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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이래 최초의 동양인 승리?

극동의 일본이 서양의 대국 러시아를 물리친 것은 세계인에게는 충격을, 일본인에게는 전율을 세례했다. 일본인들은 세계 역사상 징기스칸 이래 처음 거둔 동양인의 승리라고 목청을 높였다. 반면 서구인들은 일찍이 일본을 경계한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이른바 '황화(黃禍)론'을 현실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1901~1909 재임)도 황화론의 확산을 우려했다. 때마침 캘리포니아를 필두로 배일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를 격퇴함으로써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은 국제정치의 무대에 유력한 실세로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의 영토와 세력권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것은 그들이 메이지 유신 이래 목표로 삼았던 유럽식 제국 건설의 토대가 잡힌 것이라고도 할 수도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일본을 견제해야 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만주는 각국의 이해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일본이 파죽지세로 쳐들어가자, 그동안 야합했던 미국과 일본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만주 철도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미국은 더 이상 일본을 우호국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에 맞서 일본 역시 미국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 결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두 나라가 상호 불신하는 경쟁 관계가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해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큰 실익이 없는 대일본 전쟁을 보류 내지는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패전국으로서의 의무를 모두 이행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승국으로의 권리를 전부 얻으려 했다. 일본인들은 전승 사실에 고무된 나머지 전투에서 이겼을 뿐이지, 러시아 본토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통해 많은 이권을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조선을 독점했으며 남사할린을 할양 받았다. 그리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을 확보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소득이었다. 그나마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도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중재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포츠머스 협상의 결과가 그것이었다.

도쿄대 법학부의 <7인의 교수회>

그러나 전승에 도취된 일본 정부는 전후의 실상을 국민에게 이성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이 서양 대국과 싸워 이겼다는 사실만  유독 부각되었다. 그것은 일본 저널리즘과 지식인들의 맹목적 선동 때문이었다.

1905년 9월 1일 자 일본의 신문들은 일제히 자극적인 타이틀로 기사를 내보냈다.

- 굴욕적인 조약 체결
- 전 각료와 원로에게 책임을 묻는다.
- 국민들은 비분강개, "좌시하지 않겠다."

도쿄대학에서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우파 교수들이 모여 <7인의 교수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회합하면서, 최소한도의 대러 강화 조건으로 30억 엔의 전쟁 배상금 수급, 사할린 전체와 캄차카 반도 및 연해주를 모두 할양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성명을 발표한 교수식당에는 신문과 라디오 기자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을 정도로 많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우리 교수 7인은 이 조건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결의문을 정부에 제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열띤 어조로 말했다.

거기에는 교수 7인이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기립해 있었는데, 그들의 면면은, 도미즈 히로토, 도미 마사아키라, 가나이 노베, 데라오 도루, 다카하시 사쿠에이, 나카무라 신고, 오노즈카 기에이지로서 모두 법학부 교수들이었다.

양식 있는 다른 학부 교수들은, "역시 법대 교수스럽다"라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더 날카로운 교수들은 <7인의 교수회>라는 명칭도 적잖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농부였다면 '7인의 농부회‘라는 명칭을 썼을까?"

이런 의문을 갖는 교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7인의 떼밀이회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히득거리는 교수도 있었다.

아무튼 저널리즘과 지식인들의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러강화조약의 체결을 축하하는 미국인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일본 열도 전역에서 들끓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아노미에 빠져들고 있었다. 강화문제동지연합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급조되었고 전국적인 강화 반대 운동에 휩싸이면서 조약의 취소와 외상의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기야 불과 닷새 만에 그들의 집회는 폭동으로 치달았다.

히비아 공원 집회가 폭동의 시발이었다.

강화조약 즉각 파기! 만주 대륙 총진격! 고무라를 처단하자! 대신 관저에 불을 지르자!

4만에 가까운 군중은 도쿄 시내를 무법의 거리로 만들면서 200곳의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고 전차 16대를 전소시켰다. 그들은 대신 관저 다섯 곳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들은 강화조약의 성립을 중재한 루스벨트의 초상을 화형하면서 미국 대사관으로 돌진했다. 마침 방일 중이던 루스벨트의 딸 엘리스는 한국으로 피신해 정동 손탁호텔에다 트렁크를 옮겼다.

소박하고 평범한 아저씨들이 파시즘의 주체

일본인들은 미국 교회에 난입했으며 미국 목사들을 끌어내 폭행하기도 했다. 강화조약 체결을 축하했던 미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일본 국민들에 대한 유감과 불신을 나타내는 논조로 바뀐 기사를 실었다. 미국인들의 배일 감정은 인종 차별 의식과 맞물려 나타났다.

신이 있는 장소를 파괴하는 것은 야만적인 일이다. 그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으며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이번 소요는 일본인들이 내세웠던 문명과 인도주의가 허구라는 것을 입증했다. 그들은 황색의 야만인에 불과하다.

배일, 반유색인 감정은 북미와 호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것은 1905년의 일이었지만, 최초로 보인 태평양전쟁의 조짐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일본이라고 해서 양식 있는 지식인이 없을 리는 없었다. <국민신문>의 도쿠토미 호소 논설위원은 대다수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행동을 무분별한 선동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실력과 소신으로 국민들을 설득했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짚었으며, 일본의 실제적 국력과 대국 러시아의 저력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는 <국민신문> 사설을 통해, 조약 체결을 굴욕이라고 비난하는 무절제한 여론몰이를 비판했다.

이제 우리는 전승의 결과로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처음 목적을 달성했다. 아니, 처음 목적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의 주장은 강화조약으로 전부 관철된 것이다. 게다가 전승의 부수 효과까지 유감없이 얻었다.

다음 날 오전, <국민신문> 사옥은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파괴되었다. 놀라운 점은 신문사 사옥을 때려 부순 이들은 직장에 출근하는 대신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고 온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동경 시민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훗날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가스실의 밸브를 돌린 101 경찰예비연대 병사들의 대부분이 열렬한 나치당원이 아니라 소박하고 평범한 독일 아저씨들이었던 이치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할 점은 이것이 일본 파시즘의 출발을 알리는 극적이고도 날카로운 징조였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울 수 있었던 시간들
 
나윤숙은 이강국이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강국은 독일에 가 있는 동안 나윤숙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었다. 편지 한 장 정도는 해줄 것으로 내심 기대했던 그녀는 이강국에게 서운함을 느꼈는데, 이강국은 귀국하고 나서도 아무런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강국에 비해 이광수는 감성적이고 관대한 신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부전호 여행을 갔을 때 이광수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달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소년처럼 올려다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저 구름송이를 잡을 재주는 내게 없다네."

나윤숙은 이광수의 눈을 고즈넉이 들여다보았다.
"그대가 바로 저 고개 위에 떠가는 구름이오."

그렇게 해서 그녀는 고개 령, 구름 운으로 영운(嶺雲)이라는 호를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광수의 나이는 너무 많았다. 그는 이강국보다 최소 15세는 연상이었다. 나윤숙은 불현듯 이강국을 직접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러일전쟁, #일본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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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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