 최종적인 수치를 만드는데, 사상 최초의 흑백 대결인 이번 선거는 어떤 사람들이 투표장에 나올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결과가 나온다.

이 때문에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의 공동조사는 흑인의 투표율 예상치까지 친절하게 밝히고 있다. 흑인은 전체 유권자의 10%,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은 16%가 되도록 모델을 만들었다. 4년 전 대선의 실제투표율은 흑인이 11%, 30대 이하가 17%였으니 결코 무리한 예측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래도 오바마가 7%P 이긴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오바마는 아랍인이에요"



일부 백인들이 오바마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는 이달 초 미네소타에서 열린 매케인의 '타운홀 미팅'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백인 아저씨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는 게 무섭다'고 하고 어떤 백인 아주머니는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오바마를 믿지 않아요. 오바마에 대해 읽어봤더니, 오바마는 아랍인이에요."

매케인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연신 고개를 가로 저으며 황급히 마이크를 빼앗아 든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오바마는 가정적인 사람이고 점잖은 미국인입니다. 단지 이번 선거에서 저하고 근본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오바마는 아랍사람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매케인다운 대응이다. 그러나 매케인이 백인 남자에게 대답할 때 청중들의 반응을 보라. 박수를 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 굳은 표정에 말이 없고 가끔씩 야유 소리마저 들린다. 매케인을 지지하러 와서 매케인에게 야유를 퍼붓다니… 정말 매케인을 지지하기는 하는 걸까?

매케인이 아무리 설명해도 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한다. 타운홀 미팅이 끝나고 기자들이 이 아주머니에게 몰려들어 물었다. 매케인의 설명에도, 자신은 '아직도 오바마가 아랍인'이라고 믿는단다. 이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이들에게 오바마는 정말 무서운 존재다. 호랑이보다도 더, 어쩌면 곶감보다도 더….

"정말 멍청한 선거운동이군"

게티즈버그 공화당 사무소 출입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이다.
▲ "문 닫았음. 오후 3시에 엽니다" 게티즈버그 공화당 사무소 출입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이다.
ⓒ 박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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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이 투표장에 대거 몰려나온다면 대선 판도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이런 백인들이 얼마나 투표장에 나올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정답이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경천동지할 정도로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매케인은 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나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아주 황당한 장면을 보았다. 링컨이 유명한 연설을 남겼던 게티즈버그 공화당의 사무소에서다.

10월 초의 어느 날, 오전 11반이었다. 워싱턴 DC에서 두 시간을 달려 도착한 게티즈버그 공화당 사무소는 문이 닫혀 있었다. 오후 3시부터 문을 연단다. 선거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선거운동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미국 선거는 원래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

사무소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백인 남자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매케인의 스티커를 받으러 온 매케인 지지자였다. 이 남자의 표정은 내 표정과 똑같았다.

"정말 멍청한 선거운동이군!(What a stupid campaign!)"

이 남자는 이 말을 남기고 터벅터벅 걸어서 가버렸다. 곧이어 다른 백인 남자가 사무소 앞에 와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매케인 사무소는 열심히 장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찾아온 손님을 일부러 내쫓는 이상한 가게 같았다.

펜실베이니아의 다른 사무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의 지역 사무소에 갔더니 한 명이 덜렁 앉아 있다. 주말이라 자원봉사자들이 꽤 있을 거란 예상은 무너졌다. 선거이벤트는 고사하고 가가호호 방문이나 전화 돌리는 장면이라도 감지덕지 찍겠다고 했건만 오늘은 아무 계획이 없으니 필라델피아 본부로 가보란다.

차이나 타운에 있는 필라델피아 본부. 여기는 사무실이 좀 크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 유리창으로 빼꼼 들여다보니 여기도 한 명이 덜렁 앉아 있다. 뭐 찍을 것 없느냐고 했더니 없단다. 오후에 혹시 생기면 연락을 주겠다며 내 휴대전화 번호를 받아 적는다. 그날 오후에 연락은 없었다. 그날은 공쳤다.

허탈한 심정으로 사무실을 나오는데 10미터쯤 떨어진 길바닥에서 백인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들여다보니 조그만 좌판에 오바마 배지를 늘어놓고 팔고 있다. 배지를 팔아 번 돈으로 오바마 캠프에 선거자금에 보태는 것이다. 이런 건 찍을 필요도 없다. 길거리에 널린 게 오바마 운동원이니까.

가뜩이나 선거자금에서 밀리는데 매케인 쪽은 거액을 들여 빌린 사무소를 놀리며 돈을 낭비하고 있었고, 선거자금이 넘쳐나는 오바마 쪽은 자원봉사자들이 길거리 좌판을 벌여가며 선거자금을 보내고 있다. 어지러웠다.

필라델피아가 민주당 강세지역이라 그럴까? 우리는 며칠 뒤 세 시간을 달려 펜실베이니아의 주도(州都) 해리스버그로 갔다. 펜실베이니아 주 본부라서 그런지 사무소에는 서너 명은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선거운동 장면은 촬영할 수 없었다.

홍보담당자는 찍을 게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득표에 도움도 안 되는 외국언론이 귀찮은 듯 인터뷰 하나 달랑 해주고는 사무실 내부도 찍지 못하게 했다. 언뜻 칠판을 보니 날짜별로 자원봉사자 이름이 적혀 있는데 주말이라 해봐야 서너 명 수준이었다.

이날도 공쳤다. 자동차로 700Km를 넘게 달렸는데 선거운동 장면 비슷한 건 하나도 못 찍었다. 격전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TV를 틀면 전혀 다른 세상이다. 아침 시간, 호텔에서 1시간 동안 TV를 켜놓고 카메라로 찍었다. 오바마 광고는 2개, 매케인 광고는 4개였다. 매케인 쪽 광고는 '오바마는 위험하다', '준비가 덜 됐다', '세금을 왕창 올릴 것'이라는 네거티브 광고들이다. 펜실베이니아를 반드시 먹겠다며 없는 돈을 쪼개 가면서 출혈에 가까운 돈을 TV광고에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밑바닥의 조직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래위가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그나저나 환장할 노릇이다. 방송에서 시청자들에게 '매케인 선거운동은 못 찍었노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러고도 매케인이 이길 수 있을까? 선거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조직이 저 모양인데?

'백인이 아니라 투명인간이라도 이런 선거를 이길 수는 없지 않을까' 그게 내가 그날 느낀 것이었다.

승부를 운에 맡기는 매케인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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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케인은 펜실베이니아에 막바지 승부를 걸고 있다. 한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펜실베이니아를 방문한다. 그냥 잠시 들렀다 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몽땅 털어서 유세하고 선거 마지막 주인 지난주에는 27일과 28일 이틀 연달아 머물며 총력전을 펼쳤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펜실베이니아는 지난 20년간 줄곧 민주당 후보가 이겼다. 매케인이 전국 여론조사를 앞서갈 때도 펜실베이니아는 오바마가 이기고 있었다. 오바마는 금융위기 이후 지지율 50%를 넘어서 10%P 정도 앞서고 있다.

펜실베이니아를 포함해 미국 대부분의 주는 승자독식 제도를 갖고 있다. 한 표라도 더 얻은 후보가 선거인단을 독차지하고, 한 표라도 덜 얻은 후보는 선거인단을 몽땅 상대에게 빼앗긴다. 매케인이 50%를 먹을 자신이 없으면 판을 접고 다른 주에서 승부를 보는 게 현명하다.

그런데 다른 주 어디? 거의 없다. '격전지' 대부분이 2004년 부시가 이겼던 주들이라는 데 매케인의 고민이 있다. 금융위기 이후 소위 '부시 주들'이 오바마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아이오와나 뉴멕시코는 사실상 오바마 손에 들어갔고, 콜로라도·네바다·오하이오·버지니아도 오차 범위를 벗어났다. 플로리다나 노스캐롤라이나는 거의 동률이다. 오바마는 이 중에서 서너 군데만 이기면 백악관의 주인이 된다. 그게 오바마 대세론의 실체다.

매케인으로서는 거꾸로 2004년 케리가 이겼던 주들을 빼앗아오지 않으면 역전의 희망마저 사라진다. 매케인이 펜실베이니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길 가능성은 둘째 치고 선거인단이 21명이나 되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죽든 살든 승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역전 전략의 큰 그림상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를 포기하면 선거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백인 인구가 87%로 미국 평균보다 20% 이상 많다는 점이 매케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막바지 인종 변수가 크게 작용한다면, 백인 유권자들이 대거 몰려나온다면, 펜실베이니아를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11월 4일 백인 인구가 많은 다른 주에서 백인들이 소위 '투표장 반란'을 일으켜 준다면 의외의 승리를 거머쥘 수도 있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매케인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매케인은 승부를 운에 맡기고 있는 셈이다.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펜실베이니아를 다시 찾은 매케인이 거의가 백인인 청중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펜실베이니아에 또 오게 돼서 기쁩니다. 소위 선거전문가란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 더 기쁘겠죠. 우리는 펜실베이니아를 이길 겁니다. 11월 4일 모두들 투표장에 나오면 우리가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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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박성래 기자는 KBS 국제팀 소속으로 한국 대선과 미국 대선을 각각 2차례씩 취재했다. 저서로는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와 최근에 출간한 <역전의 리더, 검은 오바마>(랜덤하우스)가 있다.



태그:#미국 대선, #공화당, #매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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