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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0.21 대책'으로 부동산 살리기에 나섰다. 국민 세금으로 그동안 폭리를 취했던 건설사를 살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정부는 "가계 주거부담 완화"라는 명분을 내건다. 더구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든 폭락하든 항상 주거 불안에 시달리는 빈곤층을 위한 대책은 어디에도 없다. <오마이뉴스>는 몇 평짜리 보금자리에서마저 내쫓기고 있는 '부동산 극빈층'의 절규를 듣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편집자말]
서울 왕십리 뉴타운 예정지 주민들이 '반대 입장'의 플래카드를 걸었다.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 1번 출구에서 내리면 곧바로 펼쳐지는 장면이다.
 서울 왕십리 뉴타운 예정지 주민들이 '반대 입장'의 플래카드를 걸었다.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 1번 출구에서 내리면 곧바로 펼쳐지는 장면이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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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빈집 앞에서 경찰과 철거반이 맞붙다

"이 집 세입자가 누구예요? 있어? 있냐고. 아줌마야? 아니잖아. 그럼 비켜. 왜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그래. 거기 아저씨들, 우리도 이 사람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경찰은 폭력사건만 담당하지, 우리가 민사사건 취급 안 하잖아. 우린 형사만 한다고." (한 경찰)

"아니 이보세요. 경찰이 말이야, 지금 개싸움 붙이는 거야 뭐야. 철거반하고 세입자 싸우면 그때 가서 연행하겠다는 거야 뭐야. 이거 이미 멸실신고 난 건물이니까 이 사람들 이러는 거 불법이에요. 아무튼 알아서 좀 해줘요." (한 철거반원)

"알아서? 아저씨가 정 답답하면 이 사람들 고소해. 벌금 물려. 그럼 되잖아. 민사로 하라고, 민사로. (뒤돌아서 세입자들을 바라보며) 지들만 인권 있는 줄 알아. 박정희 시대 같아봐." (한 경찰)

23일 오후 서울 왕십리뉴타운 제2구역 철거 예정지에서는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졌다. 동네 세입자들이 철거작업을 저지하자 철거반이 경찰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싸움은 출동한 경찰과 철거반 사이에서 벌어졌다. 

경찰과 맞붙은 철거반 팀장은 "나도 능동 사는 세입자"라며 "하루 일당 8만원이라도 받아야 새끼들과 굶지 않고 산다,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왕십리에서는 철거반을 하면서 돈을 벌지만, 능동에서 만약 철거가 진행된다면 '단결투쟁 조끼' 입고 "못 나간다"고 버틸 수도 있는 세입자였던 셈이다.

왕십리뉴타운 예정지에서 세입자대책위 사람들과 철거반이 대치 중이다.
 왕십리뉴타운 예정지에서 세입자대책위 사람들과 철거반이 대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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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2. "집값이 미쳤어요"

"애들만 없으면 딱 죽었으면 좋겠어요."

잠실과 부평에 아파트 2채를 갖고 있다가 IMF 구제금융 위기 때 부도 맞아 하왕십리 월세방으로 옮겨온 '자크(지퍼) 아줌마' 지아무개(45)씨. 남편이 지퍼 공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크 아줌마'로 불린다. 지씨는 23일 왕십리뉴타운 세입자대책위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왈칵 울음을 쏟아냈다.

"조합장이 더 버티지 말고 이사 가래요. 이주비는 780만원 준다는데, 그걸로 어딜 가냐구요. 우리 애들이 고3, 고1이에요. 결국 새끼들 데리고 길거리에서 죽으라는 건대. (울음) 법, 법, 그 '잘나빠진' 법 얘기. 이젠 신물 나요. 벌어도 만날 그 타령. 신랑한테 그래요, 너는 뭐하다 이 꼴을 만들어놨냐고. 친척? 부도 맞으니 가족이 제일 먼저 멀어집디다."

창이 없어 낮에도 컴컴하지만 방 셋에 화장실 겸 부엌도 있는 길가의 집. 지씨는 여기서 지난 10년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주고 살았다. 그런데 남편 사업자금 때문에 보증금마저 몽땅 날린 지씨. 지퍼 코팅업을 하는 남편은 경기 불황 때문에 일도 없어 제때 생활비를 갖다주지 않는다.

"목돈 만져본 것은 'IMF 귀신' 오기 10년 전뿐이에요". 지씨는 한숨을 쉬었다.

지난 1998년 남편 사업체가 부도가 난 뒤 10년간 계속 빚을 갚았지만 아직도 태산이다. 딸아이가 목숨처럼 아끼는 피아노는 물론 TV·냉장고·컴퓨터·프린터·전자레인지·세탁기 모두 압류 딱지가 붙은 상태다. 압류 붙일 것도, 내다 팔 것도 집안에는 없다. 재개발조합으로부터 이주비 780만원을 받는다 해도 건져나갈 세간도 없는 상황이다. 이 상태에서 죽지 않고 살라는 건 오히려 고문이라고 말했다. 애들이 어리면 시골 친정에 맡기고 뭐든 해보겠는데 고3 딸은 전문대라도 가겠다고 우긴다.

"오히려 IMF 때가 더 나았어요. 그땐 돈 1000만원이라도 쥐고 있으면 서울 변두리에서 월세를 얻을 수 있었는데 요즘은 갈 데가 없어요. 이 우스운 집이 얼마인줄 아세요?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 전세는 1억5000만원이에요. 집값이 미쳤다고 생각해요."

IMF 때 남편의 사업부도로 왕십리로 이사했다는 주부 지아무개씨
 IMF 때 남편의 사업부도로 왕십리로 이사했다는 주부 지아무개씨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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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3. "뉴타운은 돈 먹는 하마"

"주인이 마냥 살 생각은 말라기에 월곡동 임대APT 신청해 들어갔어요. 우리가 살던 전셋집은 3000만원인데, 임대APT 입주비는 3735만원이에요. 하는 수 없이 대출받았죠. 나는 중풍이 두 번이나 왔고, 아들은 직업도 없이 놀아요. 생계비도 막막한데 대출이자까지 갚아야 하니 어쩜 좋아요? 뉴타운은 '돈 먹는 하마'예요. 결국 우리는 빚더미에 안게 될 거예요."

김아무개(60) 할머니는 막막하다고 했다. 뉴타운만 아니었어도 25년 살던 왕십리에서 그럭저럭 살 수 있었는데 쫓겨나게 됐다고 탄식했다. 나이 육십에 건강도 안 좋은데 빚까지 지게 됐으니 이걸 다 어떡하면 좋으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십리에 새 아파트들이 들어서도 원주민은 거의 살 수 없다"는 김씨는 "결국 이명박 정부가 뉴타운사업을 통해 서민 몰아내기 청소를 하고 있다, 얼마나 더 서울의 집값을 올려야 성이 차겠느냐고 묻고 싶은 정도"라고 성토했다.

# 장면4. 전세 800만원 세입자 할머니 "살면 얼마나 산다고"

전세 800만원에 살고 있는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받은 79세 박 아무개 할머니가 대문 앞에 섰다.
 전세 800만원에 살고 있는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받은 79세 박 아무개 할머니가 대문 앞에 섰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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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쫙 펴면 우산살이 길 양쪽 콘크리트 벽에 닿는 좁은 골목 비탈길. 그 길을 따라 오십보 걸으면 박아무개(79) 할머니의 나무대문 집이 나온다.

대문을 열면 좁은 마당이 있고 좌측에 화장실과 부엌이 있다. 정면과 우측 측면을 나눠 각각 두 가구가 사는 이 집에 할머니는 전세 800만원짜리 방에 홀로 산다.

쉰아홉에 남편을 잃고 아들은 분가한 지 오래지만 노동일로 처자식 돌보기도 빠듯한 상황. 할머니는 하왕십리동 주민자치센터 공공근로를 통해 매월 30만원을 번다. 그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더럭 나가라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홑 800만원으로는 정말 갈 곳이 없다. 박 할머니는 "이북서 내려와 50년째 왕십리에서 살고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임대APT도 싫고 다른 동네 가는 건 더욱 싫으니 죽기 전까지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10·21 부동산 대책' 혜택 보는 서민이 누구냐

오랜 가뭄 끝에 가을 단비가 내리던 23일 오후, 왕십리 세입자대책위 사무실 곳곳에서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왕십리 뉴타운 예정지에 살고 있는 4500세대 가운데 80%인 3800세대가 세입자. 이들은 뉴타운이 개발돼도 왕십리에 발 붙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재개발을 한다니 어디론가 떠나긴 해야 하는데, 정작 갈 곳이 없다는 게 한숨의 이유였다.

왕십리 18년, 홍익동 12년 모두 30년간 성동구 왕십리 일대에서 살았던 주부 심아무개(54)씨. 가구업을 하던 남편이 IMF 구제금융 위기 때 부도를 맞은 뒤 하왕십리 1동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7000만원짜리 전셋집에서 살고 있는데 근처의 비슷한 수준으로 이사하려면 8000만~9000만원의 빚을 져야 옮길 수 있다.

심씨는 "정부는 서민들에게 빚을 져서라도 집을 사라고 권하는 것 같은데 IMF를 겪은 우리는 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안다"며 "정부가 아무리 대출규제 푼다고 해도 어리석게 그 길을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씨의 말끝에 "그래도 아줌마는 전세잖아?"라면서 월세 산다는 하아무개(50)씨가 끼어들었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살다 2003년 왕십리로 이주했다는 하씨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60만원을 내고 살고 있는데 정말 막막하다고 했다.

하씨는 "주인이 하도 나가라고 해서 신당동·금호동·자양동·용두동 등 안 알아본 동네가 없다"며 "아파트 청소해서 한달 53만원 버는 처지에서 경기도 일대로 이사를 가면 차비와 밥값 빼면 남는 돈이 없"고 한숨을 지었다.

그는 "정부는 건설경기를 부양해서 서민 일자리를 창출하겠다지만 결국 '10·21 부동산 대책'도 대기업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그는 "서울 외곽에 살며 청소하러 도심에 들어왔다 컵라면으로 끼니 때우고 일하는 것이 과연 정부가 말하는 '서민 주거안정 대책'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근 왕십리 세입자대책위 부위원장은 "지금 5000만원에 전세 살던 사람은 1억원은 줘야 비슷한 수준의 다른 집으로 이사할 수 있다"며 "2배 이상 전·월세값이 올랐기 때문에 서민들은 계속 빚을 지고 더 열악한 곳으로 이사해야 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부위원장은 또 "왕십리 살다 무학여고 근처로 이사 간 분이 계신데 1년도 안 돼 그 지역 재개발 때문에 또 이사를 가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며 "왕십리·가재울·구로·아현·동대문 등 동시다발적으로 뉴타운을 건설해 정말 서민들이 오갈 데가 없어졌다"고 개탄했다.

그는 "정부가 발표한 '10·21 부동산 대책'으로 이익을 얻는다는 서민은 도대체 누구냐"며 "가계대출을 늘려준다지만 그것은 모두 개인이 감당해야 할 빚인데 이명박 대통령은 굳이 '서민 빚잔치'를 보겠다고 이같은 정책을 수립한 것이냐"고 질타했다.

왕십리 뉴타운 예정지는 이미 철거가 시작됐다. 빈 집의 유리창은 대부분 부숴진 상태였고, 바닥의 시멘트도 뜯어낸 집들이 많았다.
 왕십리 뉴타운 예정지는 이미 철거가 시작됐다. 빈 집의 유리창은 대부분 부숴진 상태였고, 바닥의 시멘트도 뜯어낸 집들이 많았다.
ⓒ 장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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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다리 밑에서 노숙할 판"

18년째 왕십리에 살고 있다는 정성자(60)씨는 "집 없는 사람들은 은행에서 대출도 안 해준다"며 "청계천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해야 정부가 정신을 차릴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정씨는 "한 동네에 뉴타운을 건설하면 다른 동네로 이사할 틈을 주고 순차적으로 개발해야지 한꺼번에 모두 들쑤셔놓으니 도무지 정신이 없다"며 "쥐도 벼랑 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듯이 정부가 제대로 된 주거안정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서민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다섯 살짜리 꼬마 아이를 데리고 보증금 2500만 원짜리 전세에 살고 있다는 주부 이아무개(33)씨는 "밤마다 이사 가라고 협박하는 용역들이 무서워 당장이라도 이주하고 싶지만 이 돈으로는 도저히 갈 곳이 없다"며 "철거된 빈집이 많아지면서 동네가 무서워져 요즘은 호루라기를 목에 걸고 다닐 정도"라고 말했다.

"가옥주도 뉴타운 반대... 대출 빚으로 웃돈 얹어 이사? 환영 안 한다"

왕십리뉴타운 예정지에 건설 중인 고층 아파트
 왕십리뉴타운 예정지에 건설 중인 고층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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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왕십리뉴타운 세입자대책위원장은 "서민주거안정대책을 마련한다는 정부는 임대아파트 비율을 17%로 정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마저도 짓지 않고 있다"며 "뉴타운 개발로 내가 살던 집을 허물려거든 그에 상응하는 집을 돌려주는 게 맞는 이치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 위원장은 또 "미리 집을 팔지 못한 가옥주들도 곡소리 나기는 세입자와 마찬가지"라면서 "개발분담금을 2억5000만원이나 내야 한다는데 내 집 주고 웃돈까지 얹어 이사해야 한다니 실질적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뉴타운 개발로 이익을 얻는 것은 결국 대기업 건설사와 일부 조합 간부들 뿐이며 영세 가옥주들은 세입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출을 얻어 새 집에 들어가야 하니 '뉴타운 건설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위원장은 "청계천 개발 전에는 평당 300만원 하던 왕십리가 '조망권이 좋아졌다'는 이유로 평당 2000만원씩 오른 것은 결국 투기꾼들의 장난 아니냐"며 "얼마나 더 큰 '부동산 거품'을 원하는 건지 이명박 정부에 묻고 싶다"고 한탄했다.

곧 왕십리 일대는 매머드급 아파트촌으로 거듭난다. 이 지역엔 총 10만666.39㎡에 지하 2층~지상 25층의 아파트 21개동이 들어서며 1702가구(임대 333가구)가 입주할 계획이다. 성동구청은 오는 12월 공사에 착수해 2011년 입주가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다.

거리로 내몰린 왕십리 뉴타운 세입자들은 2008년 가장 추운 겨울을 보내게 됐다.


태그:#뉴타운, #세입자, #10.21 부동산 대책, #부동산 빈곤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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