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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 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 <기자 주>

 

 

아침에 잠시 짬이 났다. 카메라를 챙겨 룸메이트와 함께 취푸 거리로 나섰다. 출근 시간임에도 거리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왕복 4차선 도로에 차들이 별로 없었다. 대신 자전거, 스쿠터, 인력거, 마차 등이 도로를 오갔다. 교차로에는 공안(公安)들도 몇 명 나와 있었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듯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멋쟁이 젊은 여성부터 넥타이를 맨 남성, 그리고 인민복을 입은 중년 남성까지 모두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아이를 자전거에 태운 노인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중국정부의 강력한 산하제한 정책에 따라 소황제(小皇帝)가 된 아이들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중국 여행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풍경이었다.

 

길옆의 가게들은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했다. 한 의류가게 종업원들은 가게 문을 열고 유리창을 닦고 걸레질을 했다. 한 화장품 가게 안에선 종업원들을 모아놓고 조회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가게 앞에서 한 사람의 선창에 따라 일렬로 늘어서 뭔가를 큰 소리로 외치는 종업원들도 있었다. 취푸의 하루는 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취푸는 공자의 고향답게 공자와 유가의 말씀을 적어놓은 배너들이 거리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때도 선보였던 '사해 안이 모두 형제(四海之內皆兄弟也)'를 비롯해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德不孤 必有隣)', '예를 행함에 있어 조화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禮之用 和爲貴)',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등처럼 관광지에 어울리는 문구들이었다. 2500년 전 공자의 가르침이 후손들에 의해 그렇게 재활용되고 있었다.

 

ⓒ 천호영

 

"<삼국지> 배경, 양쯔강 유역이 황허 유역으로 편입되는 물류전쟁"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버스가 출발했다. 전날 중간평가 시간에 유중하 교수(연세대 중문학)는 "중국이라는 코끼리를 이해하려면 코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 코는 바로 중국의 문화이고, 그 원천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고전"이라고 덧붙였다. 버스는 중국의 고전, 4대 기서(奇書)의 하나인 <수호전(水滸傳)>의 고장 량산(梁山)을 향했다.

 

취푸를 빠져나와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다리 위에서 멈췄다. 다리 아래로 제법 큰 물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베이징과 저장성(浙江省)의 항저우(杭州)를 잇는 징항운하(京杭運河)였다. 징항운하는 605년 수 양제(隋煬帝) 때 시작해 1293년 원(元)나라 때 완공된, 총길이 1764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운하로 알려져 있다.

 

 

버스에서 모두 내렸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아 보였다. 운하 변에선 강태공의 후예들 몇 명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만 운행하고 있지만 예전 징항운하는 중국의 남과 북을 잇는 주요 물자운송 루트였다. 특히 쌀 등 남방의 곡물들이 징항운하를 통해 황궁이 있는 북방으로 보내졌다.

 

당 현종(唐玄宗) 때 양귀비가 장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에서 광둥(廣東) 지방의 특산과일인 리지(荔枝)를 즐겨 먹을 수 있었던 것도 징항운하가 있기에 가능했다. 유 교수는 "<삼국지>도 물류전쟁으로 읽을 수 있다"며 "양쯔강(揚子江) 유역이 황허(黃河) 유역으로 편입되었던 전쟁이 바로 <삼국지>의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징항운하는 거대했고, 그것을 관리하는 관료조직은 비대했다. 조직은 점점 더 비효율적으로 변해갔고, 운하 주변의 지방 토호세력과 결탁한 관료들의 부정부패도 심해졌다. 청(靑)나라 말기에 들어선 수위를 조절하지 못해 운하가 범람하고, 곡물 운송기능은 약화됐다. 운하 주변에서 거룻배를 끌며 생활하던 노동자들의 불만도 커졌다.

 

그 때문에 청의 가경제(嘉慶帝) 때는 운하 대신 바다를 이용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으나, 운하체제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세력들의 반발에 부딪쳐 결국 그 계획은 취소됐다. 중국의 해운이 성장할 기회는 차단됐고, 중국은 제국주의 열강들과의 해상 경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서 여전히 운하에 집착하고 있는 세력들의 속셈은 무엇일까.

 

'의(義)'로 도배하다시피 한 량산

 

량산(梁山)에 도착해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공안(公安)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량산현 <수호전> 관계자들과 간담회가 예정돼 있는 장소까지 우리 일행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공안차는 사이렌까지 울리며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를 선도했다. 중국 땅에서 공안의 선도를 받는 호사를 누리다니! 유 교수는 "다 꽌시(關係)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때때로 공안차량은 앞차를 추월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중앙선을 넘어섰다. 다소 어이가 없었다. 하긴 지금까지 거쳐 온 다른 도시들에서도 도로는 깨끗이 정비돼 있었지만, 차량이나 보행자나 교통신호를 무시하는 경우를 수시로 목격한 터였다. 정부 차원에서 그토록 '문명'을 강조함에도, 외양은 쉽게 뜯어고칠 수 있지만 오랫동안 굳어진 관습과 의식만은 쉽게 바꾸기 힘든 듯했다.

 

30분 정도 더 달린 뒤 행사장에 도착했다. 먼저 부현장이 량산현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산둥성 지닝(濟寧)시에 속하는 량산은 예전부터 산둥지역 교통의 요지였다. 북쪽으로 황허가 흐르고 가까이 징항운하가 있었다. 교통의 요지로 물류가 집결됐고, 풍부한 물산이 량산포(梁山泊) 108 호걸들의 물적 토대가 됐다. 지금도 주요 철도와 고속도로와 국도 등이 사방으로 연결돼 있다.

 

 

다음으로 량산현수호문화진흥회장이 <수호전>에 대해 설명했다. <수호전>은 송강(宋江)을 비롯한 108명의 호걸들이 량산포를 근거지로 삼아 봉건 왕조의 학정에 맞서 벌인 싸움을 다룬 작품이다. 무엇보다 무관, 학자, 상인, 농민, 어부, 땡추, 건달, 도둑 등 출신이 다양한 인물들의 성격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또 그들의 개인사와 활약상을 통해 불의에 맞서는 의협, 부패한 권력에 대한 민초의 저항심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기에 시대를 뛰어넘어 중국인들에게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진흥회장은 "<수호전>은 북송 말기 송강을 수뇌로 일으킨 실제 농민봉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서 "송강 등 36명은 실존 인물"이라고 말했다.

 

<수호전>은 '관에 민이 맞선다'는 반체제적 성격으로 인해 명(明)나라 때는 금서였다. 진흥회장은 "그 때문에 지금도 공자의 연구만큼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베이징올림픽 때도 <수호전>과 관련한 이벤트는 없었다. 진흥회장은 "그러나 108 영웅들은 조정을 반대했다기보다는 탐관오리의 학정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량산포에 올랐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량산인의 기질에 대해 묻자 가장 먼저 의협심을 내세웠다. 그는 "이런 기질이 지금도 량산인들이 친구를 사귀고 사업을 하는 데 기준이 된다"고 했다. 실제로 량산에 들어서며 가장 눈에 많이 띈 글자가 '의(義)'였다. 가게이름, 광고판, 건물 벽, 가로등 배너, 버스 등 모든 거리를 '의'자로 도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곳 특산주의 이름도 '이(義)'였고, 간담회가 열린 곳도 '쥐이로우(聚義樓)'였다.

 

 

량산포, 세월과 자연의 힘을 느끼다

 

점심을 먹고 량산포 산채(梁山寨)에 올랐다. 버스는 몇 분 되지 않아 산채에 도착했다. 산채가 있는 곳은 의외로 깊지도 험하지도 않았다. 량산포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 후토우펑(虎頭峰)의 높이도 197m밖에 안된다고 했다. 108 호걸들이 량산포를 근거지로 삼은 것은 산세보다는 물길이 험했기 때문이다.

 

800년 전까지 량산포 아래는 800리에 달하는 호수였다고 한다. 가파른 계곡과 물길로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황허의 모래가 밀려와 물길을 덮어버렸다. 지금은 주변에서 큰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세월과 자연의 힘을 새삼 느꼈다.

 

 

산채 입구 광장에는 <수호전>의 작가인 시내암(施耐庵)의 석상이 서 있었다. <수호전>의 작가에 대해선 후대의 나관중(羅貫中)으로 보거나, 또 시내암의 원작을 나관중이 보완해 완성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수호전>은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청나라 때까지 <수호전>은 계속 새롭게 쓰여졌다. 그때마다 당대 중국 인민들의 열망을 반영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그런 점에서 일본 교토(京都)대 명예교수를 지낸,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중국을 아는 데는 사서오경보다 <수호전>이 더 유용하다"고 했다.

 

 

산채를 들어서 계단을 조금 오르자 '수이포량산(水泊梁山)', '호연지기가 산악을 감싸고 있네(浩氣撼山岳)' 등의 문구를 새긴 암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길은 두 갈래였는데, 왼쪽 길은 보수중이어서 오른 쪽 계단 길을 택했다. 계단 옆에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무송(武松)과 수양버들을 뿌리째 뽑아버린 노지심(魯智深), 두 장사의 석상이 무기를 움켜쥔 채 노려보고 있다. 환영하는 모습치고는 표정이 꽤 험상궂다.

 

 

108계단을 오르니 길옆에 작은 정자가 있다. 량산 호걸들이 처음 모인 두안진팅(斷金亭)이다. <역경>의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단단한 쇠라도 끊을 수 있다(二人同心 其力斷金)'란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계속 좁은 길을 올랐다. 길 옆 오른쪽은 제법 가파른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은 세찬 물살 대신 수풀이 우거져 있었지만, 이곳이 호걸들의 활동 당시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길목마다 서 있는 안내판은 다양한 무기 형상이었다. 어떤 곳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도끼 창에 '느낌표(!)'를 그려놓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애교스러웠다.

 

마오가 이규를 제일 영웅으로 꼽았던 까닭

 

조금 더 오르자 가슴을 풀어헤치고 두 눈을 부릅뜬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의 석상이 나타났다. 한 손엔 그를 상징하는 무기인 도끼가 들려 있다. 성격이 급하고 우직해 사고도 많이 치지만 송강 등 호걸 형제들 외에는 두려울 게 없었던 인물이다. 빈농 출신으로 지주 등 봉건지배계급에 대해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은 물론 황제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국인들, 특히 산둥사람들은 <삼국지>의 유비처럼 우유부단한 송강보다는 장비처럼 화끈한 이규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소년 시절부터 <수호전>을 즐겨 읽었던 마오쩌둥(毛澤東)도 이규를 량산포 영웅 중 첫째로 꼽았다. 마오가 보기에 송강은 '충(忠)'과 같은 유교의 봉건사상에 얽매였던 인물임이었음에 비해 이규는 뿌리부터 철저히 혁명가였다.

 

집권 이후 마오는 <수호전>을 자신의 통치에 활용하기도 했다. 문화혁명 말기인 1975년, 송강의 투항주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당시 재집권한 덩샤오핑(鄧小平)과 그의 후견인 저우언라이(周恩來)를 공격했던 것이다. 다음해에는 사인방(四人幇)이 덩샤오핑의 재실각을 노리고 투항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마오가 죽고 사인방이 체포된 뒤에는 <수호전>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 제기됐다.

 

<수호전>이 이처럼 정치 공방의 무기로 활용됐던 까닭은 이 작품이 문학과 역사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 지도자와 인민 사이에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현재까지 중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도 <수호전>은 필수적인 참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인육만두를 팔았던 손이낭의 발자국

 

 

이규 상 부근에 있는 그의 별호를 딴 헤이펑팅(黑風亭)에 올랐다. 아래로는 낭떠러지, 왼쪽으로는 올라올 때 보았던 계곡, 그리고 앞으로 저 멀리 량산현이 내려다 보였다. 량산현의 집들은 모두 지붕을 노란색 물감으로 칠한 듯했다. 곁에 있던 량산포 안내원이 "지붕에서 옥수수를 말리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헤이펑팅 앞에는 두 군데 구멍이 난 바위가 있었다. 구멍 아래엔 '손이낭의 발자국(孫二娘脚印)'이라고 새겨져 있다. 손이낭은 량산포의 여걸 3명 가운데 한 명이다. 인육(人肉)으로 소를 빚은 만두를 팔아 '어미 야차(母夜叉)'라 불리기도 했던 인물이다. <수호전>의 시대 배경이 되는 북송 말기엔 많은 사람들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고, 그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바위의 발자국이야 중국인의 '구라'겠지만, 인육만두는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숲으로 난 오솔길을 지나자 돌로 쌓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강을 포함해 량산포 두령들이 기거하던 송강채(宋江寨)의 성벽이다. 지금 량산포의 목조건물들은 새로 지은 것들이지만 이 돌들만은 800여년 전 그때 그 돌들이라고 했다. 당시엔 높이 3m, 폭 2m의 이중성벽으로 철옹성을 구축했다는데, 지금은 어른 키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돌들은 당시 산채 호걸들의 기개와 함성과 최후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성벽 앞의 기념품점 안에서 한 노인이 잠시 상념에 잠긴 일행들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다음으로 우리를 맞은 것은 이화영(李花榮) 석상이었다. 그는 신사(神射)라는 별호답게 활을 든 채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전설적 명궁인 한나라 이광에게 뒤지지 않아 '작은 이광(小李廣)'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하늘 높이 날아가는 기러기의 눈을 맞출 정도로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아마 지금 태어났다면 올림픽에서 우리의 태극 궁사들과 좋은 맞상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

 

드디어 량산포의 정상 후토우펑(虎頭峰)에 올랐다. 산채의 본부였던 쥐이팅(聚議廳) 건물 앞마당 장대 위에 높다랗게 매달린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깃발에는 체천행도(替天行道), 즉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한다'는 량산포 호걸들의 기치가 적혀 있다. 양 옆으로는 색색의 '의(義)'자 깃발이 나부꼈다.

 

 

쥐이팅 안으로 들어서자 중앙에 량산포 호걸들이 군사 작전을 논의했던 중이탕(忠義堂)이 자리하고 있다. 산채 좌우 벽면에는 드라마 <수호전>의 스틸 사진으로 장식해놓았다. 마당 곳곳에 매달린 빨간 종이등에도 '의(義)'자가 선명하다. 중이탕 좌우에는 18반 무기가 전시돼 있다.

 

 

중이탕 안은 조명도 없고 어두웠다. 창살 사이로 비치는 햇살로 희미하게나마 내부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면 중앙에 량산포 서열 1-3위인 송강(宋江), 노준의(盧俊義), 오용(吳用) 등 세 두령의 깃발과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좌우로 서열에 따라 빨강, 노랑, 파랑의 순으로 다른 호걸들의 별호와 이름이 적힌 깃발들이 세워져 있다. 량산포 안내원은 "이곳 동네아이들도 108 영웅의 이름과 별명을 다 외우고 있다"고 했다.

 

 
내려오는 길에 운 좋게 두안진팅에서 민간예술가 치우충탕(邱忠堂) 옹이 공연하는 산둥 곡예를 관람할 수 있었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108 영웅의 특기에 대해 읊는 등 주로 <수호전> 관련 내용이었다. 특히 산둥사범대에서 봤던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는 대목을 량산포 현장에서 들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중국인의 고전은 그렇게 끊임없이 전승되고 있었다.

 

중국 열차와 '만만디'

 

다음날 일정은 상하이였다. 상하이행 열차를 타기 위해 량산에서 타이안(泰安)시로 돌아왔다. 열차 출발시각은 밤 10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약 30분 전쯤 역에 도착했다. 역 이름은 타이안이 아니라 타이산(泰山)이었다.

 

역사 안은 침침했다.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비좁은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 술이라도 마셔둔 걸까. 흡연실 의자에 길게 누워 잠을 자는 남자도 있었다.

 

5년여 전 중국 처음 여행했을 때 베이징 시내 가게 간판에 '기차(汽車')라 적은 곳이 너무 많아 의아해했던 기억이 났다. 어떻게 시내 곳곳마다 기차를 정비하고 수리하는 곳들이 이리 많이 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치처(汽車)는 기차가 아니다. 우리와는 달리 중국에서 치처는 자동차를 가리킨다. 우리의 기차에 해당하는 말은 후어처(火車)다.

 

중국에서 철도는 총길이가 약 5만2천km로 지구 둘레보다도 길다. 중국대륙 동서 횡단 축이라 할 수 있는 장쑤성(江蘇省) 롄윈강(連雲港)에서 신장성(新彊省) 우루무치까지도 3700km나 된다. 기차만 꼬박 약 45시간을 타야 한다. 동북지역에서 신장까지 열차를 갈아타며 간다고 할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나온 우스개.

 

동북지방에서 신장으로 열차를 타고 여행하던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도착할 때가 다 돼가니 내릴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도착역까지는 아직 300km나 남아 있었다. 그 할아버지로선 며칠 동안 1만여km를 달려왔으니 거의 다 온 셈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의 만만디 기질도 그런 거리·시간 관념과 깊이 연관돼 있다. 가이드의 얘기.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로 약 5시간 정도 걸리는 걸로 안다. 그런데 산둥성 웨이하이에서 신장성 위구르족 자치구까지 가려면 차로만 1주일을 가야 한다. 그러니 1시간 빨리 간다고 빠르다고 느끼겠는가." 산둥성 가이드와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변화하는 중국

 

열차에 올랐다. 중국의 열차는 속도에 따라 뤼여우처(游車), 트콰이(特快), 즈콰이(直快), 콰이커(快客), 즈커(直), 커(客) 등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탄 열차는 급행에 해당하는 콰이커였다.

 

그리고 침대차였다. 3단으로 나뉜 침대가 마주하고 있어 6명이 한 칸에서 잘 수 있다. 마주보는 침대 사이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따로 문이 없는 까닭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가방을 맨 아래 침대와 바닥 사이로 밀어 넣었다.

 

잠시 뒤 승무원이 와 열차 티켓을 받고 대신 카드를 내줬다. 내릴 때 카드를 다시 티켓으로 바꿔준다고 했다. 왜 그러지? 티켓을 잃어버릴까봐? 뭔가 승무원이 일하는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일행 중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열차는 고급스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정돈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트리스도 조명 탓인지 모르지만 깨끗해 보였다. 에어컨 바람도 적당해 공기도 쾌적했다. 복도도 깨끗하고 중국인 승객들도 조용했다. 고급차라 그런가?

 

이번 중국연수를 알선한 조창완 알자여행 대표는 "열차 여행을 하면서 중국도 변할 수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2000년대 전까지만 해도 복도에 쌓인 쓰레기더미 때문에 바닥을 밟을 수가 없었다. 몇 년 지나자 역무원들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버려지면 바로 치웠다. 고급객차부터 일반객차로 점차 확대했다. 몇 년을 계속 그렇게 했더니 지금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졌다."

 

변화하는 중국. 그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상하이다. 상하이를 방문한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그 발전상을 보고 '천지개벽'이라며 감탄했다는 곳이다. 자고 일어나면, 다음날 새벽 6시에 바로 그 상하이에 도착할 것이다. 중국은 어떻게 변화하고,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11시에 객차 내 불이 꺼지고, 침대에 올라 잠을 청했다. 중국연수 다섯째 날이었다.


태그:#중국연수, #취푸, #량산포, #수호전, #중국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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