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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부터 27일까지 7박 8일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진행하는 '글로벌 비즈니스 교육프로그램- 중국연수'에 다녀왔습니다. 연수에는 30여명의 문화예술인과 문화산업업체 임직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중국 산둥성과 상하이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정에 따라 몇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기자 주>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조의 바로 그 타이산(泰山)을 오르기로 한 날이었다.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날씨가 수상했다. 나뭇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바람이 세찼다. 8시도 안 돼 버스는 일찍 호텔을 나섰다.

지난에서 묵었던 호텔 로비에도 타이산을 그린 대형 액자가 걸려 있었다.
 지난에서 묵었던 호텔 로비에도 타이산을 그린 대형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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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자신의 손등을 보이며 타이산의 위치를 설명했다. 붙여 뻗은 손가락과 손등이 산둥반도라면, 타이산은 중지의 툭 튀어나온 부분에 해당한다고 했다. 타이산의 높이는 해발 1545m. 한라산(1950m)보다 낮다. 오대산(1563m) 정도의 높이다. 그럼에도 산둥반도 대부분이 평원이거나 낮은 구릉이기에 높은 산의 대명사처럼 알려졌다.

타이산은 중국의 5대 명산 가운데서 가장 동쪽에 있다. 만물 생성의 근원인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까닭에 진시황(秦始皇) 이후 72명의 중국 황제들이 하늘에 알리고 땅에 고하는 봉선의식(封禪儀式)을 이곳에서 치렀다. 이런 까닭에 타이산은 '오악지장(五岳之長)' 또는 '오악독존(五岳獨尊)'으로 꼽히며 중국인에게는 성산(聖山)으로서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유·불·선(儒·彿·仙)의 문화유적이 자연 경관과 아름답게 어울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으로 동시에 지정되기도 했다.

타이산 입구인 다이종팡(岱宗坊)에서 정상인 위항딩(玉皇頂)까지 걸어서 오르면 대여섯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7412개의 가파른 계단을 밟고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계단을 다 밟으면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으나 일정에 쫓겨 젊어질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중톄먼(中天門)까지는 미니버스를, 또 그곳에서 정상 입구인 난톈먼(南天門)까지는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케이블카 운행 관계자와 전화통화를 한 가이드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바람이 세차 케이블카를 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원하며 버스는 계속 타이산을 향해 달렸다.

문명태산? 접근문명!

연이은 작은 산들이 마치 타이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했다.
 연이은 작은 산들이 마치 타이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듯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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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안(泰安)'이라 적힌 도로표지판이 나타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수수밭 대신 야트막한 산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타이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낮은 산들이 연이어 버스와 나란히 달렸다. 마치 타이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잠시 버스를 멈추고 모두 내렸다. 대개는 카메라를 꺼내들었고, 이희재·박재동 두 화백은 화첩을 펼쳤다. 유중하 교수(연세대 중문학)는 "타이산을 보면 '뫼 산(山)' 자가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직 '산(山)' 자를 찾을 순 없었다. 가이드는 전화로 계속 현지 케이블카 사정을 알아봤다. 희소식은 없었다.

타이산 입구 정류장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타이산 안내판을 보고 있다.
 타이산 입구 정류장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이 타이산 안내판을 보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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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넘어 타이산 아래에 도착했다. 평일 이른 시각임에도 100명 가까운 중국인 관광객들이 주차장을 서성이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했다. 일단 케이블카를 타는 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산길을 달리기 위해 미니버스 2대로 옮겨 탔다. 타이산 안으로 들어섰다. 차창 밖 타이산의 산세는 그리 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차창 밖으로 본 타이산의 산세는 그리 험해 보이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본 타이산의 산세는 그리 험해 보이지 않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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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분 정도 걸려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했다. 기념품 가게와 식당이 있었다. 모자, 수건, 새총, 목검, 엽서, 염주 등 기념품들은 그저 그랬다. 타이산 성모(聖母)인 벽하원군(碧霞元君)을 그려 넣은 장신구도 보였다. 태산석감당(泰山石敢當)이란 글귀를 새긴 돌멩이도 있었다. '석감당'이란 타이산에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로 부정한 기운을 물리치고 평안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타이산의 케이블카 타는 곳의 표지판(위)과 화장실에 적혀 있던 표어. 문명태산? 뭔가 어색했다.
 타이산의 케이블카 타는 곳의 표지판(위)과 화장실에 적혀 있던 표어. 문명태산? 뭔가 어색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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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을 오르는 계단 초입. 7412개의 가파른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타이산을 오르는 계단 초입. 7412개의 가파른 계단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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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文明泰山 做文明游客(문명 타이산을 세우고 문명 여행객이 되자)'는 큼지막한 표지판이 어색했다. 중국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단어가 '문명(文明)'이었다. 도시마다 '창건문명성시(創建文明成市)'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도로 곁에는 '문명차행(文明車行)'이란 배너가 달려 있었다. 심지어 타이산 정류장의 남자 소변기 위에는 '접근문명(接近文明)'이라고 적혀 있기까지 했다. 인류 4대 문명의 하나를 일궈냈던 중국인들의 문명에 대한 강박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30분 정도 기다렸지만 케이블카는 결국 운행하지 않았다. 타이산을 오르는 계단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사진 몇 장을 찍고는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타이산을 오르는 길에는 이런저런 사연과 감회를 새겨놓은 암각(岩刻)과 비석이 즐비하다고 했다. 특히 정상 부근에는 '과연(果然)'이라고 적힌 바위가 있다고 했다. 언젠가 나도 타이산을 오른 뒤 '과연'이라고 외쳐볼 기회가 있을까.

톈황뎬 앞에 매달려 있는 보통사람들의 소망

타이산 부근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타이산을 못 오른 대신 다이먀오(岱廟)를 찾았다. 다이먀오의 '대(岱)' 자는 고유명사로 타이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이먀오란 '타이산의 사당'이란 뜻이다. 성산으로서 타이산의 위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타이산을 몇 번 오른 적이 있는 전홍철 교수(우석대)는 "황제도 타이산을 오를 때는 먼저 다이먀오에 들린 뒤 타이산을 올랐다"고 했다.

다이먀오의 입구. 다이먀오는 돌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다이먀오의 입구. 다이먀오는 돌로 된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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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 아래 도시인 타이안(泰安)에 있는 다이먀오는 굳건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타이안'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준말이라고 했다. 정양먼(正陽門)을 통해 다이먀오로 들어섰다. 한무제(韓武帝)가 심었다는 측백나무가 2천여 년의 풍상을 견디고 우람스레 서 있다. 다이먀오 안에는 측백나무가 많았다. 어떤 나무는 줄기가 회오리처럼 뻗쳐 올라가 있고, 껍질은 빗살무늬였다.

회오리바람처럼 뒤틀린 다이먀오 내의 측백나무
 회오리바람처럼 뒤틀린 다이먀오 내의 측백나무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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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물에서는 타이산과 일본 후지산의 4계절 풍광을 비교하는 사진전을 열고 있었다. 우리의 설악산이나 금강산도 두 산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타이산 정상에 있는 도교 사찰인 '삐샤츠(碧霞祀)'를 비롯해 운무에 쌓여 있는 타이산의 비경을 사진으로 만나니 산을 못 오른 아쉬움이 더 커졌다.

다이먀오의 톈황뎬. 중국 3대 고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다이먀오의 톈황뎬. 중국 3대 고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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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좀 더 들어가자 드디어 톈황뎬(天貺殿)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톈황뎬은 쯔진청(紫禁城)의 타이허덴(太和殿), 공먀오(孔廟)의 따청뎬(大成殿)과 함께 중국 고대 3대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전각이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또 중국 건축물이 그렇듯이 다소 위압적이었다. 붉은 색 현판에는 '송천황전(宋天貺殿)'이라 씌어 있어 송나라 때 세워진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톈황뎬 앞의 향로. 향초와 함께 소망을 걸어잠근 결연쇠가 달려 있다.
 톈황뎬 앞의 향로. 향초와 함께 소망을 걸어잠근 결연쇠가 달려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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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황뎬 앞에는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초가 타오르고, 또 그 옆에는 자물쇠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자물쇠는 '결연쇠'라고 했다. 사당에 모신 신과 결연을 맺음으로써 자신의 기원이 반드시 이뤄지도록 자물쇠를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결연쇠 대부분은 비를 맞아 녹이 슬어 있었지만 그것을 채울 당시의 간절함만은 비바람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동악태산지산(東嶽泰山之神)이 모셔져 있는 톈황뎬 안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1위안을 내고 신발을 감싸는 비닐을 빌렸다. 타이산을 오르는 황제의 행차 장면이 3면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가로 62m, 세로 3.3m의 거대한 벽화였다. 문무백관을 거느린 황제의 가마는 병사와 함께 코끼리, 사자, 낙타 등 동물들의 호위도 받고 있었다. 설마 사자와 코끼리를 앞세워 산을 오르진 않았겠지?

'一葉障目 不見泰山'

톈황뎬을 뒤로 돌아 다이먀오의 후문 격인 후짜이먼(后宰門)에 올랐다. 바로 아래로는 타이안 시내의 깨끗한 거리가, 그리고 타이안으로 오르는 길과 함께 멀리 타이산이 보였다. 이곳에서 황제도 타이산을 오르기 전 타이산을 바라보았으리라. 그렇게 한참을 타이산을 바라보며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다이먀오 후짜이먼에서 바라본 타이산. 아래 타이안시 거리는 깨끗했다.
 다이먀오 후짜이먼에서 바라본 타이산. 아래 타이안시 거리는 깨끗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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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성(詩聖) 두보(杜甫)는 타이산을 바라보며 '망악(望嶽)'이란 시를 지었다. 2006년 4월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부시 대통령이 주최한 오찬에서 그 끝 부분을 읊었다고 한다. '반드시 정상에 올라 뭇 산들의 작음을 한 번에 내려다보리라(會當凌絶頂 一覽衆山小).' 세계 정상에 우뚝 서고자 하는 중국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고 했던 공자(孔子)도 타이산을 찾고는 했다. 타이산 입구부터 정상까지 공자와 관련 많은 유적들이 있고, 정상 부근엔 공자의 사당(文廟)도 있다. 공자는 '타이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登泰山而小天下)'고 했다. 자신의 사상과 포부를 펼쳐 보이고 싶었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천하에 대한 원망이 담긴 소회는 아니었을까.

'공자는 성인 중의 타이산이고 타이산은 산 중의 공자(孔子聖中泰山 泰山山中孔子)'라고 한다. '성인 중의 타이산'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로 떠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취푸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전홍철 교수는 타이산과 관련한 중국 속담 하나를 들려줬다. '하나의 잎사귀가 눈앞을 가려 타이산을 보지 못한다(一葉障目 不見泰山)'. 작은 일에 신경 쓰느라 큰 것을 놓치는 경우를 일컫는 얘기겠다. 비록 타이산을 눈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 구절을 가슴에 담았다.

취푸에선 소매치기 조심!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는 취푸의 남동쪽에 있는 창핑샹 조우이(昌平鄕 鄒邑)에서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의 나이는 일흔이었고, 그의 셋째부인이었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는 16살밖에 안됐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그들이 '야합(野合)'해서 공자를 낳았다(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고 기록했다. '야합'이란 표현에 대해선 해설이 구구하지만, 어쨌든 그의 탄생이 평범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공자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를 따라 취푸로 왔다. 어머니의 친정이었던 취푸는 당시 노(魯)나라의 수도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말처럼(吾少也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내며 자랐다. 어머니도 공자의 나이 17살 때 그의 곁을 떠났다.

공자의 고향 취푸 거리. 한때 노나라의 수도였지만 지금 작은 도시였다.
 공자의 고향 취푸 거리. 한때 노나라의 수도였지만 지금 작은 도시였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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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는 성곽 등 옛 도읍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고층건물도 없는 작은 도시였다. 거리는 깨끗하고, 다소 한산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예(禮)를 중시한 공자의 고향에서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린다고? 허긴 공자의 시대에도 도척(盜跖)이 있었으니. 등 뒤로 맸던 배낭을 옆으로 고쳐 맸다.

'인민의 적'에서 '만세사표'로...중국정부의 의도는?

먼저 공자 사당인 공먀오(孔廟)를 찾았다.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공푸(孔府), 공자와 그 제자와 후손들의 무덤이 있는 공린(孔林)과 함께 산공(三孔)으로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곳이다. 입구에는 국가가 지정한 AAAAA 등급의 여행지란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 가이드 말처럼 그곳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공먀오 입구. 진셩위전(金聲玉振)을 시작으로 9개의 문을 지나야 따청뎬(大成殿)에 이를 수 있다.
 공먀오 입구. 진셩위전(金聲玉振)을 시작으로 9개의 문을 지나야 따청뎬(大成殿)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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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먀오는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세상을 떠난 2년 뒤(BC 478년) 공자의 의관을 안치해놓고 제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금의 공먀오는 명·청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으로 황궁에 버금가는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공먀오로 들어가는 첫 문은 돌로 돼 있었다. 그 위에는 '진셩위전(金聲玉振)'이라 적혀 있다. 맹자(孟子)가 공자의 사상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존경받는다는 의미로 한 말이라고 한다. 이어 링싱먼(欞星門), 성시먼(聖時門), 홍다오먼(弘道門) 등을 계속 지나는데 목조 건물이 중앙의 길을 막고 서 있다.

공먀오의 도서관 격인 '쿠이원꺼(奎文閣)'다. 황제가 하사한 책들을 보관하기 위해 북송 때 건축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공자의 행적을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고, 또 <논어> 등 공자 관련 책자를 판매하고 있었다. 앞마당에선 취부사범대 여학생들이 모여 공자의 생일인 9월 28일을 전후해 보름간 열리는 '공자문화제'를 연습하고 있었다.

공먀오에서 공자문화제를 연습하고 있는 취푸사범대생들.
 공먀오에서 공자문화제를 연습하고 있는 취푸사범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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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 당시 공자는 봉건사상의 근원으로 '인민의 적'이었다. 당시 취푸에서 열린 토공대회(討孔大會)에 10만 명이 참여했다. 말 그대로 공자를 규탄하는 대회에 지금 취푸 인구만큼의 숫자가 모인 셈이다. 또 그 무렵 베이징사범대의 홍위병 200명이 취푸로 몰려와 석비와 고분, 그리고 쿠이원꺼에 있던 고서적 등 모두 6618건의 유물을 파괴했다. 심지어 공자의 무덤까지 파헤쳐졌다고 한다.

공먀오의 도서관이었던 쿠이원꺼 안에선 공자 관련 서적을 팔고 있었다.
 공먀오의 도서관이었던 쿠이원꺼 안에선 공자 관련 서적을 팔고 있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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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듯 타도의 대상이던 공자와 그의 사상이 지금 중국에서 '만세사표(萬世師表)'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서울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공자학교'를 세우고 공맹의 유가 전통을 강조하고 있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장이머우도 중국의 4대 발명품과 함께 공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내부적으론 개혁·개방 이후 빈부격차에 따른 사회불안을 봉합하고, 대외적으로는 문화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

1984년 공자 후손들의 '공자 고향 순례'로 시작한 공자문화제도 그렇다. 1989년부터는 국가관광국과 산둥성 인민정부가 '국제공자문화제'로 이름을 바꿔 계속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당시 문화혁명 과정에서 각종 자료들이 소실되는 바람에 제례 방식을 오히려 한국의 성균관대에서 배워왔다고 한다. 공자 제사는 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된다.

유중하 교수(연세대 중문학)는 "중국은 큰 나라를 대국(大國), 강국(强國), 다국(多國)으로 분류하는데, 이때 강국은 미국이고 다국은 인도"라면서 "문화와 물류가 결합한 21세기 문류(文流)의 시대를 맞아 중국이 가려고 하는 길은 문화대국이고 그 원천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고전"이라고 설명했다. 동북공정을 뛰어넘는 중국의 원대한 구상이 무서웠다.

루삐(魯壁), 그리고 황제의 비석들

청의 건륭제가 기대었다는 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다.
 청의 건륭제가 기대었다는 나무가 비스듬히 서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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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세웠다는 비석. 다른 비석과 달리 거북이 입을 벌리고 있다.
 강희제가 세웠다는 비석. 다른 비석과 달리 거북이 입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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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먀오 경내에는 17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쿠이원꺼 뒤편으로 돌아 나오자 두 그루의 나무가 V자 모양으로 비스듬히 서 있다. 앞의 나무는 공먀오를 찾은 청의 건륭제(乾隆帝)가 기대었던 나무라고 한다. 황제의 무게를 못 이긴 나무가 기울어지고, 또 황제의 상징인 용의 비늘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 뒤의 나무는 자웅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기울게 심었다. 철망을 둘렀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만져보고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또한 공먀오에는 공자를 기리는 1300여 개의 비석이 있다. 그 가운데 13개는 황제들이 세운 비석이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청의 강희제(康熙帝)가 세웠다는 비석으로 무려 무게가 65톤이나 된다. 비석은 용왕의 아들이라는 거북 모양의 동물이 받치고 있는데, 다른 비석과는 달리 이 비석의 거북은 비석이 너무 무거워 입을 벌리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는 이 비석을 베이징의 시산(西山)에서 600명의 인부와 500마리의 소가 동원되어 운반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의 고통은 단지 입만 벌이는 데서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공먀오의 따청뎬(大成殿). 역시 중국 3대 고건축물의 하나다.
 공먀오의 따청뎬(大成殿). 역시 중국 3대 고건축물의 하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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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청먼(大成門)을 지나자 따청뎬(大成殿)이 화려한 위용을 뽐냈다. 앞서 얘기했듯이 중국 3대 고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청나라 때 개축했는데, 3만 명의 목수가 동원돼 6년 동안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에는 공자 상이, 좌우로 그의 제자인 안회(顔回)와 자사(子思), 증삼(曾參)과 맹자 상이 있다. 따청뎬 현판 아래엔 '생민유미(生民未有)'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로 공자와 같은 이가 없었다(自有生民而來 未有孔子也)'는 맹자의 말에서 따왔다.

따청뎬의 석기둥들.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양을 새겨 놓았다.
 따청뎬의 석기둥들.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양을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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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서적들을 숨겼다는 벽. 그 앞에 '루삐(魯壁)'라 적힌 비석을 세워 놓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서적들을 숨겼다는 벽. 그 앞에 '루삐(魯壁)'라 적힌 비석을 세워 놓았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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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따청뎬의 앞과 옆에 세워져 있는 28개의 석조 기둥이 볼 만 했다. 승천하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었다.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황제와 같은 대접을 받았던 공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정작 황제가 이곳에 와 제사를 올릴 때는 이 기둥을 빨간색 천으로 싸서 황제의 눈에 안 띄게 했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황제도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갔다.

그 옆문으로 빠져나와 조금 더 걷자 붉은 담 앞에 '루삐(魯壁)'라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공자와 유림의 책들을 감춰뒀던 곳이다. 당시 공자의 후손이 이중벽을 세워 그 안에 책들을 숨기고 틈새를 막았는데, 한나라 노공왕(魯恭王)이 확장 공사를 하던 과정에서 벽속에서 책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한때 금서를 몰래 읽어야만 했던 경험이 있는 나에겐 그 소박한 석비가 황제들의 그 어떤 웅장한 비석보다 더 울림이 컸다.

"취푸에선 다 공씨라고 해요"

공푸의 입구 양 옆 기둥에 씌어있는 대련. 부(富)자와 장(章)자의 생김이 특이하다.
 공푸의 입구 양 옆 기둥에 씌어있는 대련. 부(富)자와 장(章)자의 생김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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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푸(孔府)는 공먀오 바로 곁에 있었다. 공푸는 공자 후손들이 살던 저택이자 송사를 담당하던 관아였다. 송나라 인종(仁宗) 때 건축됐다. 무려 16만㎡에 463개의 방과 후원이 있었다고 한다. 공자의 77대손이 공산혁명 과정에서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타이완으로 도피한 이후 현재는 관광지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중국정부에서는 공자 후손들이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후손들은 공푸를 돌려달라며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공푸 입구의 현판은 '청푸(聖府)'라 적혀 있었다. 부(府)는 왕의 저택에 붙이는 칭호라고 한다. 왕족과 같은 대접을 받았던 '천하제일가문'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택호였다. 입구 양 옆 기둥에는 대련(對聯)이 써 있는데, 특이하게도 '부(富)'자의 윗부분이 민갓머리(冖)로 삐침이 없고, '장(章)'자 밑의 십(十)자가 위로 뚫고 올라가 있다. 부가 끊임없이 넘쳐나고 문장이 막힘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렇게 썼다고 한다. '장(章)'자는 몰라도 '부(富)'자는 공자 후손에게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

충꽝먼(重光門)은 황제가 왔을 때에만 열린다.
 충꽝먼(重光門)은 황제가 왔을 때에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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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과 감언이설을 경계하라는 공자의 뜻이 담긴 태호석
 뇌물과 감언이설을 경계하라는 공자의 뜻이 담긴 태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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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푸를 들어서자 굳게 닫힌 검은 대문이 앞을 가로 막았다. 충꽝먼(重光門)이었다. 황제가 왔을 때만 여는 문이라고 했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덩샤오핑(鄧小平)은 내가 황제냐며 옆으로 돌아갔으나 김일성 전 주석은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중국 내 조선족들의 두 권력자에 대한 태도를 살짝 엿본 듯싶었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구멍이 숭숭 뚫린 기괴한 모양의 화강암 덩어리인 태호석(太湖石)이 마당 가운데 떡 하니 놓여 있다. 단지 관상용으로 갖다놓은 돌이 아니다. 뇌물과 감언이설을 경계하라는 공자의 뜻이 담긴 돌이라고 한다. 내택으로 들어섰을 때 또 다른 경계의 상징을 만날 수 있었다.

용 머리에 기린 몸통을 한 희한한 동물을 그린 벽화가 나타났다. 상상의 동물로 이름은 '탐'이라고 했다. 공자는 탐에 대해 이런 우화를 이야기했다. "태곳적에 탐이란 동물이 살았는데, 탐은 욕심이 많아 아무리 많이 먹어도 만족할 줄 몰랐다. 결국 그 탐욕 때문에 태양까지 삼키려다가 몸이 터져 죽어버렸다. 그 몸이 터진 곳에서 우주가 만들어졌는데, 우주란 곳엔 아무것도 없고 무(無)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공푸 내택 벽에 그려져 있는 탐 그림. 탐욕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공푸 내택 벽에 그려져 있는 탐 그림. 탐욕을 경계하라는 뜻이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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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푸에 탐의 벽화가 있는 건 그림을 보면서 탐욕을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공자의 적장손인 연성공(衍聖公)은 바깥으로 나갈 때 이 벽화 앞에서 큰소리로 '노인장, 지나치게 탐했구나!'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탐욕을 경계했다고 한다. 정문의 부(富) 자와 내택의 탐 벽화, 공자 후손의 진심은 어디에 있는지 헷갈렸다.

공푸 뒤편의 후원을 돌아 나오며 가이드에게 물었다. "취푸에 직계는 아니더라도 공자 후손들이 많이 사나요?" 가이드의 답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다 공씨라고 해요." 공푸를 나오자 거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들도 공씨일까.

공푸 뒤편에서 만난 취푸 주민. 저들도 공씨일까?
 공푸 뒤편에서 만난 취푸 주민. 저들도 공씨일까?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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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애틋한 딸 사랑

공린(孔林)은 가지 못하고 중국연수에 대한 간단한 중간평가 자리를 가졌다. 유중하 교수가 공푸에서 사온 엿을 돌렸다. '육대함이당(六代含飴糖)'이란 이름으로 공자 가문에서 대대로 만들어 먹어온 엿이었다. 잘게 조각내 고물을 묻힌 엿으로 부드럽고 달콤했다.

공푸에서 유중하 교수가 공자 가문의 엿인 '육대함이당(六代含飴糖)'을 사고 있다.
 공푸에서 유중하 교수가 공자 가문의 엿인 '육대함이당(六代含飴糖)'을 사고 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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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건륭제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공주를 공자 후손에게 시집보냈다. 그는 만족(滿族)이었던 자신의 딸을 한족(漢族)인 공자 집안에 시집보내기 위해 한족이었던 우(禹)씨 가문에 입양시키기까지 했다. 그때 딸을 시집보내며 싸줬던 엿이 '육대함이당'이었다. 6대 동안 엿을 입에 문 것처럼 달콤하게 지내라는 뜻이었다. 황제 이전에 한 아버지로서 애틋한 사랑이 담겨 있는 음식이었다.

건륭제는 또한 404개의 은식기도 혼수로 보냈다. 이른바 만한췐시(滿漢全席)를 차려낼 수 있는 식기였다. 그는 공자 제사를 핑계 삼아(?) 딸을 보기 위해 9번이나 취푸에 들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만한췐시가 은식기로 차려졌다. 지금까지 만한췐시의 식기가 온전히 보관돼 있는 곳은 공자 가문뿐이라고 한다.

만한췐시를 맛보다

저녁에 중국 황실의 대표적인 연회음식인 만한췐시를 맛볼 기회를 가졌다. 만한췐시는 글자 그대로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두루 갖춘 연회음식을 뜻한다. 강희제가 회갑을 맞아 전국 65세 이상 노인 2800명을 궁궐로 초청해 열었던 천수연(千壽宴)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만한췐시는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다.

만한췐시에 오르는 요리는 보통 108가지로, 하루에 두 번씩 사흘에 걸쳐 먹었다고 한다. 곰 발바닥, 원숭이 골, 낙타 혹, 표범 태반, 코뿔소 꼬리, 제비집 등등 온갖 진귀한 재료로 만든 요리들이 상위에 올랐다. 지금도 중국에는 만한췐시를 그대로 재현하는 상차림이 있다는데, 그 가격이 약 5500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만한췐시 가운데 공작영빈(孔雀迎賓). 관상용이다.
 만한췐시 가운데 공작영빈(孔雀迎賓). 관상용이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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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일행이 맛본 만한췐시는 약식이었다. 주요리 20여 가지, 건과류와 전채를 포함하면 40여 가지의 요리가 차려졌다. 각자 자리 앞에 놓여 있는 수건 모양부터 동물의 생김새를 닮게 접어놓았다. 가장 먼저 '공작이 손님을 맞다(孔雀迎賓)'는 요리가 원탁 가운데 놓였다. 무로 공작새를 정교하게 조각했는데, 식용이 아니라 관상용이라고 했다.

이후 주요리가 차례차례 나왔는데, 맛은 차치하고 일단 보기에 즐거웠고 음식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특히 취푸의 만한췐시인 까닭에 공자의 일화와 관련된 요리들이 기억에 남았다.

만한췐시 가운데 위편삼절(??三?). 공자가 <주역>을 너무 읽어 죽간을 매었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던 고사를 요리로 만들었다.
 만한췐시 가운데 위편삼절(??三?). 공자가 <주역>을 너무 읽어 죽간을 매었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던 고사를 요리로 만들었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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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만 살펴보면, 먼저 위편삼절(韦编三绝). 공자가 나이 쉰이 넘어 <주역(周易)>에 너무 읽어 그 죽간을 매었던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를 따온 요리였다. 대나무를 잘라 그 홈 위에 새우, 전복, 물고기, 게살 등을 반죽한 음식을 담았다.

그리고 문룡관수(文龍觀水). 문룡은 공자를 뜻한다. 공자가 물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려낸 요리로 <논어>에 나오는 '지자요수 인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자 가문의 요리사가 만들었다는 오리 요리는 신선압자(神仙鸭子)라는 이름이었다. 향 한 대를 피워 그 향이 다 타면 요리가 완성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날아다는 것 가운데는 비행기만 빼고, 네 다리 달린 것 가운데 탁자만 빼고 모두 요리로 만들어 먹는다는 중국인다운 식탁이었다. 음식을 눈앞에 두니 낮에 공푸에서 깨우쳤던 '탐'의 경계는 공허할 뿐이었다. 배는 불러왔지만 계속 먹었다. 그래서 난 성인이 되지 못하나 보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숙소인 취에리빈셔(闕里賓舍) 현관 위에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라는 공자의 말씀이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다음날 아침 찍은 사진이다.
 숙소인 취에리빈셔(闕里賓舍) 현관 위에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라는 공자의 말씀이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다음날 아침 찍은 사진이다.
ⓒ 천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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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어두워 호텔에 들었다. 호텔 이름은 취에리빈셔(闕里賓舍)였다. 공먀오와 이웃하고 있는 호텔로 '취에리'는 공자가 살던 마을 이름이다. 호텔 현관 위에는 <논어>의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란 문구를 새긴 목각 편액이 걸려 있어 우리를 반겼다.

호텔 방 탁자 위에 놓인 책자에는 종업원 복무지침과 함께 '고객이 아셔야 할 점'이 한글로 써 있었다. 그 가운데 7항의 한 대목이 웃음을 자아냈다. '중국 정부 규칙대로… 호텔에서 오입질, 마약 매매, 노름하는 것, 투기 매매를 하는 것은 법을 어기는 행동이라서 금합니다.' 공자의 꾸짖음이나 중국정부의 지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일의 바쁜 일정을 위해 바로 잠을 청했다. 중국연수 넷째 날이었다.


태그:#중국연수, #타이산, #공자, #취푸, #만한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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