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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들은 10·26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을 떠올릴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는 여가수와 여대생을 불러다 놓고 궁정동 안가에서 부하들과 함께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가 자신의 둘도 없는 학교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당했다."

지금까지 '10·26 = 박정희 서거일'로만 알고 있었다. 박정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과연 10월 26일을 박정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10·26=박정희 서거일'이란 등식의 사회적 각인은 깊은 듯하다.

책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의 표지
 책 <대한민국 다큐멘터리>의 표지
ⓒ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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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 날 정지환 기자의 역사 추적기 <대한민국 다큐멘터리>라는 책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10월26일은 박정희의 10·26만이 존재하는 날이 아니었다. 그 날의 낮과 밤은 너무도 달랐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1879~1910)가 95년 전 하얼빈 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 민족의 이름으로 저격한 날이다."

박정희의 10·26만이 아닌 안중근의 10·26도 존재했다는 미처 몰랐던 사실. 같은 10월 26일이되 그 성격과 의의는 판이한 그 날의 낮과 밤. 그러나 10·26을 '안중근 의거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 않을까. 도리어 대다수 한국인이 10·26을 '박정희 서거일'로 기억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의로운 죽임'이 '개같은 죽음'보다 홀대받아온 이유는 뭘까?"
"안중근 의사가 여전히 '일반 국민 대중 속의 안중근'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일부 우익 보수 속의 안중근'으로 축소된 채 박제화 됐다는 것, 이 나라의 여론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의 가슴에 안중근보다 박정희가 더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 등에서 보다 정확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지금까지 안중근 의사하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만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극우파들까지 존경을 표시할 정도라고 한다. '우익의 안중근'은 존경을 받고 있지만 '국민의 안중근'은 어떨까. 글쎄, 많은 사람들이 안중근의 손바닥 도장과 '대한국인'이란 글씨를 많이 소비하고는 있지만 과연 안중근이라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독한 테러리스트'로 그려지는 그를 마음 한 편으론 다소 불편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제대로 알고 보면, 안중근 의사는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저격은 벼랑 끝에 몰린 당시 대한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독립투사인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상징적 수단에 불과했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하며 우리는 안중근 의사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붙잡힌 뒤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세를 잘못 판단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이토의 진심을 오해하여 실수로 한 짓이라고 말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회유를 받았으나 안 의사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대신 그는 독립 의병군 중장으로서 10만의 의병을 죽인 적장을 전투에서 사살한 것뿐이니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하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일제 법원이 사형 선고를 내리자 곧바로 항소를 포기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어 우리는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고도 곧바로 항소를 포기했다는 사실, 의병군 중장을 자임하며 히로부미를 사사로운 감정에서 죽인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사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안 의사가 '법정투쟁'과 저서 '동양평화론'을 통해 밝힌 주장과 정신은 1919년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의 정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음은 안중근이 사형을 앞두고 남겨놓은 '한국인 안응칠 소회'라는 서면 답변서의 일부이다.

하늘이 백성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으레 문명시대라고 일컫지마는, 나는 홀로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동양과 서양, 잘난이와 못난이,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 사회의 고등 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하는 것도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 때문에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닐 것이냐.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글로 쓰기가 어렵다. 이른바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늙은 도적 이등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 안중근의 '한국인 안흥칠 소회' 중

솔직히 안중근을 문명사상가이자 평화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자 시민운동가라고 치켜세우는 저자의 주장에 고개가 다소 갸우뚱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답변서를 읽어가며 이내 고개가 조금씩 끄덕여지는 듯 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평화 정신이 제대로 일반 국민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업은 후대에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이렇듯 안타까움을 표하며 박정희 정권이 안중근 의사를 통치의 도구로 이용하려 한 사실도 밝힌다.

"1979년 9월 5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박정희의 휘호가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졌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관동군 장교로서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며 일제에 부역했던 박정희가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안중근 의사를 위해 휘호를 쓴 것도, 사전적 표기인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아니라 반민특위의 슬로건이었던 '민족정기(民族正氣)'를 휘호의 내용으로 쓴 것도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1979년 9월 5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졌다.
 1979년 9월 5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는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殿堂)’이라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가 새겨진 돌비석이 세워졌다.
ⓒ 네이버 블로그 '사랑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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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에 앞서 박정희는 친일잡지 <조광>의 주간이던 이은상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위격을 이 충무공과 동격으로 높이는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이 사업은 박정희의 급작스런 사망과 함께 전면 중단됐다. 안중근 의사의 상징적 이미지를 유신시대가 원하는 국난극복(?)과 체제수호의 인물, 즉 국수주의와 파시즘 통치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려던 원대한 구상은 그렇게 10·26과 함께 연기처럼 스러졌다.

사실 그것은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안중근과 박정희 역시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서로 일치하기 힘든 관계였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부친이 세상을 뜨자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가산을 정리해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워 영재를 키우다가 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항일 독립군이 됐다.

그러나 대구사범을 나와 일제가 세운 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박정희는 어느 날 문득 '긴 칼이 차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서 '진충보국 멸사봉공 일본제국 황국신민 박정희'라는 혈서를 일본 천황에게 바치고 독립군을 때려잡는 일본국 장교가 된다."

책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조선일보와 5년 간 명예소송을 벌인 바 있는 정지환 기자가 현대 한국을 이끌어 온 이념과 여론, 지배 엘리트 위주의 인식 이면에 버려진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간 여러 매체에 간간이 발표되어온 '역사추적기'를 다듬어 한 자리에 모았다.

'친일인명사전'의 국고지원에 반대하는 국사편찬위원들의 회의 내용, 극우 인사들의 안중근 의사 왜곡, 1948년 여순 사건의 실체, 한국논단 사상검증 토론회 등 그가 '진정한 개혁의 발목을 잡는 기성 패러다임'이라고 판단한 역사의 고리를 저널리스트다운 자료조사에 바탕한 빠른 문체로 기록하고 있다.
우익의 안중근과 국민의 안중근, 박정희의 혈서와 안중근의 혈서, 박정희의 10·26과 안중근의 10·26, 두 사람의 삶이 묘하게 겹쳐지는 10월 26일. 박정희와 안중근. 생각이 많아진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데, 앞에서 거론했던 10·26이 바로 그것이다. 안중근은 그 날 아침 의병군 대장으로서 적장을 의롭게 죽였고, 박정희는 그 날 밤 주색에 빠져 있다가 개 같은 죽음을 당했다. 우리가 이제 10·26을 '박정희의 밤'이 아니라 '안중근의 아침'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안중근 의사의 평화를 위한 도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21세기의 지구촌 평화를 위해 달려나가야 할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안중근은 죽음으로써 물었고, 이제 살아있는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우리는 10·26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태그:#안중근, #10·26, #10월26일, #정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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