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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트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 <시월> 전문. 이문재

1. 2002년에 저는 대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2학기 전공수업을 듣던 10월의 어느 날, 교수님께서 수업 중간에 한 편의 시를 읽어주셨지요. '가을을 맞아 이 시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거야'라는 말씀과 함께.

2. 그 시가 <시월>입니다. 이문재의 <시월>입니다. 저는 '그 이문재인가?' 했답니다. 당시 저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에 실리고 있던 '이문재의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고 있었거든요. 그의 기사는 여느 인터뷰와 달랐습니다.

6년이 지난 지금, 문장 하나하나를 그대로 복기할 순 없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글에선 보통의 기사문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빼어난 기자'로만 알고 있던 저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시월>의 이문재는 <시사저널>의 이문재였다는 것을. 기형도가 그랬듯이, 그는 기자이며 또한 시인이었습니다.  

3. 제게 이 시를 알려주신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시월>은 가을에 읽기 좋은 시입니다. 가을, 은행나무의 잎들이 떨어지는 걸 보고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노래하지요. 가을의 풍경이 시인 내면의 풍경과 이토록 아름답게 결합한 시를, 저는 이후에 보지 못했습니다.

4. 시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리듬감이겠지요.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라는 구절과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같은 행을 읽을 때, 운율적 재미도 느낄 수 있겠지요.  

5.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식을 뒤집는 시인의 혜안을 파악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어요. '가볍고 느린 추락'이라니. '추락'이라는 단어 혹은 상식은, '가볍고 느린'이란 수식어와 연결되어, 결국 우리는 은행잎을 통해 모든 추락하는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 그러나 제가 읽을 때마다 전율하는 문장은, 이 시의 첫 행입니다.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라니요. 때론 비열하고, 때론 비속하고, 그래서 결국 안쓰러운 나 자신을 버리고 깨끗해지려면, 나는 정녕 나를 태워야 하는 것일까요. 노랗게 물들어서, 아니 노랗게 타올라서 결국 떨어지는, 저 은행잎처럼.

7. 노랗게 타오르기 전, 지금의 제 모습은, 시인의 눈에 아마도 '푸르게' 비춰질 터입니다. 시인은 노래하지요.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이라고. 우리가 청춘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모든 푸른 것들에게 기쁨만 느낄 때, 그는 '시린 속'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8. 타올라서, 노란 타오름의 정점에서, 은행잎들은 떨어집니다. 가볍게 추락하지만, 그 추락하기까지 그들이 타오른 과정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절대 가벼운 추락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시인은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이라고 말하는 것인가요. 김훈의 단편 <화장>이 생각납니다. 죽음을 앞둔 아내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그는 남몰래, 회사의 여직원을 마음속으로 사모하지요. 치열한 내면의 싸움이 끝난 후에 그는 가벼워지지만, 그 가벼움에는 한없는 무거움이 내포되어 있을 터입니다. 

9. 그래서, <시월>의 마지막 행,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을 읽고 난 후에는, 제 옆의 공기가 달라져 보이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아직 충분히 아파하지 않은 저는, 언제쯤이면 더할 기쁨도 덜할 슬픔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요.

언제쯤이면 저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을 수 있을는지요. 그 때가 혹시 죽음 앞에 섰을 때인가요. 그는, 중력은, 절 언제 떨어트릴까요. 그 추락 앞에 저는 담담할 수 있을까요. 읽을 때마다 무수한 질문 속에 쌓이지만, 그래도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10. 시월이기 때문입니다. 2002년 시월, 이 시를 알게 된 이후 벌써 여섯 번의 시월이 지나갔군요. 그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이 시를 읽었지요. 어떨 땐 위로하고, 어떨 땐 두렵게 하지요. 그래서 결국, 저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 돌아봄은 저 혼자로 그치지 않아, 다른 모든 아파하는 것들에게까지, 시선이 뻗치게 만들지요. 이 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랍니다. 시간이 또 지나, 다시 시월이 왔네요. 그래서 오늘도 <시월>을 읽습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가을 노래' 응모



태그:#시월, #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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