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빗길 자전거와 버스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볼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네 번째 ‘시각총서’를 낸다며, 네 번째 사진감은 ‘청소년 문화’를 잡았다 하고, 이 네 번째 사진감을 책으로 묶어내도록 사진을 찍어 올 사진쟁이들을 열한 사람을 당신들 나름대로 뽑았는데, 저도 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획모임에 함께했고, 일하는 고단함과 견주어 아주 낮은 일삯밖에 받을 수 없으나, 이 사진일을 해 보기로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저녁나절 멎었지만 길은 축축하고, 길섶에는 물 고인 데가 많습니다. 자동차 움직이는 찻길 복판에는 물기가 거의 말랐지만, 자전거가 달릴 길섶은 흥건.

 

광화문을 지나 서대문고가를 탑니다. 아차, 집으로 가려면 왼쪽 서울역으로 꺾어서 용산으로 가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자전거는 이렇게 달리게 되었고, 에라 이렇게 달렸으니 신촌에 있는 헌책방들 좀 찾아가 보자고 생각합니다. 일민미술관에 들르기 앞서 찾아간 노량진 헌책방에서 가방이 터질 듯 책을 골랐기에 더 책을 구경하기는 힘들지만, 오늘은 택배를 부탁해야겠다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달리는데, 아현동 고가 밑에서 시내버스 한 대가 갑자기 자전거 앞으로 쑥 끼어듭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목숨이 간당간당. 죽을 위험에 놓였다가 재빨리 손을 써서 버스에 안 치이고 길바닥에도 안 미끄러지며 가까스로 ‘내리막길에서 달리던 빠르기’를 추스릅니다. 뻔히 자전거가 빗길을 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저렇게 달려들어도 되나?

 

모든 버스기사가 이러하지는 않을 터이나, 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되면, 자전거꾼은 잠깐 사이에 저승사람으로 바뀝니다. 1/100이라 해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이대 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는데, 신촌역으로 빠지는 네거리가 나올 무렵 또다른 시내버스가 자전거 앞으로 불쑥. 아까보다 더 깊은 내리막이었기에 이번에는 더더욱 아슬아슬. 비에 젖은 길이니 함부로 제동도 할 수 없는 형편.

 

버스기사는 자전거를 못 보았을까요? 버스기사가 자전거를 못 보았다면, 그이는 버스를 몰 자격이 없습니다. 길에서 불을 번쩍이면서 움직이는 물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운전수는 버스에 탄 사람들을 걱정없이 나를 수 없습니다. 버스기사가 자전거를 보고도 그렇게 했다면, 이이는 살인자입니다. 살인미수로 그치고, 또 자전거꾼이 주먹질만 한두 번 하고 지나가게 된다 해도, 이이는 마음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잇달아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일을 겪으며 겨우 자전거를 추슬러 길섶에 끼이익 멈춥니다. 또다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저 미친놈을 곧바로 버스에서 끌어내려서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 버스기사는 욕을 먹어도 자기가 왜 욕을 먹는지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외려 더 욕질을 맞받아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잘못을 잊고, 저한테 욕을 퍼붓는 사람을 미워하며, 앞으로 더더욱 자전거꾼을 못살게 구는 미친 운전질을 해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아남았으니, 내가 저이를 가엾게 보아주자고 생각합니다. 한숨 후유 내뱉고 자전거를 달립니다. 그런데 뒷바퀴가 이상합니다. 잘 나아가지 않습니다. 뭐지? 왜 이러지? 십 미터쯤 달리다가 다시 길섶에 붙어 거님길로 올라섭니다. 뒷바퀴를 만져 봅니다. 바람이 피시식 빠지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길에서 불쑥 밀어붙이며 앞으로 끼어든 버스한테 치이지 않으려고 비껴 달리다가 뒷바퀴가 갑작스레 뒤틀리게 되면서 튜브가 찢어진 듯. 축축한 이런 날씨에는 고무판을 대어 고칠 수도 없는 노릇. 새 튜브로 갈아야 할 텐데, 지금은 가방에 새 튜브도 없고. 허허 참. 이를 어쩐다.

 

(2) 묵은 잡지에서 만난 사람들

 

자전거를 굴려서 신촌에 있는 헌책방 '숨어있는 책'으로 걸어갑니다. 그냥 이대로 전철에 자전거를 싣고 갈까 하다가, 차라리 책방에 자전거를 맡긴 다음, 책이나 더 보고 가자고 마음을 고칩니다. 어차피 못 타게 된 자전거, 다음에 언제 또 서울에 볼일이 생겨서 나들이를 하면 그때 손보고 고치자고 생각합니다. 히유.

 

책방 뒤쪽 비 안 들이치는 자리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책방 아저씨한테 부탁합니다. 그리고 책 구경.

 

홀가분하지 않는 마음이기는 하나 책은 눈에 잘 들어옵니다. 오랜만에 즐기는 헌책방 나들이이고, 오랜만에 만나는 헌책방 아저씨인지, 아저씨가 묻는 이런저런 안부에 이렇게저렇게 대답해 드리면서도 요 책 조 책 쏙쏙 골라내어 읽습니다.

 

 

<김원일-그림 속 나의 인생>(열림원, 2000)이라는 수필모음을 펼칩니다.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쓰는 분들이 펼친 소설과 시도 즐겁지만, 이렇게 자기 갈래가 아닌 ‘잡글’이라고 하는 수필을 읽어도 즐겁습니다. 저는 오히려 소설가나 시인이 쓴 수필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당신들께서는 당신이 걸어가는 소설과 시를 쓸 때와는 사뭇 다르게 마음이 덜 매이고 조이고 얽혀서, 수필에서만큼은 꽤나 느긋함과 너그러움을 보여주곤 합니다. 아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수필책이라고 할까요.

 

.. 콜비츠의 그림을 처음 만나기는 그녀의 목판화 '프롤레타리아' 시리즈의 하나를 내 네 번째 소실집 <환멸을 찾아서>에 표지화로 채택한 1984년 전후가 아닌가 한다. 그 무렵 나는 표현주의파 화집을 들추다 에칭 한 장에 눈길이 멎었다. '시립구호소'(1926)를 본 순간 나는 감전이나 당한 듯 그림 속으로 빠르게 흡인되는 마성에 전율했다 … 굶주림과 가난에 대해, 실오라기처럼 남은 목숨의 애처로움을 두고 이처럼 적확하고 절실하게 표현한 그 어떤 그림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  (139쪽)

 

<사랑은 철따라 열매를 맺나니>(마더 데레사 씀, 도로시 헌트 엮음, 문학숙 옮김, 민음사,1995)가 보입니다. 마더 데레사 님 기도글을 모은 책입니다. 기도를 할 때 따라 읽어도 좋을 테고, 꼭 기도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다스리면서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커피 뽑는 기계 위에, 어느 한 집에서 쏟아진 듯, 잡지 첫 호가 한 뭉치 얹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잡지 첫 호를 모으는 사람도 아니요, 이 많은 잡지를 모두 사들일 주머니가 되지도 않으니, 눈길을 끄는 두 권만 집습니다. <비디오> 1호(1985.4.)와 <TV저널> 1호(1991.10.26.).

 

주간잡지 <TV저널>은 첫 호가 나올 때부터 알아서, 늘 형 심부름을 받아서 집부터 걸어가서 잡지 파는 곳을 오가면서 사 오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집 둘레에는 마땅히 신문 파는 곳도 없어서, 어릴 적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신문 한 장을 사려고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서 한 장 사들고 오곤 했어요. 오가는 데 얼추 20∼30분쯤 걸렸습니다.

 

.. 위에 보이는 것과 같은 내 소품(푸르른 날)을 그가 단숨에 노래부르는 걸 들으면서 나는 그 노래의 가락이나 음색이 메스껍거나 너절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느끼지 않은 채 따라가고 있다가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에 가서는 내 자신이 그걸 작곡한 것 같은 공명감 속에 젖어들기도 했었으니, 나로선 좋은 작곡가를 하나 얻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이상으로 자기 시의 작곡이라는 걸 더 기대해 보기도 어려운 일 아닐까? 그런데 그 뒤 송군과 내가 만난 어느 좌담회에서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그는 인천의 고교생 시절에 내가 강연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하던 말 가운데서 “슬픈 일 그것은 늘 잘 사귀어서 좋은 벗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했던 말이 그의 마음속에 남아 그 뒤의 그의 인생과 예술을 이끌어오는 데 마음의 힘이 되었다는 것이어서, 나는 이게 또 눈물겹게도 무척 고마웠다. 나와 그는 말하자면 이렇게 서로 잘 통할 만한 가슴과 가슴을 지니고 있었구나 해서 말이다 ..  (서정주-나의 스타론 : 송창식 / 63쪽)

 

묵은 잡지 <TV저널>을 죽 펼칩니다. 낯익은 얼굴이 많이 보입니다. 이제는 텔레비전을 아예 안 보기에 연예인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지만, 이 무렵은 드문드문 보곤 했기에 여러 이름이 살갑게 다가옵니다. 이 가운데 송창식 님 이야기를 쓴 서정주 시인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시쓰는 서정주 님께서는 어쩌면 송창식 님 집안 이야기를 모르셨을 텐데, 저도 얼마 앞서까지는 몰랐지만, 노래하는 송창식 님이 어릴 적 어떻게 지내야 했는가를 듣고 난 뒤, 이분 노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다른 노래도 노래이지만, 무엇보다도 '왜 불러'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송창식 님 고등학교 적 동무인 김윤식 시인한테 듣고서는 가슴이 몹시 저렸습니다. 먼저 '왜 불러' 노래말을 옮겨 보지요.

 

..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은 / 왜 불러 왜 불러 토라질땐 무정하더니 왜 / 자꾸자꾸 불러 설레게 해 / / 아니 안 되지 들어서는 안 되지 / 아니 안 되지 돌아보면 안 되지 / 그냥 한번 불러보는 그 목소리에 / 다시 또 속아선 안 되지 / 안 들려 안 들려 마음 없이 부르는 소리는 / 안 들려 안 들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아 / 이제 다시는 나를 부르지도 마 / 가던 발걸음 멈춰선 안 되지 /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에 / 자꾸만 약해지는 나의 마음을 / 이대로 돌이켜선 안 되지 /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은 / 왜 불러 왜 불러 토라질 땐 무정하더니 왜 / 이제 다시는 나를 부르지도 마 ..

 

제가 혼자만 몰랐나 싶어서 인터넷 기사나 자료를 뒤져 봅니다만, '왜 불러'라는 노래를 ‘장발 단속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하던 때를 풍자하는 노래’쯤으로만 여기고, 정작 이 속내까지는 살피지 못합니다. 그때 1970년대 사회 흐름을 헤아린다면, 그렇게 ‘사회와 정치 풍자’ 노래로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 노래 '왜 불러'는 자기를 버린 친어머니 때문에 부르게 된 노래입니다. 자기를 버린 친어머니가 어느 날 자기가 외롭게 남의집살이를 하는 곳에 찾아와서 자기 이름을 부르더랍니다. 보고 싶다고. 친어머니는 애닯게 부르기까지 했답니다. 송창식 씨는 ‘이제까지 나를 버리고 한 번도 찾으러 오지 않고서 이렇게 늦게 와서 어떻게 하겠다고’ 하면서 끝내 대문을 열어 주지 않았답니다. 여태까지 외롭게 내버려 두고, 이제 다 자라니까 찾아와서 자기한테 어쩌라는 거냐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친어머니가 더 자기를 부르지 않고 돌아갈 때까지 참았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처음으로 듣고 난 다음, 송창식 님이 부른 다른 노래들에도 이렇게 당신한테 가슴 저린 삶을 찬찬히 담아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창식 님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니라 당신 삶을 칼로 저며내듯 외친 울부짖음이 아니냐 싶더군요. 서정주 시인이 쓴 시 '푸르른 날'에 가락을 입힌 일도, 어쩌면, 당신이 걸어야 했고 당신이 부대껴야 했던 숱한 아픔과 눈물이 고이 담겨 있어서 그렇게 목이 터지게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을 외치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외쳤겠구나 싶더이다.

 

 

잡지를 다시 펼칩니다. 죽 넘깁니다. 맹구 아저씨 연기 이야기가 보이고 임현식 아저씨와 박은수 아저씨가 MBC 1기 탤런트 동기였다는 옛 사진이 한 장 보이며, 롯데제과에서 새로 내놓는다는 ‘노란껌-파란껌-하얀껌’ 광고가 보입니다. 저런 껌이 다 있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생각해 보면, 이렇게 고운 이름으로 껌이름을 삼아도 좋겠다 싶기도 하고.

 

.. ‘탈 하이틴 스타’를 선언한 하희라(22)와 최진실(23)이 브라운관에서 자존심을 건 연기대결을 벌이게 됐다. 청소년 층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이들이 톱스타라는 최정상의 명예를 걸고 맞붙게 될 작품은 MBC TV 새 주말연속극 <사랑이 뭐길래> … 반면 최진실은 88년 삼성전자 모델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해 영화 <남부군> <꼭지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준 뒤 최근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에 출연, 미혼모의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서로 다른 무대에서 인기의 발판을 탄탄하게 다진 하희라와 최진실. 이들이 한 드라마 속에서 펼칠 연기대결은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  (17쪽)

 

다음으로 눈길이 멎은 자리는 최진실 님과 하희라 님을 맞대어놓은 기사 한 꼭지.

 

최진실 님 집에도 이때 이 잡지가 잘 간직되어 있을까 궁금합니다. 한창 이름값을 높이면서 널리널리 사랑을 받던 이 무렵 잡지 기사를 잘 챙겨 놓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1991년 이해와 이듬해, 저는 제 동무녀석 누나가 일하는 신포동거리 옷집에 놓인 ‘씨(si)’라는 옷 홍보책자를 철마다 한 권씩 얻곤 했습니다. 그때 최진실 님은 ‘씨’라는 상표가 붙은 옷 전속모델이었고, ‘씨’라는 곳에서는 철따라 한 번씩 ‘처음부터 끝까지 최진실 님이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찍은 사진’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동인천 대동학생백화점에서 최진실 님 사진을 주머니 돈이 닿는 대로 사서 책받침을 만들던 일이 떠오릅니다. 가까운 동무하고 <숲속의 방>이며 <수잔브랑크의 아리랑>이며, 최진실 님이 나온 영화를 동인천과 주안에 있는 극장을 찾아다니며 보던 일이 떠오릅니다. 서울에서는 관객이 쏠쏠히 들어찼는지 모르지만, 인천에서 이 영화들을 보던 때, 극장에 함께 있던 관객 숫자는 여섯, 일곱, 열다섯 그랬습니다. 자막이 다 내려가고 불이 켜져서 기지개를 켠 다음 일어서며 뒤를 돌아보는데, 우리 앞에 앉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손가락으로 셀 만큼밖에 차지 않던 극장이란.

 

 

학교에 가면 틀림없이 동무녀석들이 어느 연예인이 좋고 어느 영화배우가 좋고 하고 떠들면서, 정작 자기네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배우가 나온다고 하는 영화는 찾아서 보지 않았다고 해야 할는지. 동무녀석들은 당구 하고 담배 태우고 하는 데에도 쓸 돈이 모자라서 영화까지 볼 겨를이 없었는지. 그러나 우리 학교야 그렇다 치고 둘레에 있던 다른 학교는?

 

이제는 영화에서고 방송 연속극에서고 다른 어디에서고 두 번 다시 살아움직이는 모습으로는 만날 수 없는 최진실 님을 마음속으로 담아 봅니다. 활짝 핀 웃음꽃 뒤에 어떤 울음꽃과 눈물꽃이 있었는지는, 멀리멀리 떨어진 ‘최진실 사랑이(팬)’ 한 사람으로서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만, 부디 그 눈물꽃도 울음꽃도 고이고이 내려놓은 채,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하늘나라에 따숩게 안길 수 있기를.

 

(3) 책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는

 

어느덧 스무 해가 훌쩍 지나가 버린 낡은 목록이라 할 만한 <Carl Shipman-Minolta SLR Camera>(HPbooks,1982)를 봅니다. 오로지 필름사진기만 있던 지난날에는 대단히 사랑받았을 목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는 사진 역사를 더듬는 분이 아니라면 거들떠볼 일이 없을 목록이 아니랴 싶고.

 

사진잡지 <Popular Photography> 1975년 11월호를 구경합니다. 잡지 <sports graphic Number> 1988년 10월 긴급증간호도 구경합니다. 1988년에는 우리나라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이 잡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백예순 나라가 펼치는 꿈’을 특집으로 삼습니다. ‘꿈’이라. 일본에서 나온 이 잡지 겉에 굵직하게 적힌 ‘꿈’이라는 낱말을 보면서, 1988년 올림픽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얼마나 큰 꿈이었을지 곱씹어 봅니다. 새 꿈을 피워낸 사람도 있을 테고, 철거와 개발에 따라 집터를 내쫓기며 꿈을 빼앗긴 사람도 있을 텐데, 우리 역사책에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어떤 역사로, 어떤 이야기로, 어떤 모습으로 아로새겨 놓을는지요.

 

<김영도-나의 에베레스트>(평화출판사,1980)는 에베레스트라는 산을 오른 사람 이야기를 그 무렵 아이들한테 들려주려고 엮은 책.

 

.. 산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봄,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을 낙엽을 밟으며 오르는 가을, 그리고 하얗게 눈 덮인 산에 텐트를 치고 모닥불가에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겨울 ..  (9쪽)

 

<그림으로 만나는 파브르 곤충기 (1) 왕공작나방과 신비한 벌레 이야기>(쿠마다 치카보 지음, 김석희 옮김, 웅진닷컴, 2002)를 책시렁에서 살며시 꺼내어 펼칩니다. ‘웅진닷컴’이라는 출판사 이름은 이제 안 쓸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설마 이 책도 판이 끊어졌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보일 때 사 두어야겠구나 싶어 이 책까지 셈하고 나서 집에 와 인터넷새책방에서 찾아봅니다. 아직 판이 끊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안 팔리는 책으로 보입니다. 머잖아 판이 끊어질 듯하고, 한 번 판이 끊어지면 다시 우리말로 옮겨지기 어려웁겠다는 느낌. 책 끝에 그린이를 짤막하게 소개하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쿠마다 치카보] 이 책의 작가인 쿠마다 치카보는 1950년부터 곤충 세밀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벌써 50년 이상 그 일만 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곤충과 꽃을 좋아하고 즐겨 그리며 파브르를 존경했던 치카보는 <파브르 곤충기>의 곤충들을 그리는 것을 신의 계시라 생각하며 필생의 작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에만 평생 전념해 온 진지한 장인 정신은 높이 인정받아 그의 동호회, 기념관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세밀화는 <파브르 곤충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곤충들의 생태 정보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음은 물론, 곤충과 작은 생명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어 사실 이상의 감동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는 이 책의 그림들로 볼로냐 국제도서전원화전에서 두 번이나 입상해 …….

 

그린이 쿠마다 치카보 님은 아직도 살아 계실까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삶이 저물어 가는 끝자락에 서 계신지 모릅니다. 그래도 이분은 붓을 안 놓고 있을 테지요.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살며시 눈을 감는 그날까지 당신 손에는 붓이 들린 채, 당신이 온마음으로 사랑하고 온몸으로 아끼는 풀벌레와 풀꽃 이야기를 그림 하나로 담아내실 테지요.

 

삶이란, 삶을 담는 책이란, 책에서 얻는 삶이란, 책에서 배우는 삶이란, 삶을 꾸리면서 길동무를 삼는 책이란, 책과 함께 걸어가는 삶이란, 우리 삶에서 책 하나란 무엇일까요.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고, 죽을 동 말 동 사는 사람이 있으며, 금세 죽을 듯하면서도 애써 삶자락 붙잡는 사람이 있고, 삶을 잘 여밀 듯하더니 그예 스스로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파서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얼마나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껴서 꿋꿋하게 버티면서 살아갈까요. 몸에 닥친 장애와 마음에 닥친 장애란 또 무엇이고, 우리 피와 살을 물려받아 태어난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한테 삶이란 또 무엇일까요.

 

 

책은 우리 삶에 얼마나 빛이 되거나 살이 되거나 힘이 되거나 기쁨이 될까 궁금합니다. 책 하나를 읽으면서 더 나은 삶을 꾸려내게 될까 궁금합니다. 날마다 새 밥그릇을 비우고 새로운 일거리를 붙잡으며 새로운 놀이를 즐기듯, 나날이 쏟아지는 새로운 책과 나날이 묻히거나 스러지는 헌책방 책을 새삼스럽게 붙잡는 사람은, 자기 삶을 더 단단히 여미거나 엮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노고산동 〈숨어있는 책〉 / 02) 333-1041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태그:#헌책방, #숨어있는책, #자전거, #송창식, #최진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