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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국, 나윤숙을 경멸하다

나윤숙은 이강국을 남산의 숲길로 불러냈다. 두 사람은 약수터 옆의 벤치에 앉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름 모를 새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바쁘셨던가 보죠?"
"박헌영 선생과 일을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은 조금도 안 하셨나 봐요."
"그럴 리가 있겠소?"

이번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이런 데로 오시라고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나도 이런 데가 좋습니다."
마침 고운 새 소리가 들려왔다. 나윤숙은 고개를 들어 새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저런 새 소리가 좋아서 여길 오자고 했군요?"
"네. 저는 유달리 새 소리를 좋아합니다."

이강국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았다.
"선생님, 렌이란 새를 아세요?"
이강국은 시계를 주머니에 넣었다.

"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게 우는 새라고 해요. 아프리카 밀림 지대의 높은 나뭇가지 끝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짝을 부르며 우는 새랍니다."
이강국은 나윤숙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윤숙 씨 너무 개인감정에 함몰되어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 이를테면 나라 잃은 우리 백성들을 생각해 보세요."
"물론 그래야지요. 그런데 선생님은 독일에 다녀오시더니 좀 각박해지신 것 같군요?"
"각박해진 게 아니라 이제 철이 좀 드는 겁니다. 사실 저는 박헌영 선생을 뵙고 놀랐습니다."

"선생님을 놀라게 할 정도로 그 분이 훌륭하신가요?"
"그렇소. 그는 레닌대학에서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 과정을 마친 분이오. 그런데 우수한 성적과 성실한 자세 때문에 높이 평가를 받으면서도 내내 한 가지 결핍을 지적 받았다고 합니다."

나윤숙은 이강국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관념적이라서 현장 실천력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소. 그런데 그 분에 비하면 나는 더 관념적이면서 실천 경험도 부족하지요."
"그렇게 세계 최고의 학벌을 갖추신 분들이 꼭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뒤섞여야 한다는 논리를 저는 수긍하기가 어렵군요."

"나윤숙 씨, 나하고 논쟁하려고 들지 마세요."
이강국의 말씨가 차가워졌다.
"나윤숙 씨 글을 읽었어요."

나윤숙은 자기 글을 읽었다는 이강국의 말이 반가웠다.
"어머, 부족한 글을 읽으셨군요?"
"<매일신보>에 실린 '창조적인 생활'을 읽었습니다. 갈수록 실망이 커지고 있습니다."
"실망이라고요?"

"그대로 가다가는 민족을 배반하기가 십상입니다. 다 그런 식으로 출발했다가 친일파가 되는 겁니다. 춘원이라는 자식, 그 놈은 완전히 미쳐버렸더군요."
이강국의 말은 나윤숙의 가슴에 비수처럼 선뜩하게 꽂히고 있었다.

이강국은 얼마 후 나윤숙이 조선교화단체의 간부가 되었고, 이어서 조선 임전보국단 간사가 되어 김활란 등과 어울려 다닌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부의 눈에 비친 두 여자

성공회는 지금이나 예나 덕수궁 옆에 있다. 한국의 고궁 주변은 그 돌담만으로도 차분하고 유서 깊어 보인다. 임성관 신부는 성당 정원의 은행나무와 오동나무 너머로 보이는 하얀 부민관 건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미화하는 강연이 연일 열리고 있는 부민관 건물이 언젠가 오욕의 현장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자 넓은 오동잎이 나붓거리며 떨어졌다. 이미 정원의 흙은 떨어진 노란 은행들로 모두 덮여 있었다. 나윤숙과 김수임이 현관에서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나윤숙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신부는 스카프가 나윤숙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윤숙 같은 여성이 스카프를 귀 옆으로 두르면 얼굴만 더 크게 보이는 법이었다.

신부는 미사 때마다 스카프 비슷한 것을 두른 여자들을 수도 없이 보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미사 복장이기도 했다. 스카프는 차라리 김수임이 두른다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를 하며 말을 붙인 것은 나윤숙이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낙엽을 보고 계신 신부님이 멋져 보여요."

김수임은 말없이 목례하더니 그윽히 신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신부는 인사를 받고 나서 손바닥을 펴 대문 쪽으로 향하게 했다. 더 이상 볼 일이 없으니 어서 가 보라는 제스처였다. 두 여자는 아마 영화관 같은 데라도 가는 것 같았지만 신부는 묻지 않았다.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두 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신부는 묘한 상념에 젖어 들었다. 먼저 신부는 나윤숙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시인으로 이름을 얻고 있었고, 이제 처녀로는 과년한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만날 때마다 신부의 외모에 대해 한마디 하는 버릇이 있었다.

방금처럼 멋져 보인다느니, 아니면 경건해 보인다느니, 또는 우수에 젖어 계신 것 같다느니, 심지어는 턱수염이 강렬해 보인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신부는 남녀를 바꿔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떤 여자를 대할 때마다 그 여자의 용모를 말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는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일까?

다음으로 신부는 김수임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신부를 만날 때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적이 거의 없었다. 왠지 경계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니면 이유 없이 새첩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그녀는 모든 남성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쩌면 신부에게까지 남성을 의식하는 건지도 몰랐다.

쓸데없이 이성의 외모를 언급하는 나윤숙도 문제지만 김수임도 그에 못지않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신부는 생각했다. 젊은 여성이 타인의 눈을 그윽한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신부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신부 짓을 오래 하다 보니 사람 보는 눈만 생겼다고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신부는 김수임을 볼 때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내려앉을 때가 있었다. 그녀가 미구에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가지고 자기에게 고해하러 오지 않겠는가 하는 은밀하고도 불안한 예감이 신부에게는 있었다.

나윤숙과 김수임은 성공회 기숙사에서 한 방을 쓰고 있었다. 나윤숙은 배화여고 영어 교사를 하면서 폭 넒은 문인 교제를 하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문인들은 주로 해외 문학을 전공한 남성들이었다. 해외문학파의 영향으로 그녀는 연극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김수임은 세브란스 병원에 취직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김수임은 시를 쓰면서 학벌 좋은 문인들과 교유하는 나윤숙이 부러울 때가 더러 있었다.

"나는 음악이나 무용이 하고 싶었는데 환자들만 보는 병원 일이 마뜩찮을 때가 있어."

김수임이 세브란스에 취직한 것은 그녀를 맡아 공부시킨 미스 케럴 덕분이었다. 그것도 영문과를 나오고 외국인과 한 집에서 살아 영어 회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수임에게는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나윤숙의 세속적 출세를 오로지 그녀의 문학적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나윤숙에게는 장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삶의 자세가 있었다. 그녀는 근대 사회에서 실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하는 포용력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실속을 차리는 대인 교제 능력도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이강국, #부민관, #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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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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